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일인지하 만인지상 (2)
본래 리히테나워 대공이란 ‘여자 황제의 남편’에게 주어졌던 작위다.
여러 가지 폐해 때문에 폐지되었으나, 현재 황실에서는 이 작위를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머지않아 차기 황제로 즉위할 황녀를 보좌해 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황녀는 아직 어리고, 검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이건 검술을 숭상하는 이 제국에서 크나큰 결점으로, 황권이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사유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검술을 지닌 인물을 황녀의 약혼자로 지명하여, 리히테나워 대공으로서 황녀를 보좌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황녀 본인이 검을 휘두르지 못해도, 일심동체인 남편 될 사람이 검을 휘두르면 된다는 논리였다.
황실과 관련된 특급 기밀이기 때문에, 그동안 6대 검술명가와 궁내부 정도만 알고 있던 사항이지만… 아카데미에 구금된 헨리 랭커스터에 의해 유출되고 말았다.
소문은 아카데미 교직원들을 통해 빠르게 퍼졌고, 급기야 아카데미 바깥으로도 흘러 나가게 되었다.
아카데미를 총괄하는 알드바우트 총장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지난번에 궁내부에서 아카데미를 방문한 이유가 이거였군. 후보자들을 점검하려 했던 건가.”
알드바우트의 말을 듣고, 곁에 있던 발렌티아노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 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이런 계획이 있었군요. 미리 공유를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어쩔 수 없지. 황제 폐하의 건강하고도 관련이 있는 문제니, 보안을 지켜야 했을 거야.”
“그래도 헨리 랭커스터가 그렇게 붙잡혔으니, 언젠가 세상에 알려질 문제였습니다. 랭커스터 가문이 왜 그렇게 폭주했느냐를 파헤치다 보면 다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동안 랭커스터 가문의 행보는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
하지만 리히테나워 대공 자리가 걸려 있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헨리 랭커스터는 정말 어리석었습니다. 그런 짓을 한다고 리히테나워 대공 자리가 레스터 랭커스터에게 돌아갈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던 걸지도 모르지.”
“총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그렇게 몰아세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군.”
“……!”
발렌티아노가 눈을 크게 떴다.
“에르나스가 랭커스터 가문의 폭주를 조장했단 말입니까?”
“레스터 랭커스터의 퇴학, 징벌동에 나타난 암살자, 마교와의 결탁… 전부 다 에르나스와 관계있지 않나? 그동안 에르나스의 언동은 계속해서 랭커스터 가문을 몰아세웠지.”
“그렇긴 합니다만… 에르나스가 그 모든 상황을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비현실적이긴 하지.”
알드바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마 전에는 테오도라 발트펠트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네. 그녀도 에르나스의 목숨을 노렸다는 의혹이 있지 않았나?”
“그건…….”
“에르나스는 자신을 노리는 자들을 차례차례 파멸시키고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알드바우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우리는… 엄청난 괴물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 * *
어두운 밤.
2층 침대의 아래층에 누워 있던 세리느는, 위쪽 침대의 룸메이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베리스리제는 알고 있었던 건가요?”
“…….”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베리스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얼마 전에야 알았어.”
“그랬군요.”
“루퍼스 이그니아스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르면,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 황녀 전하를 보필하게 된다.
이 정보는 세리느한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에르나스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던 걸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베리스리제, 만약 당신이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르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당신이 황녀 전하하고 약혼할 수는 없잖아요?”
베리스리제는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그러니 황녀의 반려가 될 수는 없다.
“만약 내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야 할 경우, 의자매(義姉妹)를 맺게 한다고 하더라고.”
“의자매…….”
“친자매처럼 침식(寢食)을 같이하게 될 거야. 관점에 따라서는 약혼자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만드는 거지.”
가족처럼 함께 생활하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한다면, 약혼자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제국 신민들에게 황녀 전하와 리히테나워 대공이 일심동체라고 믿게 만드는 거야. 남녀 사이라면 혼인 관계로 해야 하겠지만, 여자끼리라면 다른 형태를 취해야지.”
“그렇군요…….”
“어째서 남 일처럼 반응하는 거지? 너한테도 해당되는 얘기인데.”
“네?”
베리스리제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는 딱히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들한테만 열려 있는 게 아니야. 만약 네가 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닌 거라 인정받으면, 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겠지.”
“그럴 수는…….”
“너희 바스티안 가문은 6대 검술명가가 아니지만, 그래도 그다음 서열인 후작 가문이고… 문제 없을 거야.”
황실에서 원하는 건, 아카데미라는 국가 기관에서 최고의 재능을 가졌다고 인정한 인물을 황녀의 파트너로 삼는 것이다.
그러니 세리느가 그런 인물로 인정받는다면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건 문제가 없다.
“솔직히… 잘 와닿지 않네요.”
“그렇겠지. 너는 지금 에르나스를 따르고 있으니까.”
“…….”
“하지만, 나는 너하고는 달라.”
베리스리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반드시 아카데미의 정점에 올라,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고 말겠어.”
“…….”
객관적으로 볼 때, 베리스리제가 에르나스나 하인리히한테 뒤처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고, 베리스리제에게도 역전의 기회는 있다.
랭커스터 가문처럼… 란즈슈타인 가문이나 아그리파 가문이 몰락할 수도 있고 말이다.
“어쨌든…….”
세리느는 복잡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에르나스가 저와의 약혼을 파기해 준 건… 결국 이것 때문이었군요.”
“…….”
줄곧 의문이었다.
그동안 계속 자신에게 집착하던 에르나스가 왜 선뜻 약혼을 파기해 줬는지.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황녀와 약혼할 수 있는 몸이 되기 위해, 세리느와의 약혼을 취소한 것이다.
“뭐야? 에르나스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그렇죠. 하지만…….”
세리느는 말을 잇기 어려웠다.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 건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잠깐, 세리느, 확실하게 해 줄래?”
“네?”
“만약 에르나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지 못하면, 그때는 에르나스하고 다시 약혼할 거야?”
어째서인지, 베리스리제는 상당히 심각한 분위기였다.
“한번 취소한 약혼을 되돌리는 건… 좀 이상한 일이죠.”
“그렇지? 다시 약혼 안 할 거지? 에르나스도 같은 생각인 거고?”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에르나스도 비슷한 생각 아닐까요.”
“그래, 알겠어.”
이번에는 들뜬 목소리가 되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역시 내가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를 차지해야겠어.”
“…….”
갑자기 의욕을 불태우는 베리스리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세리느는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 * *
“리히테나워 대공 얘기가 퍼지면서 아카데미 전체가 소란스러워졌군.”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마력을 순환시키고 있자, 아래쪽에서 하인리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온갖 녀석이 나한테 말을 걸어와서 번거롭다. 네가 헨리 랭커스터를 아카데미로 끌고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이제는 별걸 다 내 책임으로 몰아세우는군.”
“내 말이 틀렸나?”
사실 틀린 말이 아니긴 하다.
하지만 그걸 순순히 인정해 줄 필요도 없었다.
“랭커스터 가문이 몰락한 건 너희 아그리파 가문에도 호재 아닌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
“내가 할 일은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르는 것뿐이니까.”
“…….”
소설에서 하인리히는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아그리파 가문의 힘을 빌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힘으로 정점에 오르겠다는 생각뿐이다.
이게 하인리히의 가장 큰 약점으로, 소설에서는 에르나스한테 이 부분을 공략당했다.
‘심지어 세력을 만드는 것에도 큰 관심이 없지. 지난번에는 나한테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말했지만, 정작 측근을 자처하는 카밀로한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청색 2반 출신의 카밀로가 하인리히의 친위 세력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하인리히가 시큰둥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버지인 칼레온 교수를 등에 업고 있는 루퍼스 쪽이 세력으로서는 더 강하다.
베리스리제도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추종자들을 모으고 있고… 고르트도 어떻게든 재기를 노리면서 측근들을 규합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내가 녀석들을 흉내 낼 필요는 없어.’
지금은 소수 정예로 충분하다.
진심으로 나한테 충성을 바칠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누구한테 붙어야 가장 이득일지 눈치 보면서 기웃대는 녀석들은 필요 없다.
그런 놈들을 줄줄 데리고 다니면서 대장 놀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수료증을 받아서 3차 시험 응시 자격을 얻는 게 중요하고… 세리느와 클로에, 슈미츠, 비올라 정도면 충분하니까.’
랭커스터 가문을 괴멸한 뒤에도, 나는 페르디난드 클래스에서 외부 의뢰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제 곧 페르디난드 클래스에서도 수료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3차 시험 응시에 필요한 수료증은 최소 4개…….’
이미 욜스 클래스에서 수료증을 받았으니, 페르디난드 클래스에서도 수료증을 받으면 2개가 된다.
‘그리고 이 다음에는……..’
세 번째 수료증을 어디서 받을지, 나는 이미 정해 놓고 있었다.
* * *
“가져가라.”
수련이 끝나는 날.
페르디난드 교수는 우리한테 수료증을 던져 줬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퉁명스러운 태도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페르디난드는 우리들에게 딱히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외부 활동을 최대한 지원해 줬다.
덕분에 충분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라.”
페르디난드가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황색의 물약이 다섯 병씩 들어 있었다.
“황색 엘릭시르……!”
슈미츠가 경탄했다.
지금까지 적색과 청색 엘릭시르는 복용해 봤지만, 그다음 단계인 황색 엘릭시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교수님, 어째서 황색 엘릭시르를…….”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의 활약상을 객관적으로 상층부에 전달했을 뿐이다.”
페르디난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희들의 실적을 생각할 때 황색 엘릭시르를 수여하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러니 토 달지 말고 가져가기나 해라.”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세리느가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하자, 페르디난드가 고개를 휙 돌렸다.
“됐으니까 이만 가 봐라. 나는 바쁘니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하지만 교수실에서 나가려 할 때, 페르디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르나스, 지난번에 네가 전달해 준 자료 덕분에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
“…….”
고대의 영약인 ‘암리타’ 얘기였다.
지난번에 내가 마교도들한테서 입수한 걸로 위장해서 자료를 전달해 줬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나중에 시제품이 나오면 네가 테스트를 도와줬으면 한다.”
“네, 알겠습니다.”
암리타가 완성되면 마력을 크게 늘릴 수 있을 것이다.
페르디난드의 연구가 잘 진행되길 바라며, 나는 페르디난드 클래스를 뒤로했다.
“황색 엘릭시르를 받게 되다니, 운이 좋군요.”
“슈미츠, 그래도 함부로 복용하면 안 돼요. 청색 엘릭시르보다 복용하기 힘드니까 주의해야 해요.”
슈미츠와 세리느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번에 받은 황색 엘릭시르를 확인했다.
나는 이걸 그냥 그대로 복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걸로 랭커스터 가문에서 얻은 흑영초를 복용할 수 있겠군.’
지난번에 나는 랭커스터 가문의 창고에서 흑색 엘릭시르의 원료인 흑영초를 입수했다.
하지만 그동안 계속 복용하지 않고 있었는데, 황색 엘릭시르에 녹여서 복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처럼 청색 엘릭시르에 녹이는 것보다 더 많은 마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더 가까워지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숙사로 복귀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을 때.
한 남학생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나한테로 달려들었다.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했다가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한다는 소리를 듣고 물러섰던 벨리드 앤드류스였다.
“에, 에르나스 님!”
그는 내 앞을 가로막으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시 제 얘기를 들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에르나스 님이야말로…….”
“비켜!”
슈미츠가 짜증을 내면서 벨리드를 밀쳤다.
허를 찔린 벨리드는 뒷걸음치다가 물웅덩이에 발이 빠졌다.
“쯧, 염치없는 놈.”
“잘했어요, 슈미츠 님.”
클로에가 칭찬을 해 줬다.
말만 안 했지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에르나스, 다음에는 어느 클래스로 갈 건가요?”
“안겔라 클래스로 갈 거야.”
“안겔라 교수님의 클래스에? ‘마녀(魔女)’라 불리며 두려움받는 교수님 아닌가요?”
“사실 지난번에 제안도 받았거든. 다음에는 안겔라 클래스에 오라고.”
랭커스터 가문을 괴멸한 날, 안겔라 본인한테서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내가 안겔라 클래스를 택하는 건 이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곳에 슈라이에르 가문의 끄나풀이 있으니까.’
6대 검술명가 중 하나, 슈라이에르 가문.
그 딸인 베리스리제를 지원하기 위해 심어 놓은 인물이 안겔라 클래스에 소속되어 있다.
리히테나워 대공을 둘러싼 싸움이 본격화되려 하고 있으니, 슈라이에르 가문에서도 슬슬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선제공격을 해야지.’
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인다.
모든 주도권은 내가 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