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교수에게 맞서다 (3)
직속 상관의 등장에 리스틸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아, 안겔라 교수님, 이건…….”
“리스틸, 검을 내려놔라.”
안겔라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급처치부터 해야지.”
“……!”
리스틸의 부상은 심각했다.
어깨 근육이 끊어져 그 아래 뼈까지 엿보일 정도였으니까.
리스틸은 그런 상태에서 나한테 달려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큭……!”
리스틸이 입술을 깨물며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감쌌다.
마력을 활용해 출혈을 멈추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안겔라의 시선이 나한테로 향했다.
“에르나스,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리스틸 교수님에게 일대일로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배우는 중이었습니다.”
“일대일로? 리스틸은 그런 녀석이 아닌데… 네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군.”
리스틸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어질 소리를 하면서 안겔라가 미소 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리스틸 교수님이 시범을 보여 주신 뒤, 저한테 흉내 내 보라고 하셨습니다. 본인을 상대로 말입니다.”
“아하, 이해가 됐어.”
안겔라가 다시 리스틸에게 시선을 향했다.
“에르나스를 얕보다가 부상을 입은 거군, 리스틸.”
“아, 안겔라 교수님!”
리스틸이 어깨를 부여잡은 채 소리쳤다.
“에르나스는 일부러 그런 겁니다! 일부러 저한테 부상을 입히려고……!”
“그런 건 중요치 않아, 리스틸.”
안겔라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설령 에르나스한테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네가 제대로 막아 냈어야지.”
“……!”
“아카데미 교수가 학생의 기습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런 얘기 어디 가서도 하지 마라. 내 클래스의 명예가 실추되니까.”
리스틸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안겔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보아하니 호신기도 전개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은데, 너무 방심했군.”
“그건, 그냥, 가벼운 연습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뭐, 훈련 도중에 부상을 입는 건 흔한 일이지.”
안겔라가 리스틸의 부상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부상이 심하군. 제대로 치료를 하면 회복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석 달은 걸리겠지.”
“……!”
리스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면 아카데미에서 치료할 수 없다.
그러니… 최소 석 달은 아카데미를 떠나 있어야 한다.
“교, 교수님, 저는…….”
“설마 치료를 받을 생각이 없는 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면 리스틸은 오른팔을 영영 쓰지 못하게 된다.
계속해서 검사로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더 이상 아카데미에서 베리스리제를 지원해 줄 수 없게 되지.’
리스틸은 슈라이에르 가문의 지시를 받으며 베리스리제를 위해 암약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큰 부상을 입으면서 아카데미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리스틸이 없으면 슈라이에르 가문은 아카데미에 개입하기 어려워져.’
아카데미에도 슈라이에르 가문의 입김이 닿는 사람은 많이 있다.
하지만 안겔라 클래스의 2인자인 리스틸 이상의 힘을 지닌 사람은 없다.
교관이나 조교 혹은 조교수들을 움직여 베리스리제에게 편의를 봐줄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
‘이제 내 발목을 잡으려면 너희가 직접 움직여야 될 거다, 슈라이에르 가문.’
소설에 등장했던 슈라이에르 가문의 인물들을 떠올리며, 리스틸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갈등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안겔라 교수님…….”
결국, 리스틸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치료를 받기 위해, 한동안 클래스를 비우겠습니다.”
“그래, 일단 의무실에 가서 약이라도 발라 둬.”
“…….”
리스틸이 입술을 깨물며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원망하는 눈빛으로 한동안 쳐다봤지만, 결국 힘없이 훈련장에서 나가 버렸다.
아마 앞으로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지난번에 내가 분명히 말해 뒀는데 말이야.”
훈련장 바닥의 핏자국을 응시하면서, 안겔라가 새카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에르나스가 오면 나한테 데려오라고 했는데.”
“그랬습니까?”
“다른 꿍꿍이속이 있었겠지. 별로 관심은 없지만.”
안겔라는 리스틸이 나를 해치려다가 역공당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리스틸에게 더 냉혹한 태도를 취한 것 아닐까.
“그래서, 에르나스.”
안겔라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스틸에게 부상을 입힐 때도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사용했나?”
“…….”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안겔라가 피식 웃었다.
“지난번 랭커스터 본가에서도 너는 종횡무진 움직이며 적을 쓰러뜨리는 검술을 사용했지.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아이오니아 신속검술 같더군.”
“…….”
“내 클래스로 불러서 자세히 살펴보려 했는데… 마침 리스틸하고 아이오니아 신속검술로 연습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안겔라가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지금 그 검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은 여기 안겔라 클래스밖에 없을 텐데 말이야. 너는 대체 어디서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배운 걸까.”
“꼭 대답해 드려야 하는 겁니까?”
“아니, 그렇진 않지.”
내 질문에 안겔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검사는 자신의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는 게 좋아. 가능하다면 자신이 무슨 검술을 쓰는지조차 감추는 게 바람직하지.”
“…….”
“에르나스, 나는 단지 흥미로울 뿐이야. 너처럼 재미있는 학생은 오랜만이거든.”
내 예상대로, 안겔라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소설 속에 묘사된 안겔라의 성격을 생각하면, 내 입에서 대답을 듣는 것보다 스스로 추리하여 답을 찾아내는 걸 선호할 것이다.
“그래도, 네가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이미 터득한 상태라면 문제가 하나 생겨.”
“무슨 문제입니까?”
“가르쳐 줄 게 없단 말이지.”
안겔라 클래스는 경신술과 남부 검술을 가르쳐 주는 클래스다.
나는 이미 리히테나워 경신술과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터득한 터라, 더 이상 배울 게 없다.
“일단 여기 안겔라 클래스는 꽤 커리큘럼이 잘 짜여 있는 곳이라서 말이야.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리스틸과 다른 교수들이 짜 놓은 거지만.”
“정규 교육과정 중에는 저한테 알맞은 게 없는 모양이군요.”
“그런 거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안겔라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아카데미의 정점에 올라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
리히테나워 대공을 언급하면서, 안겔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교수님은 제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걸 바라시는 겁니까?”
“글쎄, 재미없는 녀석들보다는 재미있는 녀석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게 낫겠지.”
“…….”
“물론, 너보다 더 재미있는 녀석이 있으면 그쪽에 더 기대하겠지만 말이다.”
이것이 안겔라 베르틴스키라는 인물이다.
특별한 신념이나 사상 같은 건 없고, 자신의 즐거움을 우선한다.
“따로 너를 지원해 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안겔라 클래스에서 수련을 받는 동안에는 너를 위해 신경을 써 주지.”
“그렇다면, 교수님.”
나는 안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교수님에게 꼭 배우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래? 그게 뭐지?”
“랭커스터 본가에서 교수님이 검은색 검기를 펼치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
그때 안겔라는 검은색 검기로 주위의 적들을 몰살했다.
그런데 내가 펼치는 검기하고는 단순히 색깔만 다른 게 아니었다.
“교수님의 검기는 매우 길게 늘어나더군요.”
“설마 그걸 배우고 싶다는 건가?”
안겔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에르나스, 그건 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의 검기다.”
“네, 알고 있습니다.”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은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전수하지 않았어. 애초에 누군가에게 전수할 수 있는 검술도 아니고.”
안겔라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절정급의 마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너는 배워 봤자 쓸 수 없다.”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을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닙니다.”
“뭐?”
“말씀하셨듯이, 지금 제가 그 검술을 배워 봤자 제대로 써먹을 수 없을 겁니다.”
나는 안겔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의 기반이 된… 고대의 편검기(鞭劍氣)를 배우고 싶습니다.”
“…….”
일반적으로 검기는 칼날과 같은 형태가 된다.
마력의 양을 늘리면 두께나 길이가 늘어나기도 하지만, 결국 칼날을 뒤덮은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안겔라가 펼친 검은색 검기는 조금 달랐다.
마치 채찍처럼 길게 늘어나, 복잡한 궤도를 그리면서 먼 거리에 있는 적을 쓰러뜨렸다.
이런 식으로 채찍처럼 뻗어 나가는 검기를 편검기라 한다.
“어떻게 편검기를… 아, 페르디난드 클래스에서 알게 된 건가?”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페르디난드는 검술 고고학을 연구한다.
그러니 페르디난드 클래스에서 편검기를 알게 되었다고 하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에르나스, 기본적으로 편검기는 실용적이지 않아.”
“그렇습니까?”
“그래, 위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안겔라가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평범한 검기를 전개한 뒤, 검기를 길게 늘렸다.
“이게 편검기다.”
그렇게 말하며 안겔라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길게 늘어난 검기가… 허공에서 흐느적댔다.
“보다시피 그냥 흐느적댈 뿐이지. 이래서는 위력이 너무 약해.”
채찍이라기보다는, 리듬체조에서 쓰는 리본 같은 느낌이었다.
“상대가 호신기를 전개한 상태라면 별다른 대미지를 줄 수 없어. 하지만 내가 만든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은 편검기와 많이 다르지.”
그 순간, 안겔라의 검기가 흑색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더 이상 흐느적거리지 않게 되었다.
“절정급의 마력으로 검기를 철저히 제어하고 있으니까.”
휘익!
시커먼 검기가 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약간만 컨트롤이 어긋났어도 내 머리가 박살 났을 텐데,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않았다.
“정 원한다면, 나중에 내 제자가 되었을 때 기본 이론 정도는 가르쳐 주지. 어쨌든 지금 네가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야.”
“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편검기를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
안겔라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작게 미소 지었다.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모양이군. 그런 거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
“좋다. 그러면 가르쳐 주마.”
안겔라의 칼날에서 다시금 편검기가 전개되었다.
“말해 두지만, 나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 직접 몸으로 연습하면서 터득하는 게 더 빠르다고 생각하거든.”
“리스틸 교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우리 클래스의 특징이지.”
살상력이 떨어지는 편검기를 전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겔라에게서는 리스틸 이상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내 봐라, 에르나스.”
안겔라의 편검기가 허공에서 춤추며 나를 덮쳤다.
* * *
대체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녹초가 된 채 훈련장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숨을 헐떡이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안겔라가 미소 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재미있더군. 내일도 내가 지도해 주마.”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안겔라는 나를 내버려 둔 채 훈련장을 떠났다.
나는 홀로 남겨진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안겔라의 편검기는 충분히 위협적이었어.’
편검기는 살상력이 약하다.
하지만 안겔라의 마력과 기량이라면 편검기라도 충분히 사람의 목숨을 뺏을 수 있었다.
‘공중에서 꿈틀거리면서 불규칙한 궤도로 움직이니, 제대로 대응하기도 어렵고.’
편검기를 펼치는 안겔라 상대로 몇 시간이나 버티는 건…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욜스처럼 나를 배려해 주지도 않았고, 오히려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계속해서 나를 몰아세웠다.
‘그래도…….’
나는 지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검을 잡은 채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
아무도 없는 훈련장.
조용한 공간에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안겔라가 보여 줬던 편검기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새겼다.
하지만, 안겔라의 편검기를 재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경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거다.’
칼날을 향해 마력을 불어 넣었다.
확신을 갖고, 자신 있게.
스파크를 발생시키며 길게 뻗어 나간 푸른색 검기가 허공을 수놓았다.
* * *
아카데미 수련생 기숙사.
그 구석에 여러 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다.
중심에 있는 건 백색 5반 출신의 벨리드 앤드류스… 얼마 전에 에르나스 파벌에 들어가려 했던 남학생이었다.
“다들 마음을 정한 모양이군.”
벨리드가 말하자, 학생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대부분 어느 파벌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겉돌던 학생들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학생들은 새로운 파벌에 들어가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좋다. 우리들은 전부 2차 시험을 통과한 그래듀에이트… 전력은 충분하다.”
학생들의 얼굴을 살피며, 벨리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함께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친다. 그리고 그 공적으로 베리스리제 파벌에서 주도권을 잡는 거다.”
비현실적인 야망에 휩싸인 채, 여러 학생이 전의를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