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일인지하 만인지상 (1)
“에, 에르나스 님.”
백색 5반 출신의 벨리드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는 에르나스 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위세를 부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너는 앤드류스 가문의 미래를 짊어지고 아카데미에 온 것 아닌가?”
이 녀석은 자기소개를 할 때 어떤 가문 출신인지부터 말하던 녀석이다.
“누구를 추종해야 앤드류스 가문의 미래가 더 밝아질까… 그런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을 텐데.”
“그건…….”
“솔직히 인정해라. 너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과 인맥을 만드는 것이 앤드류스 가문의 미래에 더 좋은 일이 될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이렇게 나를 마중 나온 거다.”
“…….”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
벨리드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담담히 말했다.
“딱히 너희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네?”
“이 제국은 명문가들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나라다. 어느 명문가에 붙어야 자신들의 가문에 유리할지,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지.”
당혹스러워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천천히 말했다.
“수백 년 넘게 다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니 너희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다.”
“에르나스 님…….”
“하지만, 내가 그걸 존중해 줄 필요는 없지.”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나는 그런 구조를 타파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네?”
여러 학생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다들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나?”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제국은 검술을 중요시한다. 검술 실력이 뛰어난 자만이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지. 철저한 실력주의 사회라 할 수 있다.”
“네, 당연히…….”
“하지만 실제로 따져 보면 그렇지 않다.”
“네?”
“결국 특정 가문에만 권력이 집중되고 있지. 6대 검술명가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명문가만이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되어 있으니까.”
내 발언에 다들 눈을 크게 떴다.
심지어 세리느와 클로에 등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욜스 칼레시우스 교수를 봐라. 그는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 나라를 이끄는 역할을 맡고 있나?”
“…….”
“서부에서 몬스터들을 토벌하다가, 지금은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물론 인재를 기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나라를 이끌어 가는 역할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욜스의 실력이 헨리나 칼레온보다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욜스에게 헨리나 칼레온처럼 수백 명의 그래듀에이트를 동원할 힘이 있는 건 아니다.
기껏해야 클로드와 마테우스라는 조교수 두 명을 데리고 있을 뿐이다.
“실력만 있으면 아카데미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나, 애초에 명문가의 자식일수록 실력을 향상시키기 쉬운 구조다. 결국 명문가의 자식들끼리 경쟁을 하게 되며, 평범한 집안 출신들은 그들을 추종할 뿐이지.”
“…….”
“가끔 가다가 명문가의 자식들을 꺾고 정점에 오르겠다고 야망을 불태우는 녀석들도 있지만, 결국 벽에 부딪히게 된다.”
지금 나를 따르는 슈미츠도 여기에 해당된다.
다른 반에도 슈미츠 같은 사례는 많을 것이다.
“이건 제대로 된 실력주의라 할 수 없으며, 제국을 건국한 철혈검제 폐하의 뜻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에, 에르나스 님.”
벨리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에르나스 님은, 뭘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내 목표를 확실히 말해 주지.”
나는 주위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레스터의 마지막 말을 들었을 때부터 계속 생각해 온 것을 입에 담았다.
“6대 검술명가 체제를 해체하는 것, 그것이 내 목표다.”
내 말을 듣고, 다들 숨을 삼켰다.
세리느와 클로에 등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명문가들이 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구조를 타파하여,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겠다.”
“에, 에르나스 님!”
벨리드가 다급히 소리쳤다.
“6대 검술명가는… 철혈검제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 나라의 전통입니다. 그 구조를 바꾸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맞다.”
“이, 이것 참, 어이가 없군요.”
그는 주위 학생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에르나스 님이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른다면 란즈슈타인 가문의 위상이 매우 높아질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로 큰 권한을 갖게 될 리는 없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너무 큰 꿈을 갖고 계시는군요.”
“다른 검술명가들이 가만있겠습니까?”
다른 학생들도 거들었다.
“다들 허황된 얘기라 생각하는 것 같군.”
“그야… 그렇지요.”
벨리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에르나스 님이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를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허황된 말씀을 하시면…….”
“신뢰할 수 없는 모양이군.”
“네,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른다고 해서 그런 권력이 주어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너무 현실감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신다면, 솔직히 저는 에르나스 님을 따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네 판단을 존중하지, 벨리드.”
나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기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세리느와 클로에, 슈미츠, 비올라는 내 뒤를 따라왔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다들 나를 따르는 걸 포기한 것이다.
“에르나스, 방금 그 얘기…….”
세리느가 내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한다는 거, 진심이에요?”
“이미 랭커스터 가문은 괴멸됐어. 6분의 1은 진행된 셈이지.”
“……!”
세리느는 물론이고 다른 녀석들도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한 얘기인데… 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거죠?”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부터다.
소설의 주인공 아칸델은 6대 검술명가의 정치 싸움에 휘말리면서 이 제국의 모순을 깨닫는다.
그리고… 6대 검술명가의 해체를 목표로 삼게 된다.
‘소설 후반부에서야 도출되는 최종 결론이지.’
나는 주인공이 도달하는 최종 결론을 상당히 이른 시점에 드러냈다.
내가 아칸델이 아니라 에르나스인 이상, 내 스탠스를 확실히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도 이게 가장 옳은 길이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순히 강해지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6대 검술명가와의 싸움은 단순히 그 수장들을 쓰러뜨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리히테나워 대공으로서 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꿔 나갈지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나는 중간 단계에서 몰락할 것이다.
“세리느, 만약 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바스티안 가문도 예전 같은 위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야… 그렇겠죠.”
바스티안 가문은 6대 검술명가 바로 아래에 있는 명문 후작가다.
명문가 중심의 체계를 파괴하면 바스티안 가문의 위상도 하락할 수밖에 없다.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내 곁을 떠나도 좋아.”
“…….”
세리느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계속 당신 곁에 있겠어요.”
“어째서지?”
“저도 에르나스의 주장에 공감하니까요.”
“…고맙군.”
사실 나는 이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아칸델은 세리느와의 오랜 의논 끝에 저런 결론을 내린 거였으니까.
“너희는 어떻지?”
“저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서.”
슈미츠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뭐지?”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에르나스 님을 계속 따를 예정입니다.”
슈미츠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 저는… 사실 아카데미만 무사히 졸업하면 되는 거여서요. 저희 가문은 북부 변방에서 몬스터 사냥만 하면서 사는 가문이고, 권력 같은 건 딱히…….”
슈미츠 옆에서 비올라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는 단순히 ‘에르나스 님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졸업은 문제없겠지.’ 정도의 생각뿐이어서 말이죠. 솔직히 별생각 없네요.”
“그래, 너는 그거면 됐어.”
평소대로 태평한 비올라의 발언에 웃고 있자, 클로에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생각을 갖고 계셨다면, 좀 더 일찍 말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클로에…….”
사실 클로에는 아까 그 녀석들과 비슷한 입장이다.
내가 승승장구할 거라 기대하고 내 곁에 붙은 거니까.
“그래도, 나쁘지 않네요.”
“뭐?”
“에르나스 님의 말씀대로라면,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하는 대신 본인이 모든 권력을 손에 쥐겠다는 말씀이잖아요?”
“…….”
클로에의 말을 듣고, 세리느가 깜짝 놀랐다.
“크, 클로에, 에르나스는 딱히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
“명문가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고 진정한 실력주의 사회를 만들려면,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 권력이 필요해요. 당연히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한 에르나스 님이 그 권력을 손에 쥐셔야죠.”
“그, 그렇게 되나요?”
놀랍게도… 클로에는 내가 일부러 생략한 부분을 정확히 지적했다.
이 이상을 실현하려면 정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막강한 권력을 지녀야 한다.
“에르나스 님이 권력을 원활히 휘두를 수 있으시려면 보좌역이 필요하겠죠. 저는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걸 목표로 해야겠네요.”
“클로에…….”
“나중에 시간이 되시면 에르나스 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저도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을 테니까.”
클로에는 의욕적이었다.
어쩌면 클로에는 내가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가 되는 걸 기대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나도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어째서냐고?
소설을 끝까지 못 쓰고 이쪽 세계로 끌려온 거라, 모든 싸움이 끝난 뒤 제국이 어떻게 되는지는 쓰지 못했거든…….
그러니까 결국 그때 가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제국의 독재자가 될지 안 될지도 말이다.
‘구체적인 부분은 클로에나 세리느 같은 사람들하고 의논해 가면서 천천히 만들어 가야지.’
모든 싸움이 끝난 이후에 어떻게 될지 지금부터 고민할 필요는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서 살아남는 거니까.
“그런데 에르나스 님, 이것만큼은 되도록 빨리 알려 주셨으면 하는데요.”
“뭐지?”
“그런 권력을 어떻게 손에 넣을지도 생각해 두셨죠?”
클로에의 말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아까 그 사람들 말대로, 에르나스 님이 그 정도 권력을 손에 넣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그건 그렇죠.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른다고 해도 말이에요.”
옆에서 세리느도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나스, 정말로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솔직히 저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은 이제 곧 너희들도 알게 될 거야.”
“네?”
“에르나스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다들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지금 굳이 내 입으로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만간 정보가 풀릴 테니 기다려 봐.”
“……?”
내 예상대로라면… 며칠 걸리지 않을 것이다.
* * *
‘젠장, 이렇게 된 이상 하인리히 아그리파에게 붙는 수밖에 없겠군.’
벨리드 앤드류스는 발렌티아노 클래스로 향하며 생각에 잠겼다.
에르나스의 허황된 현실 인식에 실망한 이후, 벨리드는 누구에게 붙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에르나스가 그렇게 허황된 야망에 사로잡혀 있을 줄은 몰랐단 말이지.’
에르나스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를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훗날 꼴사납게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에르나스에게 줄을 선 가문들도 덩달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한다? 진짜로 허황된 소리지. 대체 누가 에르나스에게 그런 권력을 주겠냐고.’
현실감각이 없는 놈을 주군으로 섬길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벨리드는 정규 수업을 듣기 위해 발렌티아노 클래스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조교수와 조교들이 모여서 웅성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발을 멈췄다.
“어떻게 그런…….”
“예상 못 했던 사태가…….”
“칼레온 교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 같던데…….”
항상 엄격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던 발렌티아노 클래스답지 않게 너무 어수선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조교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친분이 있는 조교에게 다가가서 질문을 해 봤다.
“헨리 랭커스터가 지금 아카데미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것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쪽에서 새어 나온 정보가 하나 있는데, 그것 때문에 다들 뒤집어진 거야.”
“대체 무슨 정보길래…….”
“리히테나워 대공이라고 들어 봤나?”
“리히테나워 대공이요?”
대공?
지금 가장 높은 작위는 6대 검술명가의 ‘공작’ 아니었나?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에게 리히테나워 대공의 작위를 줄 예정이라는군.”
“네……?”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에게, 리히테나워 대공의 작위를 준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직 연소(年少)하신 황녀 전하를 보필하는 역할을 맡기기로 황실에서 결정했다고 한다.”
“…….”
“리히테나워 ‘대공’이니까, 6대 검술명가의 공작님들보다 지위가 높지. 게다가 잘하면 차기 황제 폐하의 남편이 될 수도 있으니…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는 거야.”
조교의 말을 들으면서, 벨리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