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어둠 속을 내달리다 (2)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아카데미의 조교수와 수련생들을 죽이기 위해 투입된 건 ‘혈검장로회’의 암살자들이었다.
혈검장로회는 먼 옛날에 멸망한 서방 왕국의 암살자 조직에서 시작된 단체다.
지금은 대륙 전역에서 청부를 받는 암살자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그들은 아카데미의 조교수와 수련생들을 죽여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누가 의뢰했는지는 불명이다. 혈검장로회의 간부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장에서 움직이는 말단 암살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다.
임무에 실패하여 포로로 잡힐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물론, 혈검장로회의 암살자라면 아무리 고문을 당해도 정보를 토해 내지 않겠지만.’
이번 작전에서 리더를 맡은 라시온은 숲속을 이동하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투입된 암살자들은 모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녀석들이다.
라시온은 물론, 나머지 11명도 포로로 잡힐 것 같으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을 것이다.
‘상대는 그래듀에이트 중급의 조교수 두 명, 그래듀에이트 하급 수준의 실력을 지닌 학생 두 명…….’
일반적으로 암살자들은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그래듀에이트라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암살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기습이고, 기습에 성공하면 자신보다 역량이 뛰어난 검사도 해치울 수 있기 때문이다.
‘놈들은 오크들과의 전투를 마치고 피곤해진 상태, 게다가 지금은 비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는 밤… 기습을 성공시킬 수 있다.’
라시온을 포함해 열두 명이면 충분하다.
놈들이 잠에서 깨어나 반격하더라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라시온은 수풀에 몸을 숨긴 채 계속 이동했다.
‘은신하면서 이동하기에는 좋은 밤이지만, 다른 녀석들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로군.’
평소처럼 신호를 보내 상황을 공유할 수도 없다.
그래도 놈들한테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학생 한 명이 부동자세로 불침번을 서고 있을 뿐… 놈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콰르릉!
또다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둥소리에 섞여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착각일까.
‘혹시 너도 들었나?’
고개를 돌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뒤따라오고 있는 부하에게 눈짓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라시온은 위화감을 느꼈다.
부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로 갔지? 뒤처진 건가?’
주위를 살피며 상황을 살피려 한 순간.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악…….”
비바람 소리에 뒤섞여 잘 들리지 않았지만, 틀림없었다.
누군가가 흘린,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
즉각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수풀 속에서 검기가 번쩍인 것을 확인했다.
‘젠장……!’
비바람을 이용해 기습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비바람을 이용해 기습당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라시온은 다급히 단검을 든 채 뛰쳐나갔다.
* * *
‘이걸로 여덟 명.’
여덟 번째 암살자를 해치우고, 나는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았다.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하니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도 놈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역시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이야.’
암살자들은 이런 능력이 존재한다는 걸 모른다.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은 아카데미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남부 지역의 어떤 검술 유파에서만 비밀리에 배울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산전수전을 겪은 암살자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표적은…….’
다시 한번 마력을 방출하여, 다음 표적을 찾으려 했을 때.
나는 이쪽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마력을 감지했다.
‘눈치챘나!’
파르티잔 심판검술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상대가 사바흐 암살검술로 나온다면, 파르티잔 심판검술로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혈검장로회 녀석들일 테니 사바흐 암살검술을 쓰겠지.’
휘익!
어둠 속에서 단검이 뻗어 나왔다.
사바흐 암살검술 특유의 새카만 검기가 전개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바흐 암살검술은 단검을 사용한 암살용 검술… 변칙적인 스타일의 서부 검술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정석적인 움직임을 중시하는 동부 검술하고는 상성이 안 좋다.
하지만 파르티잔 심판검술만큼은 다르다.
파르티잔 심판검술은 과거의 ‘성기사단’에서 사용되던 제식 검술로, 그들의 토벌 대상 중에는 혈검장로회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암살검술을 사용하는 상대에 대응하는 법도 포함되어 있어.’
파앗!
어둠을 가르고 뻗어 나간 검기가 상대방의 단검을 튕겨 냈다.
어둠 속에서 불규칙한 궤도로 파고든 단검이 막히자 상대방이 흠칫 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보다는 훨씬 기량이 뛰어나다.’
검기와 검기가 부딪친 순간의 감촉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짧은 단검을 사용하고 있어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클로드나 마테우스 수준의 검기였다.
‘이 녀석은… 그래듀에이트 중급이다.’
그렇다면 이 녀석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
혈검장로회의 라시온일 것이다.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 얼굴은 알 수 없지만, 체형이나 전투 스타일 등이 내가 소설을 쓰면서 설정했던 것과 일치한다.
“……!”
양손에 단검을 든 라시온이 다시금 공격해 들어왔다.
내가 소설에서 묘사한 라시온이라면, 여기서는 왼쪽에서 두 번, 우측에서 세 번 공격해 들어오는 연속기를 사용할 것이다.
‘그래, 역시 그렇군.’
파팟, 파파팟!
날카로운 5연격을 파르티잔 심판검술로 완벽히 막아 냈다.
라시온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심 동요하고 있다는 걸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소설에 이 녀석과의 전투를 자세히 묘사해서 다행이야.’
나는 곧바로 반격을 펼쳤다.
라시온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파르티잔 심판검술의 공격 기술을 펼쳤다.
“음……!”
하지만, 내 공격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라시온은 빠르게 움직여 내 공격을 완벽히 피해 낸 뒤,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방금 전에 공격이 막혔던 것을 의식했는지, 불규칙한 템포의 공격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그래도 역시 만만한 적은 아닌 건가.’
나는 혀를 찼다.
상대는 그래듀에이트 중급이다.
게다가 나를 죽이기 위해 진지하게 덤벼드는 암살자다.
나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마테우스 등하고는 다른 것이다.
‘기습으로 해치웠어야 했는데.’
파앗!
라시온의 단검이 내 소매를 스쳤다.
검기가 전개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매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조금만 깊게 들어갔으면 내 팔이 저렇게 찢겼을 것이다.
‘하지만, 내 공격은 더 깊게 파고들어도 라시온을 상처 입힐 수 없어.’
이미 내 칼날은 라시온의 옷 곳곳을 찢어발긴 상태였다.
하지만 라시온은 조금도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듀에이트 중급의 마력으로 호신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공격으로는 그래듀에이트 중급의 호신기를 뚫을 수 없지.’
발라하일 중검술에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조합하여, 강력한 일격을 날려야 한다.
하지만 발라하일 중검술은 결코 신속한 검술이 아니다.
지금도 나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중급 암살자가, 나한테 기술을 펼칠 시간을 줄까.
‘그래, 발라하일 중검술은 사용할 수 없어.’
내가 호신기를 사용할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 중급이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발라하일 중검술으로 육중한 공격을 날리기 직전에 라시온이 파고 들어온다면… 호신기를 쓰지 못하는 나는 바로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
칼레시우스 창뢰검술.
‘도룡검’ 욜스 칼레시우스가 학생들을 위해 개발하고 있는, 아직 미완성의 검술.
훗날 수많은 강적을 격파하는 절세의 검술이 될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내 손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지금 그 진화를 이룩하지 못한다면, 라시온을 쓰러뜨릴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태야.’
그동안 나는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사용해 나보다 한 수 위의 상대와 싸워 왔다.
안네리제, 하인리히, 칼라일, 마테우스, 오크 챔피언, 오크 타이런트… 다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이 없었으면 쓰러뜨릴 수 없었던 상대였다.
그들과의 싸움을 통해 나는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에 익숙해질 수 있었고, 그다음 단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번에 오크 타이런트를 쓰러뜨릴 때는 문턱까지 왔다는 걸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문을 열어야 한다.’
상대는 뛰어난 스피드를 지닌 그래듀에이트 중급.
호신기 때문에 평범한 공격은 먹히지 않고, 호신기를 뚫을 만한 육중한 일격을 펼칠 수도 없다.
게다가 내 몸은 계속되는 전투로 지쳐 있는 상황.
‘역대 최고로 궁지에 몰린 상태…….’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깊은 진리를.
검사는 심각한 궁지에 몰렸을 때,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 가장 극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 법이다.
“…….”
자잘한 상처가 점점 늘어났다.
나를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라시온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파르티잔 심판검술의 방어에도 틈이 생길 테고, 큰 부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본래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완성하는 건 주인공 아칸델이 했어야 하는 일.’
욜스 본인은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를 대신해서 절세의 검술로 완성한 것이 바로 아칸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아칸델이 없다.
그렇기에, 내가 해야 한다.
‘내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해야 한다.’
온몸의 혈맥이 활짝 열리는 듯한 감각.
어디에도 막히는 곳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약간의 비효율도 용납할 수 없다.
최고 효율로 끌어낸 마력을, 검기로 전환한다.
‘평범한 검기여서는 안 된다. 만들어져야 하는 것은… 푸른 번개와 같은 검기.’
파직, 파직.
칼날에서 정말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이것은 칼날 위에서 초고속으로 요동치는 마력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발생한 스파크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검기는… 마력을 칼날에서 초고속으로 순환시키는 검기.’
푸른 번개가 번쩍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실제로 번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초고속으로 칼날에서 요동치는 마력이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러면 이것을 공격에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칼레시우스 창뢰검술(C랭크)의 이해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C랭크)의 성장과 함께 영구 귀속이 진행됩니다.]
머릿속에서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비바람을 가르며 라시온의 단검이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검기의 여파로 귓불이 찢어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지금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칼레시우스 창뢰검술 제1식…….’
라시온의 다음 공격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펼칠 공격이, 라시온보다 빠르다.
‘낙뢰(落雷).’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강렬하게.
푸른 번개가 라시온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B랭크)의 영구 귀속이 완료되었습니다.]
간결한 메시지가, 절세 검술의 완성에 한발 다가섰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