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외부 활동 (1)
우리가 승부에서 이겼다.
그럼 패배한 쪽에서 우리 요구를 들어줘야 정상이다.
“원하는 게 뭐지?”
내 손을 뿌리친 클로드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두지만, 수료증을 지금 당장 발급해 줄 수는 없어. 지도 교수인 욜스 교수님의 권한이니까, 우리가 그 부분에서 편의를 봐줄 수는 없다고.”
“그런 건 굳이 필요 없습니다.”
2차 시험을 통과한 수련생은 각 클래스에서의 수련을 마친 뒤 수료증을 받는다.
4개 이상의 수료증을 확보하면 3차 시험에 도전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
현실 세계의 대학교에서 여러 과목을 이수하여 일정량 이상의 학점을 받아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욜스 클래스에서 제대로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 온 건데, 그런 건 의미가 없죠.”
“그러면 원하는 게 뭐지?”
마테우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가 수련생들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은데.”
“그래도 교육 내용을 조정해 주는 건 가능하시겠죠.”
“……?”
“뻔한 기초 훈련이나 이론 강의 같은 건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하인리히를 쳐다보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욜스 교수님이 직접 지도해 주시는 시간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의 교육은 조정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은… 우리들한테서는 교육을 받고 싶지 않다는 소리인가?”
마테우스가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소리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조교수들 앞에서,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부 실습 위주로 교육을 받고 싶습니다.”
* * *
흑색 6반 시절에는 학생들의 이동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가끔 배를 타고 실습 장소로 이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2차 시험을 통과한 이후부터는 달라진다.
휙휙 날아다닐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가 되면 이동 제한 같은 것도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무단으로 아카데미에서 나가는 건 여전히 금지되지만 말이다.
‘2차 시험을 통과한 수련생은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갈 일도 많아지지.’
2차 시험 때 알드바우트 총장이 강조했듯이, 아카데미는 실전에서 싸울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를 육성하려 한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모의전만 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실전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이건 주로 각 클래스의 외부 활동에 참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짚고 넘어가지.”
나와 하인리히 앞에서, 클로드가 곱슬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카데미는 너희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지만, 교육만이 아카데미의 업무는 아니야. 외부 활동을 통해 제국의 안정에 기여하는 것도 아카데미의 업무라 할 수 있지.”
그렇게 말하며 클로드는 벽에 걸려 있던 지도를 가리켰다.
“아카데미가 위치한 제국 서부는 치안이 좋지 않아. 마교 세력이 가장 강한 지역이고, 몬스터도 많지. 랭커스터 가문 같은 명문가의 세력권을 벗어나면 무법 지대나 마찬가지야.”
“…….”
“그렇기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그래듀에이트를 투입하여 해결해 주는 거지. 어디서 몬스터가 나타났다든가, 어디서 마교도들이 나타났다든가, 그런 소식이 전해지면 아카데미 각 클래스에서 움직여서 토벌하는 거야.”
이런 활동은 주로 클래스 단위로 진행된다.
토벌의 성과는 곧 클래스의 실적이 되고, 교수들의 업적이 된다.
“그리고 이 토벌 임무에는 학생들도 참가할 수 있지. 실전을 경험하게 하여 그래듀에이트로서 성장시킨다는 명목으로 말이야.”
그렇게 설명한 뒤,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학생을 참가시키는 건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야. 학생이 중상을 입거나 사망하기라도 하면 그 클래스의 책임이 되니까.”
“…….”
“그러니… 너희들이 외부 실습 위주로 교육을 받고 싶다고 하면, 우리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지. 보다시피 지금 욜스 클래스에는 나하고 마테우스밖에 없으니까.”
욜스 클래스에는 아직 조교수가 두 사람밖에 없다.
조교조차 아직 뽑지 못한 상태다.
“바깥에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너희들을 제대로 보호해 줄 수 없어.”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몸은 저희가 지킬 수 있습니다.”
“에르나스…….”
“하인리히도 그런 생각일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하인리히를 쳐다봤다.
“멋대로 나를 대변하지 마라, 에르나스.”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인 뒤, 하인리히는 클로드를 향해 말했다.
“저도 에르나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외부 실습 위주로 교육을 받고 싶습니다.”
“하인리히…….”
“만약 저희가 외부 실습 중에 중상을 입더라도, 그건 조교수님들의 책임이 아니라 저희 책임입니다. 필요하다면 서약서를 쓰겠습니다.”
“아니, 그런 건 필요 없고.”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며 마테우스를 쳐다봤다.
“마테우스, 어떻게 생각하지?”
“저 녀석들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수밖에 없겠지.”
마테우스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우리는 신생 클래스라서 빨리 실적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야 예산도 인원도 확보할 수 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에르나스도 하인리히도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다. 이 녀석들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들만으로는 부담스러운 토벌 임무도 수행할 수 있겠지.”
“으음…….”
“구체적인 계획을 짜서 욜스 교수님에게 승인을 받도록 하지. 욜스 교수님도 서부에서 거친 싸움을 경험하며 지금의 경지에 오르셨으니, 반대하지는 않으실 거다.”
그렇게 말한 뒤, 마테우스는 우리들을 쳐다봤다.
“에르나스, 하인리히, 우리는 너희를 보호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겠다. 한 사람의 그래듀에이트로 대우하도록 하지. 괜찮겠나?”
“저희가 바라는 바입니다.”
“좋다. 그러면 바로 스케줄을 잡도록 하지.”
이걸로 나한테는 필요 없는 기초 훈련이나 이론 강의를 생략할 수 있게 되었다.
외부 실습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는다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 *
“벌써부터 외부 실습을 나간다고?”
기숙사 계단에서 마주친 베리스리제는 내 얘기를 듣고 인상을 찡그렸다.
“욜스 클래스는 제정신이야? 처음부터 외부 실습에 데려가다니.”
“내가 요청한 거야. 빨리 실전 경험을 쌓고 싶었거든.”
“아무리 그래도…….”
베리스리제는 첫날에 발렌티아노 클래스를 찾아갔다.
발렌티아노 클래스는 가장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자랑하는 클래스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외부 실습을 실시하지는 않는다.
그래듀에이트로서 기초 소양을 갖췄다고 판단한 이후에야 바깥으로 데려갈 것이다.
“너도 그렇고 하인리히도 그렇고,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네.”
“우리 몸은 우리가 알아서 지킬 거니, 걱정 안 해도 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베리스리제가 팔짱을 끼면서 나를 노려봤다.
“너는 몬스터나 마교도들만 생각하는 모양인데, 네 목숨을 위협하는 건 그런 놈들만이 아니야.”
“…….”
“본인이 어떤 위치인지 자각도 못 하고 있다니, 한심하네.”
베리스리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아카데미 내부의 경쟁에서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상태다.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검술명가가 내 목숨을 노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아카데미 내부에 있어도 위험한 일이 발생하는데, 자진해서 바깥에 나간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걱정해 줘서 고맙군, 베리스리제.”
“누, 누가 걱정했다고 그래?”
베리스리제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걱정한 게 아니라, 한심하다고 비웃은 거야!”
“어쨌든, 조언해 줘서 고마워.”
“조언한 것도 아니야! 나는 그저……!”
“어쨌든.”
베리스리제의 말을 끊으면서, 나는 담담히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돼. 임무 도중에 자객이 접근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니까.”
“잠깐, 진지하게 하는 얘기야?”
베리스리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평범한 암살자 한두 명이 덮친다면 네가 상대할 수 있겠지. 하지만 여러 명이서 덤벼들면 어쩔 건데? 은신한 상태로 포위망을 좁혀 오면?”
“그럴 경우에는 좀 곤란해지겠지.”
지난번에 헨리 랭커스터가 라지엘 한 명만 파견한 건, 내가 아직 미숙한 애송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이미 2차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정도 수준의 암살자 한 명이 나를 죽이러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베리스리제의 말대로 집단으로 나를 습격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응할 수 있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아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오늘 나는… 클로드에게서 새로운 능력을 습득했으니까.
== 잠정 획득 ==
[파르티잔 심판검술(S랭크)]
[발라하일 중검술(A랭크)]
[칼레시우스 창뢰검술(C랭크)]
[리히테나워 경신술(A랭크)]
[아틸리온 마력탐측술(A랭크)]
== 영구 귀속 ==
[동부식 마력연공법(A랭크)]
아틸리온 마력탐측술.
미약한 마력을 방출하여, 근처에 있는 마력 보유자를 ‘찾아내는’ 기술이다.
예전에 비올라한테서 얻었던 오리셔스 수렵술과는 달리 마력을 사용하여 적을 탐색한다.
내 근처에 있는 그래듀에이트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나를 습격하려 접근하는 놈들을 미리 알아챌 수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지.’
나는 아틸리온 마력탐측술 하나만으로 자신 있어 하는 게 아니다.
어떤 놈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는지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 * *
“일이 제대로 안 풀리는군.”
테오도라 발트펠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녀는 아카데미 쪽에서 전달된 소식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교의 칼라일은 에르나스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고, 우리가 심어 놓은 교관들도 줄줄이 붙잡혀 간 상태…….”
“죄송합니다. 에르나스의 역량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테오도라 앞에서 고개를 숙인 건, 그녀의 측근인 모하드였다.
그는 대대로 발트펠트 가문을 섬기며 궂은일을 하던 가문 출신으로, 지금은 테오도라를 보좌하고 있었다.
“모하드, 아카데미가 나한테까지 책임을 묻는 일은 없겠지?”
“그 부분은 확실히 처리했습니다. 교관들이 란즈슈타인 가문에 대한 개인적 원한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걸로 마무리될 겁니다.”
“그래, 알겠다.”
이번 일로 발트펠트 가문에 타격이 가서는 안 된다.
확실히 꼬리 자르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처음부터 준비해 뒀으니, 배후에 테오도라가 있다는 것이 밝혀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카데미 내부에서 고르트를 도와주기가 어려워졌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안 그래도 그 녀석이 2차 시험에서 탈락해서 다른 놈들보다 뒤처지고 있는데 말이다.”
이미 퇴학당한 레스터를 제외하면, 6대 검술명가 중에서 유일한 탈락자가 고르트였다.
고르트의 숙모이자 스승인 테오도라 입장에서는 답답한 상황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하는 수 없군. 이제부터는 외부에서 움직여야겠다.”
“외부에서라면… 고르트 도련님이 외부 실습을 나올 때까지 기다리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런 것이 아니지.”
테오도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에르나스 녀석이 외부 실습으로 아카데미 바깥에 나오면, 그때 암살자들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니, 만만치 않은 놈 같았다. 확실하게 처리를 해야겠지.”
그렇게 말하며 테오도라는 손을 깍지 꼈다.
“암살자들을 불러라. 비용은 아낄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테오도라 님!”
“이렇게까지 해도 녀석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 순간, 테오도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테오도라 발트펠트.
발트펠트 가문의 2인자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향해 살의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