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신동을 꺾어라 (2)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가라고?”
“그래, 하인리히.”
나를 노려보는 하인리히 앞에서도, 나는 당당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제 곧 너와 나의 시합이 시작되지. 거기서 어느 쪽이 위인지 가리는 거야.”
“…….”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라는 게 증명되면, 네가 나한테 복종하는 게 자연스럽겠지. 안 그런가?”
방금 전, 하인리히는 본인이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를 것이라 단언했다.
내가 하인리히를 꺾을 가능성은 없으니, 일찌감치 밑으로 들어와 도우라고 했다.
“네가 사용하던 논리대로라면, 내가 이긴 시점에서 너에게 복종할 이유가 없지. 반대로 너는 내 밑으로 들어와야 하는 거고. 아닌가?”
“…….”
하인리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를 잘못 생각한 모양이군, 에르나스.”
“왜 그런 소리를 하지?”
“본인의 역량도 모르고 헛소리를 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하인리히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에르나스, 네 육체적 조건은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들 중 최악이다. 고르트처럼 천부적인 육체를 갖고 태어난 녀석보다 못한 건 물론이고, 마른 체격의 여성인 베리스리제보다 못하다.”
“…….”
“요 몇 달 사이에 몸을 단련한 것으로 보인다.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단련을 시작한 모양인데, 너무 늦게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한눈에 내 몸 상태를 꿰뚫어 봤다.
“물론, 마력으로 커버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는 적색 엘릭시르를 지금까지 네 병이나 복용했다. 최고 효율로 흡수했다면 그래듀에이트 초입을 넘어선 마력을 지니게 되었을 테고, 육체적인 불리함은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
“…….”
“하지만 그건 상대방이 너보다 못한 경우에 해당된다. 상대방이 너보다 마력이 심하게 부족한 경우가 아니라면, 큰 의미는 없다.”
이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인리히도 지금까지 적색 엘릭시르를 세 번 복용했다.
한 번밖에 복용하지 못한 베리스리제 등하고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게다가 상당히 높은 효율로 마력을 흡수했을 테고, 마력을 제어하는 기술 자체도 뛰어나다.
절대적인 마력량 자체는 내가 더 많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인리히가 불리한 부분은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너는 검술에서 나를 꺾어야 한다. 그게 가능할 것 같나?”
“나도 질문하지, 하인리히.”
나는 하인리히에게 쏘아붙였다.
“어째서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거지?”
“…….”
하인리히가 다시금 침묵했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더 이상 얘기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군.”
“…….”
“네 제안은 거부하겠다. 그런 제안, 받아들일 가치가 없다.”
그는 이번 시합에서 내기를 하자는 내 제안을 거부했다.
“동시에 내 제안도 철회하겠다. 너를 내 수하로 거둬들일 일은 없다.”
하인리히의 눈빛은 차가웠다.
마치 얼음의 칼날로 나를 찌르는 느낌이었다.
“주제를 모르고 어리석은 소리를 한다면, 내가 직접 교육해 주겠다, 에르나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하인리히.”
교섭은 결렬되었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동맹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곧 있을 시합에서… 결판이 난다.
* * *
대기석으로 돌아오니, 마침 클로에와 슈미츠의 제3시합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 검사로서의 역량은 슈미츠 쪽이 뛰어나지만, 지금은 클로에가 유리했다.
슈미츠가 하인리히의 실력에 충격을 받아 의기소침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클로에는 상대방의 심리를 공략하는 능력이 우수하기 때문에, 이런 상태의 슈미츠를 몰아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슈미츠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궁지에 몰린 탓에, 위축되었던 투쟁심이 각성한 것이다.
슈미츠는 제대로 검기를 전개하며 맞서 싸웠다.
클로에의 변칙적인 공격을 정면에서 돌파하고, 빠른 속도로 연속 공격을 펼쳤다.
어쩌면 하인리히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우오오……!”
그리고 마침내 슈미츠의 공격이 클로에를 무릎 꿇렸다.
주먹을 불끈 쥔 슈미츠의 포효가 시합장에 울려 퍼졌고,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이걸로 4강 중 세 명이 정해졌군.’
시합장에 걸려 있는 토너먼트 대진표에는 이미 세리느와 루퍼스가 준결승 진출자로 표시되고 있었다.
이제 슈미츠가 제3시합의 승자로 준결승에 진출했으니, 마지막 제4시합만 남았다.
“그러면 나가 볼까, 하인리히.”
“…….”
말을 건네도 하인리히는 대꾸하지 않았다.
정말로 더 이상 나와의 대화가 의미 없어졌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속 좁은 녀석.”
“…….”
대놓고 등 뒤에서 쓴소리를 날렸지만, 대꾸는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 뒤를 따라 시합장으로 이동했다.
“아, 에르나스 님!”
퇴장하던 슈미츠가 내 얼굴을 보고 다급히 달려왔다.
“제가 이기는 모습, 보셨습니까?!”
“그래, 봤다. 잘했어.”
“가, 감사합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슈미츠가 나한테 귓속말을 했다.
“제가 아까 경황이 없어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 하인리히 아그리파의 정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예선에서 직접 싸우는 모습을 보니…….”
“됐어. 퇴장하기나 해.”
뒤늦게 정보를 알려 주려는 슈미츠를 옆으로 밀쳤다.
“에, 에르나스 님, 그래도 제 얘기를 들으면 시합에 도움이…….”
“괜찮아.”
나는 슈미츠를 내버려 둔 채 시합장 중앙으로 향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
하인리히에 대해서는 뭐든지 알고 있다.
나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기 전에… 이 소설의 작가니까.
* * *
“구경하는 재미만 보자면, 이번 제3시합이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군요.”
“하지만 두 사람 다 우리 발렌티아노 클래스의 스타일하고는 맞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관중석에 앉은 발렌티아노 클래스의 교수들이 떠들어 댔다.
“발렌티아노 교수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흠, 재능이 느껴지는 녀석들이더군.”
지도 교수인 발렌티아노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급 후에 동부 검술에 매력을 느낄 수도 있으니, 그때 가서 생각해 보도록 하지.”
“저쪽에서 먼저 가르침을 청해 오면, 그때 태도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이번 비무전에서 발렌티아노가 가장 높게 평가한 건 세리느와 루퍼스였다.
양쪽 다 동부 검술을 쓰는 학생들이라, 발렌티아노가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퍼스는 아버지인 칼레온 교수가 이끄는 칼레온 클래스에 들어갈 테고, 발렌티아노 클래스로 데려올 수는 없다.
결국 2차 시험을 통과한 뒤 발렌티아노 클래스 쪽에서 접촉하는 건 세리느 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곧 제4시합이 시작되겠군요.”
“하인리히 아그리파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현재 가장 돋보이는 두 신입생의 싸움이군요.”
“하인리히는 속도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남부 검술이라 들었습니다. 우리하고는 별로 맞지 않죠.”
“아니, 그래도 청색 2반을 가르친 교수들 얘기를 들어 보니 기초 실력 자체가 매우 우수하다고 합니다. 동부식으로 전향시켜도 대성할 것 같습니다만.”
제4시합을 앞두고, 교수들이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에르나스는 어떨까요?”
“글쎄요. 에르나스는 대체 무슨 스타일인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많더군요. 매번 다른 전법을 취한다고 해서.”
“변화무쌍한 서부 검술 아닙니까?”
“아니, 세리느 바스티안과 비슷한 수준으로 바스티안 기사검술을 펼쳤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서부식과 동부식을 동시에?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아무래도 직접 두 눈으로 살펴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떠들어 대는 교수들과는 달리, 발렌티아노는 말없이 시합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르나스와 하인리히의 대결을 철저히 관찰하겠다는 눈빛이었다.
“아, 드디어 시작하는군요!”
시합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제4시합이 시작되었다.
대치하고 있던 에르나스와 하인리히가 서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
“……!”
전광석화처럼 움직인 하인리히가, 단숨에 거리를 좁혀 에르나스에게 검을 휘둘렀다.
* * *
하인리히가 사용하는 검술은 ‘아그리파 속검술(速劍術)’이라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그리파 가문의 독문 검술로, 슈미츠의 하르트만 쾌검술처럼 속도를 중시한 남부 검술이다.
가장 기본적인 전술은, 상대방이 제대로 자세를 갖추기도 전에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필살의 일격을 꽂아 넣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하인리히가 펼친 공격도, 아그리파 속검술의 전형적인 기술이었다.
‘그래, 소설에 묘사한 것과 똑같지.’
하인리히는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 검술에 대해서도 상세한 묘사가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인리히의 검술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쿠웅!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시합장을 진동시켰다.
하인리히가 펼친 필살의 일격이, 내 방어에 막히는 소리였다.
“…….”
두 자루의 목검이 맞붙은 상태로, 하인리히가 나를 노려봤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펼친 아그리파 속검술이 완벽히 막혀서,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내 공격을 예상하고, 사전에 방어 자세를 취한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인리히가 뒤로 물러섰다.
“타이밍을 맞출 수만 있다면 유효한 전법이지.”
그리고 하인리히가 다시금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한테 일직선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최단 거리로 접근하기 위한 경로가 아니라, 내 사각으로 접근하기 위한 경로로 움직인다.
‘내 방어를 무력화하려는 거군.’
하인리히는 아까 예선에서 상대한 카밀로보다 훨씬 높은 단계에 있다.
카밀로는 전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밖에 못하지만, 하인리히는 전후좌우 상관없이 초고속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종횡무진 움직여 내 사각으로 파고들면, 정면에서의 돌격에 대비해 방어 자세를 취해 봤자 의미 없다.
“오오오……!”
“엄청난 속도다!”
“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야!”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시합장 위를 종횡무진 움직이는 하인리히의 속도에 다들 감탄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예 하인리히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가슴 속의 마나 하트에서 솟구친 마력을 적재적소에 분배하면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쿠웅!
또다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내 우측 견갑골을 노렸던 초고속의 공격이, 이번에도 가로막혔다.
“……!”
하인리히가 숨을 삼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면에서의 공격뿐만 아니라 사각에서의 공격까지 막혔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어떻게 된 거냐, 에르나스.”
검을 맞댄 채, 하인리히가 물었다.
“평범한 그래듀에이트 초입 수준으로는, 내 움직임에 대응할 수 없을 텐데.”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하인리히.”
나는 마력을 재분배했다.
동체 시력 강화에 쓰던 마력을, 상체의 근육을 보강하는 데 보탰다.
“평범한 그래듀에이트 초입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된다.”
“……!”
콰앙!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에, 하인리히가 뒤로 밀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