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랭커스터 멸망의 날 (2)
랭커스터 가문은 서부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검술명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본거지도 으리으리했다.
“공작님이 허가하셨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우리를 들여보내 줬다.
칼레온이 앞장섰고, 그 뒤를 욜스와 안겔라가 따랐다.
나는 맨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
넓은 정원… 아니, 광장이라 해야 할까.
서부를 대표하는 검술명가답게, 앞마당부터 스케일이 컸다.
문제는 그 앞마당에 수백 명의 검사가 도열해 있었다는 점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전원이 그래듀에이트다.
“흥…….”
그들의 모습을 보고도 칼레온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헨리 랭커스터! 이게 사람을 맞이하는 예의인가! 랭커스터 가문의 수준도 땅에 떨어졌군!”
칼레온의 일갈.
그러자 수백 명의 검사들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미안하게 됐소, 칼레온 이그니아스.”
단정한 외모를 지닌 중년 남성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랭커스터 가문의 가주, 헨리 랭커스터였다.
“오늘은 검사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오. 양해해 줬으면 좋겠소.”
“그렇다면 여기 있는 검사들은 우리하고는 전혀 상관없다는 얘기인가?”
“그렇소. 정원을 꾸미는 조각상 같은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시오.”
“흥, 웃기는군.”
뻔뻔한 태도로 말하는 헨리 앞에서, 칼레온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우리들을 위협하기 위해 전력을 소집한 거겠지. 보아하니 랭커스터 가문이 동원할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를 다 긁어모은 모양이군.”
“…….”
주위에는 상당히 나이가 많은 검사들도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엘릭시르를 복용하여 마나 하트를 만든 엘리트들이 아니라, 일반 병사로서 수십 년 동안 검을 휘두르다가 검기를 깨우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까지 다 긁어모아, 랭커스터 가문은 수백 명의 그래듀에이트 군단을 편성했다.
아카데미에서 찾아온 조사단을 위협하기 위해.
“칼레온, 위협은 그쪽에서 하고 있는 것 아니요?
“뭐라고?”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 세 명이 동시에 찾아오다니,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헨리가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 쪽을 쏘아봤다.
“발렌티아노 교수라든가, 그런 분이 왔다면 나도 반갑게 맞아들였을 것이오. 그런데 ‘도룡검’ 욜스 칼레시우스, ‘흑쇄검’ 안겔라 베르틴스키… 정말 피비린내 나는 사람들만 데려왔군.”
“…….”
“대체 어쩌자고 저런 사람들을 데리고 온 거요? 내 목을 치는 게 목적이오?”
헨리의 발언에, 침묵을 지키던 욜스가 입을 열었다.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다짜고짜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를 세 명이나 보내는 것이 더 지나친 행위 같소만.”
헨리는 거침없이 말했다.
“애초에 나는 이해가 전혀 되지 않소. 아카데미는 대체 언제부터 마교 놈들의 말을 그렇게 신용하게 된 거요?”
“…….”
“랭커스터 가문이 마교 놈들에게 아카데미 학생을 제거해 달라고 의뢰했다? 그런 말을 믿고 이렇게 찾아온 거요? 절정급을 세 명씩이나 투입하면서?”
그렇게 말하며 헨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로 어이가 없군. 아카데미가 이렇게 멍청한 집단일 줄은 몰랐소.”
“헨리 랭커스터, 그러면 전부 사실무근이라는 얘기인가?”
“그렇소. 내가 보기에…….”
헨리의 시선이 맨 뒤쪽에 있던 나에게 향했다.
“저 녀석의 치졸한 음모가 아닐까 하는군.”
“에르나스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소?”
헨리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마교의 간부하고 거래를 한 거겠지.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거짓 증언을 해 달라고 말이오.”
“랭커스터 가문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에르나스가 마교 간부를 매수했단 말인가?”
“그렇소, 칼레온.”
“에르나스가 왜 그런 짓을 하지?”
“다른 이유가 있겠소? 눈에 거슬리는 랭커스터 가문을 이번 기회에 짓밟아 주려는 생각이었겠지.”
헨리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저 녀석은 우리 가문을 지속적으로 괴롭혀 왔소. 내 아들인 레스터를 아카데미에서 쫓아낸 것도 저 녀석이었지. 저 녀석 때문에 우리 가문이 아카데미에 암살자를 보냈다고 오해받은 적도 있었소.”
“…….”
“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군.”
헨리의 말을 듣고, 칼레온이 입을 다문 채 나를 쳐다봤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슬슬 내가 발언할 차례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맨 앞으로 나가자, 주위에 있던 그래듀에이트들이 경계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헨리 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무슨 소리지?”
“레스터 랭커스터가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한 건, 본인의 잘못입니다.”
헨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히 말했다.
“처음부터 레스터는 1차 시험에서 저를 공격할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레스터에게 대항해 검을 휘둘렀을 뿐입니다.”
“웃기는 소리! 네가 먼저 기습을 했다고 들었다!”
“레스터가 측근과 함께 저를 추격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레스터가 진검을 갖고 있었던 건, 명백히 레스터 본인의 잘못입니다.”
“그걸 아카데미에 고발한 건 너다!”
“그러면 레스터의 교칙 위반을 숨겨 줬어야 한다는 소리입니까? 제국을 대표하는 6대 검술명가의 일원으로서, 그렇게 명예롭지 못한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헨리가 반박하려 했지만, 나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지금 말씀하시는 걸 보면, 랭커스터 가문에서는 레스터의 퇴학 때문에 불만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랭커스터 가문에 원한이 있는 게 아니라, 랭커스터 가문이 저한테 원한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게 뭔…….”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그 원한 때문에 계속 저를 죽이려 했다고 말입니다.”
“……!”
직설적인 발언에 헨리가 눈을 치켜떴다.
칼레온과 욜스도 내가 이렇게까지 말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흠칫 놀랐다.
안겔라만이 재미있어졌다는 듯이 피식 웃고 있을 뿐이었다.
“흑천마교 필체스터 지부의 카스타리온이 본인 입으로 랭커스터 가문을 언급했습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제거해 달라고 의뢰한 사람이 있어서 뒤를 밟아 보니 랭커스터 가문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모함이란 말이다! 네가 그놈을 매수한 거겠지!”
“대체 어떻게 매수한단 말입니까? 무슨 방법으로?”
“그야… 목숨을 건질 수 있게 해 준다든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 녀석은 사람을 너무 많이 해쳤기 때문에 즉각 참수형을 당할 운명입니다.”
“…….”
“저는 고작 학생입니다. 그놈의 목숨을 구해 줄 권한 따위는 없단 말입니다.”
사실 내가 카스타리온을 설득할 때 목숨을 건지게 해 주겠다고 꼬드기긴 했다.
하지만 나한테 그런 권한은 없기 때문에, 그냥 공수표에 불과했다.
“복잡하게 생각할수록 진실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랭커스터 가문에서 저를 죽이기 위해 마교도를 고용하려 했다, 이게 단순명료한 진실입니다.”
“물적 증거도 없는데 진실은 무슨……!”
“이런 일에 물적 증거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계약서 같은 게 남아 있을 리도 없고, 결국 증언의 신뢰성을 따져 봐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말한 뒤, 나는 헨리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떠들어 댔다.
“몇 달 전, 제가 징벌동에서 습격을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은 더더욱 증언의 신뢰성이…….”
“그때 라지엘 브로시안이 저한테 말하더군요. 저를 죽인 뒤 다른 검술명가의 후계자들도 해치울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 지시를 내린 건 헨리 님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라지엘한테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
“이것 참 이상하군요.”
“뭐가 이상하단 말이냐?!”
잔뜩 흥분한 헨리를 쳐다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암살자의 이름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저를 습격한 암살자가 라지엘 브로시안이라는 건 지금 여기서 처음 밝히는 건데 말입니다.”
“……!”
헨리의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내, 내 말을 이상하게 해석하는군. 네가 라지엘 브로시안이라는 사람을 언급하길래, 그런 사람한테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고 반박했을 뿐이다. 나는…….”
“그런 사람 따위는 모른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모양인데, 브로시안 가문은 대대로 랭커스터 가문을 섬겨 온 집안입니다. 라지엘 브로시안의 이름을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요.”
“그건…….”
“변명해 보십시오. 변명하면 변명할수록 말이 꼬이게 될 것 같지만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쏘아붙이자, 옆에서 칼레온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에르나스, 대체 무슨 소리지? 라지엘 브로시안? 그게 그때 암살자의 이름이었다고?”
“네, 레스터 랭커스터와 함께 퇴학당한 유세르 브로시안의 아버지입니다.”
“어째서 그 얘기를 하지 않았지? 그것만 확인되었다면 지난번에 랭커스터 가문을 확실하게…….”
“저는 랭커스터 가문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시험?”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는지 말입니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어차피 나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속내를 숨긴 채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는 것에 특화된 얼굴을 지녔다.
“칼레온 교수님, 저는 다른 검술명가들과 양호한 관계를 맺고 싶었습니다.”
“양호한 관계……?”
“랭커스터 가문이든, 이그니아스 가문이든…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다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이그니아스 가문이 언급되자 칼레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랭커스터 가문에 기회를 주었던 겁니다. 잘못을 반성하고 고개를 숙여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에르나스…….”
“하지만, 제가 잘못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어 헨리를 노려봤다.
“헨리 랭커스터, 당신은 검술명가를 이끌 자격이 없습니다.”
“뭐, 뭣…….”
“당신이 저에 대한 개인적 원한만으로 이런 일을 벌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뒤틀린 권력욕이 더 크게 작용했겠죠.”
그렇게 쏘아붙이자, 욜스가 질문을 던졌다.
“에르나스, 권력욕이라니?”
“이번에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른 사람에게는, 지금까지보다 큰 권한이 주어질 예정입니다. 자세한 것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가 걸려 있다는 얘기는 아직 공개해서는 안 된다.
“헨리 랭커스터, 당신은 판을 뒤집어엎으려고 한 것 아닙니까?”
“뒤, 뒤집어엎다니?”
“레스터 랭커스터는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했습니다. 경쟁에서 완전히 탈락한 것이죠. 이 상황에서 랭커스터 가문이 기사회생할 방법은, 나머지 경쟁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 아닙니까?”
“……!”
헨리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왜……!”
“마교와 손을 잡은 것만 봐도, 당신은 미친 게 맞습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자꾸 그런 식으로 나를 모욕한다면…….”
바로 그때,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헨리 랭커스터! 아무래도 에르나스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카, 칼레온!”
칼레온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로 헨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에르나스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어!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의혹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다 모함이란 말이오!”
“이게 다 모함이라는 걸 증명하려면 하나하나 구차한 변명을 덧붙여야 하지!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아까 에르나스가 말한 대로, 변명하면 변명할수록 말이 꼬이게 될 테니까!”
“큭……!”
나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헨리를 몰아세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제대로 반박할 수 없다.
섣불리 반박했다간 자신의 죄를 실토하는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헨리 랭커스터! 본인의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받도록 해라!”
그렇게 소리치며 칼레온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직후, 칼날이 불꽃에 휩싸였다.
이그니아스 가문을 대표하는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인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의 검기였다.
“만약 거부한다면, 강제로 압송할 것이다.”
“……!”
칼레온이 검기를 전개하자, 주위의 그래듀에이트들도 다급히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바로 검을 뽑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가주인 헨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칼레온 이그니아스… 예전부터 당신은 불같은 성격이었지. 지금도 그 성격은 변함이 없는 것 같군.”
헨리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 내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이렇게 폭력적인 수단으로 나온다면, 나도 검을 뽑을 수밖에.”
헨리가 허리 양쪽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두 자루의 소검을 동시에 뽑아 든 헨리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황제 폐하께 직접 찾아가 내 결백을 증명하겠다.”
“……!”
주위의 그래듀에이트들이 다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절정급의 검사인 헨리 그리고 수백 명의 그래듀에이트가 우리를 향해 검을 뽑아 든 상황이었다.
“말씀을 잘못하신 것 같군요, 헨리 랭커스터.”
하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마교 총본산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당신이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은 그곳밖에 없을 텐데요?”
“에르나스, 네놈……!”
헨리가 눈을 치켜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 건방진 놈을 죽여 버려라! 다 죽여 버려!”
“네……!”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한 검사들 앞에서, 나는 교수들과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랭커스터 가문을 멸망시킬 날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