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79화 (79/212)

79화 봐줄 필요가 없는 연습 상대 (1)

방 안에 모여 있는 건 전부 남학생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벨리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죽이지는 않을 거다.”

벨리드의 말에 다들 침을 삼켰다.

“뒷감당이 어렵고, 자칫하면 우리 모두가 퇴학당할 수도 있으니까.”

“…….”

“하지만, 부상을 입혀서 몇 달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으면… 놈은 리히테나워 대공 자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집단으로 에르나스를 습격하여, 부상을 입힌다.

그것이 이 모임에서 꾸미고 있는 흉계였다.

“이 공적으로 우리는 베리스리제 파벌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거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원래 어느 파벌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겉돌던 학생들이다.

벨리드처럼 에르나스 파벌에 들어가려던 학생도 있다.

그들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겨우 안착한 곳이 바로 베리스리제의 파벌이었다.

“현재 베리스리제 님의 측근들은 녹색 4반 시절부터 보좌해 왔던 여학생들이지. 뒤늦게 파벌에 참여한 우리들은 입지가 약할 수밖에 없다.

“…….”

“하지만 우리가 에르나스를 손봐준다면, 베리스리제 님도 우리를 인정하고 가까이하게 될 거다.”

여기 있는 남학생들의 목표는 베리스리제 주위의 여학생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동안 여러 파벌들을 살펴본 결과, 가장 파고들기 쉬워 보이는 곳이 베리스리제 파벌이었다.

루퍼스 파벌은 루퍼스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어 내부에서 권력 다툼을 하기 어려워 보였다.

하인리히 파벌도 2인자인 카밀로가 파벌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고르트 파벌은… 최근 침체되어 있어 애초에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다 함께 베리스리제 밑으로 기어 들어간 것이다.

베리스리제 파벌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야심을 품고서.

“눈엣가시인 에르나스를 손봐줘서 고맙다고, 베리스리제 님도 우리들에게 마음을 열게 되겠지.”

“…….”

“혹시 모르지 않나.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 사적인 호감을 갖게 될지도.”

벨리드의 발언에 몇몇 학생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베리스리제가 빼어난 외모를 지닌 여학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베리스리제는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더라도 황녀와 결혼할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마음속으로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훗날 베리스리제와 맺어져서, 제국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가는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리히테나워 대공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가 걸려 있다. 우리가 큰 공을 세우면, 그만큼 보답이 있을 거다.”

리히테나워 대공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가 걸려 있다는 점.

이것이 그들의 현실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들이 제대로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면, 리히테나워 대공의 남편이 되어 권력을 손에 넣는다는 망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짓밟아 주자.”

그리고 벨리드에게는 에르나스에 대한 악감정도 있다.

에르나스 파벌에 넣어 달라고 부탁하러 갔다가 거절당했던 원한이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랬다저랬다 태도를 바꾼 벨리드 잘못이 더 크지만 말이다.

“일대일로 싸우면 승산이 없겠지만… 우리들 모두가 일제히 기습하면, 아무리 그 녀석이라고 해도 버티지 못할 거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2차 시험을 통과한 그래듀에이트뿐이다.

아무리 에르나스가 대단하다고 해도, 그래듀에이트 여러 명이 기습하면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 오만한 녀석을, 우리들 손으로 끝장내 주는 거다.”

원한이 가득 담긴 벨리드의 목소리에, 주위 남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수련생 기숙사에는 나 홀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른 녀석들은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터득할 때까지 안겔라 클래스에서 합숙을 해야 한다.

‘리히테나워 경신술은 터득해야 돼. 여러모로 쓸모가 많으니까.’

이미 경신술을 사용할 줄 아는 클로에, 움직임이 빠른 슈미츠는 금방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세리느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고… 걱정되는 건 굼뜬 편인 비올라 정도다.

‘다 끝날 때까지 안겔라에게 개인 지도를 받고 있으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기숙사 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했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식당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

하지만 나는 식사를 하면서 묘한 기척을 느꼈다.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어떤 녀석들이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듀에이트로서 성장하면서 감각이 예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탓이다.

‘누굴까.’

슬쩍 살펴보려고 했을 때, 식당 안에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의 후계자, 루퍼스 이그니아스였다.

“에르나스, 아직도 식사를 안 했나?”

“너는?”

“나도 아직이다.”

루퍼스는 배식을 받은 뒤 내 맞은편에 앉았다.

“에르나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식사 도중, 루퍼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하려고 한다는 게 사실인가?”

“…….”

루퍼스의 눈빛은 진지했다.

“누구에게 들었지?”

“벨리드 앤드류스에게서.”

“…….”

벨리드는 얼마 전에 내 파벌에 들어오려고 기웃거리던 녀석이다.

내가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겠다고 하자 난색을 표하며 물러섰다가, 나중에 태도를 바꿔 다시 접근했다.

“그 녀석은 지금 베리스리제 쪽에 붙었다고 들었는데.”

“그 이전에는 내 파벌 쪽에 들어오려고 기웃거렸지. 정보를 제공해 주면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루퍼스는 누구를 특별히 대우해 주는 일이 없다.

본인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원 톱 체제를 선호해서, 아랫사람은 그냥 다 평등하다.

“에르나스, 나는 네가 이해되지 않는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루퍼스가 말했다.

“우리 검술명가들은 나라의 기둥이다. 기둥을 잃고 이 제국이 제대로 존속될 수 있을 것 같나?”

“그 기둥이 이미 하나 부러져 버렸지.”

랭커스터 가문이 몰락한 걸 언급하자, 루퍼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면 새로운 기둥을 하나 더 세우면 되는 거다.”

“새로운 기둥?”

“바스티안 가문을 한 단계 올리면 된다.”

“…….”

6대 검술명가는 전부 공작 가문이다.

후작의 작위를 지닌 바스티안 가문은 그 바로 아래다.

“바스티안 가문을 승격시켜 랭커스터 가문을 대체하게 한다는 얘기로군.”

“네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얘기일 텐데? 세리느 바스티안과 가까운 사이 아닌가?”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아.”

나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단순히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하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거든.”

“뭐라고?”

“명문가 중심의 현 체제를 뒤집어엎을 생각이야.”

이건 벨리드한테도 말했던 내용이다.

하지만 벨리드는 루퍼스가 솔깃하도록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한다는 얘기만 한 모양이었다.

“…….”

루퍼스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네 노림수를 알겠군, 에르나스.”

“…….”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에 오른 뒤, 황제 폐하를 등에 업고 중앙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를 생각인 건가.”

그것은 지난번에 클로에가 지적한 것과 비슷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6대 검술명가 같은 명문가들의 힘을 최대한 빼 놓아야 너한테 유리하겠지.”

“나한테만 유리한 게 아니지.”

“뭐라고?”

“차기 황제가 될 황녀 전하께도 유리하거든.”

“……!”

당연한 얘기다.

강력한 힘을 지닌 귀족들이 존재하면 군주의 권위에 영향이 간다.

게다가 황녀는 아직 아무런 힘이 없는 소녀, 한편 6대 검술명가의 가주들은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 검술을 중요시하는 이 세계에서는 더더욱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중앙집권제라는 것이지.”

“주, 중앙집권제?”

중앙집권제.

중앙정부에 국가의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정치체제다.

힘 있는 가문들이 지방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는 현 체제와 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루퍼스, 중앙집권은 현 체제보다 훨씬 발달한 제도다. 체계적인 시스템만 갖춰지면 국가 운영에 큰 도움이 되지.”

“허황된 소리!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본다!”

루퍼스가 반발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현실 세계의 역사 속에서 봉건제가 쇠퇴하고 중앙집권제가 자리 잡는 과정을 알고 있지만, 루퍼스는 봉건제 속에서만 살아온 인물이니까.

“아무래도 너는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는 것 같군.”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역시 너 같은 놈을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만들 수는 없다.”

식판 위의 식사가 차갑게 식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퍼스가 계속 말했다.

“에르나스, 우리 검술명가들은 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것을 반드시 저지할 거다.”

“그건 너희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지.”

어차피 검술명가들은 전부 내 적이다.

그들이 내 사상을 위험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하지만 말이다, 루퍼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귀에도 들어갔으니, 이 얘기는 조만간 황실이나 궁내부까지 흘러 들어가겠지.”

“뭐라고?”

“내가 이런 사상을 갖고 있다는 걸 알면… 그쪽에서는 누가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에 오르는 걸 바라게 될까?”

“……!”

그렇다.

나는 딱히 이 세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중앙집권제를 들먹이는 것이 아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리한 포지션을 취하려 했을 뿐이다.

‘어차피 검술명가들은 전부 에르나스의 적이야. 그러니… 아군이 되어 줄 세력이 필요해.’

리히테나워 대공은 차기 황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자리다.

그렇기 때문에 리히테나워 대공이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안을 제시한다면, 황실과 궁내부 쪽에서는 환영할 수밖에 없다.

황실 및 궁내부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는 검술명가들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황실과 궁내부에서 나를 지지하게 되면, 검술명가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해.’

훗날, 가주가 직접 정예 병력을 이끌고 와서 나를 죽이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황실 및 궁내부에서 나를 지지하고 있을 경우, 그런 행동을 취하는 건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

황실한테 미움받으면 그 고생을 해 놓고도 리히테나워 대공 자리를 얻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루퍼스한테 얘기해 줬으니, 아버지인 칼레온한테도 전달될 테고… 한동안 고민에 빠지겠지.’

사정상 나는 란즈슈타인 가문의 힘을 활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가문들을 견제하려면 이렇게 아카데미 안에서 계략을 꾸며야 한다.

지금처럼 입만 나불대는 것으로 다른 검술명가들을 견제할 수 있다면, 매우 싸게 먹히는 것이다.

“에르나스… 너는 대체 어떻게 된 놈이냐.”

루퍼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 그런 권모술수를…….”

“권모술수라.”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나는 소설 속 에르나스처럼 권모술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소설 속 에르나스와는 달리, 검술 실력도 갖춘 상태지만 말이다.

“걱정 마라, 루퍼스.”

식판을 들고 자리를 뜨면서, 루퍼스에게 말해 줬다.

“권모술수로 너를 몰락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

루퍼스처럼 정면에서 부딪쳐 오는 상대라면, 실력으로 꺾어 주면 되는 거니까.

‘그러면…….’

식판을 정리하고, 식당을 나섰다.

그러자 시야 구석에서 다급히 몸을 숨기는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벨리드와 함께 나를 찾아왔던 녀석이군.’

식당에서 느끼던 시선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왔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놈들이 합심해서 나를 노리고 있는 거겠지.’

벨리드는 지금 베리스리제 파벌에서 입지를 확보하려고 애쓰는 중일 것이다.

나를 기습해서 부상을 입힌다든가,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아닐까.

‘내 실력을 너무 얕보고 있군.’

녀석들은 내가 그래듀에이트 하급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 여러 명이서 달려들면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랭커스터 본가에서 베테랑 그래듀에이트들까지 쓰러뜨렸다는 걸 모르는 거지.’

녀석들은 제대로 정보도 확보하지 못한 채 섣불리 움직이고 있다.

리스틸보다 더 멍청한 녀석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한테 나쁜 상황은 아니야.’

안 그래도 ‘새로 터득한 기술’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참이다.

녀석들이 자진해서 연습 상대가 되어 준다면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봐줄 필요가 없는 연습 상대니까 말이지.’

아무 배려 없이 두들겨 팰 수 있는 연습 상대는 귀한 법이다.

이 귀한 고기를 낚기 위해, 나는 낚싯바늘을 드리우기로 했다.

* * *

“벨리드, 에르나스가 근처 숲으로 들어갔다.”

“그래?”

“혼자서 검을 휘두르면서 뭔가 기술을 연습하고 있다더군.”

한밤중에 전달된 소식에, 벨리드는 침대 옆에 놓아 두었던 검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는데.”

“오늘 안겔라 클래스를 다녀왔다고 하잖아. 거기서 배운 걸 복습하고 싶은 모양이지.”

“대단한 모범생이군.”

에르나스는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비밀 수련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 숲속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다니… 벨리드가 동료들과 함께 기습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다.

“에르나스의 측근들은 지금 기숙사에 없는 거지?”

“그래, 여러 번 확인했어. 안겔라 클래스에서 돌아오지 않는 상태야.”

세리느, 클로에, 슈미츠, 비올라… 그들은 아직 안겔라 클래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즉, 에르나스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군.”

벨리드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기습에 성공한다면 벨리드는 입지가 급상승하게 된다.

백색 5반에서 레스터 랭커스터가 퇴출당한 이후 계속 우왕좌왕했지만… 이 공적으로 베리스리제에게 중용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잡는다……!”

여러 명의 학생이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제압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휩싸인 채,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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