83화 대주교를 토벌하라 (3)
무너져 내린 바위와 토사(土沙)가 아그리파 가문의 그래듀에이트들을 집어삼켰다.
그 광경을 높은 곳에서 지켜보며,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걸려들었군.”
이 냉혹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인물이야말로, 흑천마교의 대주교인 아르테클라스였다.
그 주위에도 마찬가지로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들 들뜬 표정이었다.
“대주교님의 계책이 먹혀들었습니다!”
“예전부터 준비해 온 보람이 있었군요!”
아르테클라스와 부하들은 이곳에 거점을 만들면서 주위 지형을 자세히 조사했다.
그 결과, 땅 밑에 꽤 커다란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굴을 폭파하면 그 일대를 무너뜨릴 수 있고, 산사태까지 불러일으켜 산을 올라오는 적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
아르테클라스는 들떠 있는 부하들을 진정시켰다.
“아까 산을 올라오는 모습을 보니, 놈들은 상당히 수준 높은 그래듀에이트들이다. 산사태에 휩쓸렸다고 해서 목숨까지 잃은 놈들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아……!”
“게다가 후방에 있는 놈들은 별로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다. 이제 곧 놈들이 구조 작업에 나서겠지.”
“놈들이 태세를 정비하기 전에 몰아쳐야겠군요.”
“그런 것이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르테클라스가 주위를 둘러봤다.
“영광스러운 흑천마교의 전투 사제들이여!”
대기하고 있던 전투 사제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들이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함정에 걸려들어, 적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오오오……!”
목소리를 높이며 호응하는 사제들 앞에서, 아르테클라스는 손을 치켜들었다.
“일제 공격으로 놈들을 소탕한다! 놈들에게 흑천마교의 힘을 보여 줘라!”
* * *
“빌어먹을……!”
카시르는 바위를 밀쳐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이라고 해도 이렇게 큰 규모로 산사태가 일어나면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호신기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목숨은 건졌지만, 몸 이곳저곳에 부상이 있었다.
“다들 괜찮나?!”
흙먼지로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대답 소리가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다들 토사에 휩쓸려 생매장당한 걸까.
‘아그리파 가문의 정예 그래듀에이트가 고작 이런 산사태에……!’
파묻힌 동료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카시르는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그때 머리 위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설마 또 산사태가……?!’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자, 흙먼지 너머로 커다란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산사태는 아니다. 하지만 자연적인 현상도 아니었다.
‘마교 놈들이 바위를 떨어뜨리고 있는 건가?!’
쿵, 쿵!
굴러오는 바위를 처리하기 위해, 카시르는 다급히 검기를 전개했다.
“하압!”
콰앙!
바위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일도양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굴러떨어지는 바위는 하나가 아니었다.
“으악……!”
“……!”
근처에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있던 아군이 바위에 깔렸다.
바위가 계속 굴러떨어져, 주위에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젠장……!”
카시르는 어떻게든 아군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마교 측의 공격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화살……?!”
위쪽에서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래 호신기를 사용할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에게 화살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산사태에 휩쓸려 무력화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호신기를 펼칠 수 있을 리 없다.
“으윽!”
“아악……!”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카시르는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며 검기를 펼쳤지만, 비 오듯이 쏟아지는 화살을 전부 다 쳐 내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놈들을 도륙하라!”
“와아아아……!”
마침내 마교의 전투 사제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교 특유의 붉은색 검기를 펼치면서.
“크윽……!”
저들 중에는 그래듀에이트 중급도 여러 명 있을 것이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제대로 막아 낼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브랜틀리 님……!’
카시르는 마음속으로 주군에게 사죄했다.
이번 일은 선봉대를 지휘한 카시르에게 모든 책임이 있었다.
‘죽음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결심하면서, 카시르는 검기를 펼치며 앞으로 나섰다.
마교 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가야겠다는 심정으로.
“하압!”
“컥……!”
가까이 다가온 전투 사제의 목을 날렸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사제가 달려들어 카시르에게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큭……!”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해 자세가 무너졌다.
발밑이 안정적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젠장……!’
카시르의 머리를 향해 붉은색 검기가 떨어져 내리려던 순간.
쐐애액! 어디선가 날아온 칼날이 전투 사제의 어깨에 꽂혔다.
“억?!”
전투 사제가 비명을 지르며 주춤한 직후.
바람처럼 날아든 은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그 목을 베어 버렸다.
“너, 너는……!”
전투 사제의 목을 날린 청년의 모습을 보며, 카시르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최전선에서 가장 먼 곳에 배치해 놨던 놈이, 지금 카시르 눈앞에 서 있었다.
* * *
“어, 어째서 네가 여기에……!”
등 뒤에서 카시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카시르, 생존자들을 구조해라.”
“뭐, 뭐라고?”
“내 말 못 들었나?”
아까처럼 존댓말을 써 줄 필요는 없다.
나는 강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생존자들을 구조해라. 어서!”
“……!”
카시르가 숨을 삼키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뭐 하는 놈이냐!”
“웬 애송이가……!”
흑천마교의 전투 사제들이 나한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이오니아 신속검술로 간다.’
파앗!
땅을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발을 멈추는 일 없이, 계속해서 이동하면서 공격을 펼치는 것이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이다.
“크악……!”
“억……!”
안겔라에게 얻어 낸 초고속 검술로 전투 사제들을 처치했다.
어떻게든 내 사각을 노려 보겠다고 달려드는 놈이 있었지만, 아래쪽에서 날아온 검이 등을 꿰뚫었다.
“에르나스 님!”
클로에였다.
검을 날려 적을 꿰뚫는 유스부르크 유검술(遊劍術)을 펼친 것이다.
“너무 빠릅니다! 조금만 천천히……!”
슈미츠도 숨을 헐떡이며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갓 터득한 저 녀석들 실력으로는 이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 것이다.
“내가 놓친 잔챙이들을 처리하면서 따라와라, 클로에, 슈미츠.”
“네, 에르나스 님.”
“알겠습니다!”
위로 뛰어오르며 계속 전투 사제들을 도륙하고 있자, 머리 위에서 화살이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 호신기면 화살 같은 건 그냥 튕겨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네놈……!”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나한테 달려들었다.
보아하니 마교의 고위 사제… 그래듀에이트 중급에 해당되는 실력자 같았다.
“너무 까부는구나!”
쿠웅!
그는 두꺼운 대검(大劍)을 사용해 육중한 공격을 펼쳤다.
전신의 붉은 기운이 육체 능력을 극대화해 주고 있었다.
“까부는 것은…….”
그 공격을 피하면서, 나는 놈의 측면을 스쳐 지나갔다.
“네놈이겠지.”
“컥!”
스쳐 지나가면서 휘두른 검이, 놈의 목 옆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도록 만들었다.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놈을 뒤로하고, 나는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위쪽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지고 화살이 날아왔지만,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으윽……!”
“머, 멈춰!”
이윽고 바위를 떨어뜨리고 화살을 쏘던 놈들한테 도달했다.
놈들은 다급히 나를 향해 칼을 치켜들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
지난번에 안겔라에게서 편검기를 배워서 만들어 낸 기술.
그것을 펼치기 위해,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제4식, 편뢰(鞭雷)!’
파직!
길게 뻗어 나간 푸른색 검기가 놈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채찍처럼 빠르게 뻗어 나가는 이 검기는 여러 명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 있다.
“크악……!”
“헉……!”
한꺼번에 쓰러지는 놈들을 뛰어넘어, 나는 앞으로 더 나아갔다.
‘그리고…….’
미약한 마력을 사방으로 방출했다.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활용해, 주위를 탐색한 것이다.
‘저기 있군.’
앞을 가로막는 마교의 전투 사제들을 해치우면서 전진했다.
눈앞에 놈들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났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대신 땅을 박차고 도약하여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틸리온 마력탐측술로 확인해 보니, 이곳에서 반응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시 여기에 있었군.”
이쪽에서 봐야 산 아래가 더 잘 보이기 때문일까.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 인물들이 옥상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숫자는 여섯으로, 그중 다섯은 복장이 똑같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조금 달랐다.
‘금색의 화려한 장식이 달려 있는 사제복…….’
틀림없다.
저놈이 바로 이곳의 우두머리인 아르테클라스 대주교다.
“네놈……!”
“여기가 어디라고!”
아르테클라스의 측근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아르테클라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것 참, 무척 놀랍군.”
그는 나를 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혼자서 거침없이 산을 올라오는 녀석이 있어서 누구일까 했는데, 설마 이렇게 젊은 아이였을 줄이야… 이름이 뭐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다, 아르테클라스 대주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아르테클라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군. 자네가 란즈슈타인 가문의 후계자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나 보지?”
“물론이지! 필체스터 지부의 카스타리온을 쓰러뜨린, 아카데미의 샛별 아닌가!”
그는 내가 흑천마교 필체스터 지부를 토벌했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요즘 아카데미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이라더니 정말 대단하군.”
“칭찬해줘서 고맙군, 아르테클라스 대주교.”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아르테클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비꼬는 게 아닐세.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자네는 이미 아카데미 학생의 범주를 넘어선 실력을 지니고 있던 것 같더군. 이미 그래듀에이트 중급에 도달한 것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카시르보다 흑천마교 쪽이 내 역량을 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아카데미의 정규 교육 과정만으로는 이 시점에서 그 정도 경지에 도달하는 게 불가능할 텐데… 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걸까?”
“…….”
“자네 혹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나?”
아르테클라스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웃었다.
“우리 흑천마교 사람들처럼 말일세.”
“…….”
어느새 아르테클라스 주위에 있던 측근들이 검을 뽑아 든 상태였다.
그들은 모두 붉은색 검기를 전개한 상태였다.
“다들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한 실력자들이지. 우리 흑천마교의 영약인 ‘소마’를 정기적으로 복용한 덕분일세.”
“…….”
“내가 보기에 자네는 소마를 아주 잘 소화할 것 같군. 어떤가? 마교에 귀의하여 더 높은 경지에 올라 보지 않겠나?”
그 말을 듣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미안하지만 소마는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말이야. 입에 대고 싶지 않군.”
“선입견이 심하군.”
별로 기대 안 했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아르테클라스가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장검이었지만, 한번 휘두르자 갑자기 칼날이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었다.
‘사복검(蛇腹劍)…….’
아르테클라스의 사복검은 와이어로 연결된 여러 개의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채찍처럼 휘두르면서 먼 거리나 넓은 범위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였다.
현실 세계라면 별로 실용성이 없겠지만… 여기서는 마력을 사용하여 컨트롤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한다.
“나도 소마를 통해 마력을 얻어… 이렇게 절정급의 경지에 도달했는데 말이다.”
“…….”
그렇다.
흑천마교의 대주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아르테클라스는 절정급의 경지에 도달한 그래듀에이트였다.
“그래서,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붉은 기운으로 사복검의 조각 하나하나를 컨트롤하면서, 아르테클라스가 미소 지었다.
“자네는 그래듀에이트 절정급 한 명과 상급 다섯 명을 상대로 혼자서 어떻게 싸울 생각이지?”
아르테클라스가 웃는 얼굴로 나를 조롱했다.
“실력을 감안하지 않고 머릿수만 따져도 육 대 일인데 말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아르테클라스.”
“뭐라고?”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지금 내 실력으로 아르테클라스와 그 측근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클로에나 슈미츠가 합세한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내가 여기로 올라온 건, 아래쪽에서도 올라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하면서 확인했다.
그렇기에 주저 없이 아르테클라스 앞에 나선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르테클라스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은 순간.
검은색 그림자가 솟구친 뒤, 옥상 위로 떨어져 내렸다.
쿠웅!
짜릿한 진동을 발생시키며, 흑발의 여성이 내 옆에 착지했다.
“우리가 열심히 부상자들을 구조하는 사이에 혼자서 그렇게 앞서가다니… 에르나스, 그러면 안 되지.”
“……!”
음침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놈들이 숨을 삼켰다.
“설마……!”
“아카데미의 흑쇄검(黑鎖劍)!”
안겔라 베르틴스키.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절정급 검사 중 한 명.
갑자기 등장한 그녀를 알아보고 그들이 전율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
콰앙!
아까보다 훨씬 육중한 소리와 함께, 청색 머리카락의 중년 남자가 내 앞에 착지했다.
“…….”
그는 안겔라처럼 나한테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차가운 눈으로 나를 힐끔 쳐다본 뒤, 검을 들고 전투 자세를 취했을 뿐이다.
“저 남자는…….”
“아그리파 가문의 가주!”
브랜틀리 아그리파.
황제에게 ‘청월검(靑月劍)’의 칭호를 받은, 남부 최강의 그래듀에이트.
그 등장에 아르테클라스조차 얼굴이 굳어졌다.
“아르테클라스 대주교, 이제는 육 대 일이 아니라 육 대 삼이 되었다.”
나는 아르테클라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도 머릿수만 따지면 여전히 그쪽이 많긴 하군.”
“다 죽여 버려라……!”
아르테클라스의 고함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