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둠 속을 내달리다 (1)
“카아악……!”
오크 타이런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지배자를 구하기 위해 일반 오크들이 일제히 달려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오크 타이런트에게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이번에는 목을 날려 버렸다.
이미 치명상을 입었기 때문에, 호신기처럼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오크 타이런트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낚아챘다.
그리고 하늘 높이 집어 던졌다.
“카아악?!”
“카악!”
모든 오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놈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오크 타이런트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비록 머리밖에 남지 않은 상태라도, 오크 타이런트를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입니다!”
“……!”
내 목소리를 듣고, 클로드와 마테우스가 빠르게 움직였다.
지배자의 머리에 정신이 팔린 오크들을 향해 검을 휘둘러, 순식간에 그 목숨을 앗아 갔다.
“하인리히, 너도!”
“명령하지 마라, 에르나스!”
하인리히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면서 무수히 많은 오크의 목을 날려 버렸다.
“카아악!”
“카악……!”
오크들은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했다.
오크 타이런트가 죽어 버렸기 때문에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어떻게든 도망치려 하려는 놈들도 있었지만, 하인리히는 그런 놈들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이걸로… 끝이다!”
하인리히가 마지막으로 남은 오크의 목을 날려 버렸다.
100마리 넘게 있었던 오크들 중에서 살아남은 놈은 아무도 없었다.
“다 끝났군요.”
“그래, 정말로 끝났어.”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까 오크 타이런트의 공격을 막아 내다가 삐끗한 손목을 주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째 조교수인 우리들보다 학생인 너희들이 더 잘 싸웠던 것 같군.”
“동감이다.”
옆에서 마테우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정말로 그래듀에이트 하급이냐?”
“마력량은 그 정도 맞습니다만.”
“후우… 어처구니없는 놈들.”
마테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클로드, 이 정도면 다음부터는 그냥 이 녀석들만 내보내도 되지 않겠나?”
“마테우스, 그건 좀… 아니, 가능한가?”
클로드가 생각에 잠겼다.
“특히 에르나스는 베테랑처럼 침착하게 작전도 세울 수 있고, 행정적인 처리만 가르치게 하면…….”
외부 실습 때마다 조교수가 따라가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끼리만 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물론, 그만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클래스 측에서 판단했을 때의 일이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조교수님.”
하인리히가 입을 열었다.
“되도록 혼자서 나가고 싶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나가면 안 되지. 다른 학생하고 함께…….”
“이 녀석 없이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으음…….”
클로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쳐다봤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 부분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에르나스, 너까지…….”
그때 마테우스가 입을 열었다.
“작은 규모의 임무라면 혼자서도 수행 가능할 거다. 이번 일처럼 대규모 임무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마테우스…….”
“어쨌든, 돌아가면 욜스 교수님과 한번 의논을 해 봐야 하겠군.”
그렇게 말하며 마테우스가 나와 하인리히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쩌면 조만간… 우리가 너희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 * *
“세, 세상에…….”
현장에 나타난 유베스터 남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토벌대를 괴멸한 오크 무리가 고작 네 명한테…….”
“이게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의 힘입니다, 유베스터 남작.”
클로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오크들의 우두머리를 쓰러뜨린 것도 이쪽 학생들입니다.”
“학생들이……!”
유베스터 남작이 나와 하인리히를 보며 감탄했다.
아까는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이렇게 결과로 증명해 줬으니 눈빛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죄송합니다. 훌륭한 검사님들을 의심해서…….”
“아닙니다, 남작님.”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걸로 영민들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유베스터 남작은 나와 하인리히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하인리히는 조금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남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경험이 별로 없는 탓이지.’
소설 속에서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알고 있기에, 지금 하인리히의 심리가 어떤 것일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작님, 그러면 몬스터 사체는…….”
“아, 걱정 마십시오. 제대로 원료를 추출해서 아카데미로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몬스터의 사체는 엘릭시르의 원료 중 하나다.
아카데미가 몬스터를 처치해 주면, 의뢰자 측에서 몬스터의 사체를 처리해 원료를 추출해 줘야 한다.
이건 계약서에서도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고, 폐기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현지에서 처리하는 게 더 편하거든.’
어디까지나 원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엘릭시르를 만들 수는 없다.
추출된 원료는 아카데미를 거쳐 엘릭시르를 만드는 곳으로 운송되고, 다른 원료들과 조합하여 엘릭시르가 된다.
“그러면 남작님,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가시려고요? 감사의 의미를 담아 연회라도…….”
“하하, 그런 것까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클로드는 웃으면서 사양했다.
결국 유베스터 남작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배웅하게 되었다.
“다들 수고 많았다. 이제 바로 아카데미로 향하면 되겠군.”
“그래, 그런데…….”
바이콘 마차를 몰면서 클로드가 하늘을 확인했다.
“운이 좀 안 좋은 것 같네.”
“왜 그러지?”
“오늘 밤에 비가 올 것 같아. 야영하면서 고생 좀 하겠는데.”
클로드의 말에 마테우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 *
운 나쁘게도, 우리가 가는 길에는 하룻밤 묵어 갈 마을이 없었다.
다른 길로 우회하면 되지만, 결국 우리는 빨리 아카데미로 귀환할 수 있는 루트를 택했다.
“음, 천막도 잘 설치했군.”
내가 설치한 천막을 확인하면서 마테우스가 미소를 지었다.
“천막 설치법은 아카데미에서도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았을 텐데, 매우 능숙하군. 혹시 캠핑이 취미였나?”
“그냥… 예전에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배운 거지만, 그걸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면서 주위를 살펴봤다.
“바이콘들도 비를 피할 수 있게 해 줬고, 이제 잠들면 되겠군요.”
“그렇지. 이 주변에는 몬스터도 별로 없으니, 불침번도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을 거다.”
오늘 불침번은 나, 하인리히, 마테우스, 클로드 순이었다.
제비뽑기를 한 결과인데, 상당히 운이 좋았다.
“그러면 나는 먼저 쉬겠다. 불침번 부탁한다, 에르나스.”
“네, 편히 쉬십시오.”
하나둘씩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우니, 시끄러운 비바람 소리만 들리게 되었다.
나는 혼자 가만히 앉아서 교대 시간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
그리고 교대 시간이 5분 정도 남았을 무렵.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인리히가 몸을 일으켰다.
‘이 녀석… 깨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시간에 맞춰서 일어나는 거지?’
내가 창조한 인물이긴 하지만, 정말 기이한 녀석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하인리히가 나한테로 다가왔다.
“교대다, 에르나스.”
“아직 몇 분 남았는데.”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귀찮은 일이다. 그냥 꺼져라.”
나한테는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별말 없이 일어났다.
“수고해라, 하인리히.”
“…….”
대꾸하지 않는 하인리히를 뒤로하고, 나는 자리로 이동했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워서 잠을 청하려던 순간.
“…….”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주위에서 새로운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건…….’
불침번을 서면서, 나는 일정 간격으로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단순히 몬스터의 접근만을 경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듀에이트가 오고 있군.’
잠을 청하기 직전, 그래듀에이트의 접근을 감지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다섯, 여섯… 아니, 열 명도 넘는다.’
열 명이 넘는 그래듀에이트가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비 내리는 밤을 이용해, 우리를 포위하듯이 사방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테오도라 발트펠트가 보낸 자객들이군.’
발트펠트 가문의 2인자.
고르트의 숙모이자 스승인 그녀가, 리히테나워 대공 쟁탈전에 가장 방해되는 에르나스를 제거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역시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가.’
소설 속 전개를 생각할 때, 내가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가면 자객을 보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어느 타이밍에 습격을 할지까지는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이 그때인 모양이다.
‘오크 토벌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인 데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지. 습격하기에는 딱 좋은 밤이야.’
지금 이곳에는 욜스 클래스의 조교수인 클로드와 마테우스 그리고 하인리히까지 있다.
그런데도 습격해 온다는 건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테오도라 발트펠트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터…….’
발트펠트 가문의 2인자가 직접 움직이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러니 오늘 밤은 그냥 잔챙이 암살자들만 있을 것이다.
‘잔챙이라고는 해도, 다들 그래듀에이트 하급 이상이겠지만.’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해도 상대방의 역량을 정확히 분석하는 건 불가능하다.
좀 더 숙련도가 오르면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그냥 그래듀에이트 수준이라는 것만 알 수 있다.
‘테오도라가 고용할 수 있는 암살자라면, 대부분 하급이겠지.’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볼일을 해결하려는 것처럼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사이 한 번 더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해서 놈들의 정확한 숫자와 위치를 확인했다.
‘숫자는 열둘… 그중에서 셋이 내 좌측인가.’
상황을 파악하면서, 나는 사각을 이용해 좌측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사용해… 몸을 낮추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때마침…….’
콰르릉!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펼쳤다.
그러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괴한이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곧바로 빗속을 뚫고 이동, 근처 바위 옆에서 이동하고 있던 괴한을 덮쳤다.
“……!”
어둠 속에서 번뜩인 검기가 두 번째 자객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렇게 되면 근처에 있던 또 다른 놈도 상황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수풀 속에서 튀어나오려 했지만, 이미 나는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사용해 놈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
콰르릉!
놈이 뭐라고 외치려 했지만, 때마침 천둥이 쳤다.
그 타이밍을 맞춰 발동한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이 놈의 생명을 빼앗았다.
‘이걸로 남은 건 아홉 명.’
다른 방향에 있던 아홉 명은 상황을 파악했을까.
나는 곧장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해 놈들의 동향을 확인했다.
‘움직임에 변화가 없다. 눈치 못 챘군.’
놈들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을 노려 습격했다.
하지만 그 영향으로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채는 것도 어려워졌다.
‘나머지 놈들도, 이렇게 각개격파하면 되겠군.’
조교수들을 깨우거나, 하인리히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짓을 하면 놈들이 습격을 포기하고 도망칠 수도 있는 데다가… 나 혼자서 전부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푸른 검기를 전개했던 칼날을 내려다봤다.
오늘 오크 챔피언과 오크 타이런트를 쓰러뜨릴 때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사용하면서, 나는 뭔가 감이 오는 걸 느꼈다.
조금만 더 파고든다면 분명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자객들과의 혈전을 통해,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린다면…….’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랭크를 올려, ‘영구 귀속’ 상태로 만들 수 있다.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채, 나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둠 속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