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비무전 (3)
세리느 VS 베리스리제
루퍼스 VS 고르트
슈미츠 VS 클로에
하인리히 VS 에르나스
소설 속 대진표와 동일했다.
주인공 아칸델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에르나스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런 것까지 소설하고 똑같다니… 무슨 운명 같은 건가?’
우연일까 필연일까.
잠시 고민에 빠져 있자, 서로 짝이 정해진 상대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당신과 첫 번째 시합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죠, 베리스리제.”
“흥, 여유롭네.”
세리느가 말을 건네자, 베리스리제가 쌀쌀맞은 태도로 대꾸했다.
“지난번 진지전에서의 빚을 갚아 줄 생각인가 보지?”
“그 빚은 이미 에르나스가 갚아 줬으니, 상관없습니다.”
“부부 사이도 아닌데 왜 에르나스가 네 빚을 갚아 줘?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네……?”
베리스리제의 말을 이해 못 하고 세리느가 눈을 깜빡였다.
한편 그 옆에서는 루퍼스와 고르트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하고 대결하는 건 오랜만이군. 어렸을 때는 내가 이겼던가.”
“흥, 그때랑 똑같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루퍼스.”
“결과는 똑같을 거다. 짓밟아 주지.”
“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
서로 으르렁대는 녀석들과는 달리, 슈미츠와 클로에는 비교적 온건한 분위기였다.
다만 이건 슈미츠가 의기소침해진 탓이 컸다.
“슈미츠, 그렇게 의욕 없는 태도면 안 되죠.”
“가만 내버려 둬…….”
“비교적 쉬운 상대를 만났다고 좋아했더니, 이래서는 저도 기분이 별로네요.”
클로에 입장에서는 검술명가의 후계자들보다 잘 아는 슈미츠와 싸우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슈미츠가 하인리히의 압도적인 실력 앞에 너무 주눅 들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하인리히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첫 상대로 결정된 나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 * *
예선과는 달리, 본선은 관객석이 있는 시합장에서 진행된다.
첫 번째 시합에 출전하게 된 세리느는 시합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교관의 안내를 받으며 통로를 빠져나온 순간, 세리느는 숨을 삼켰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객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많이…….”
“당연하잖아.”
따라 나온 베리스리제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머지않아 2차 시험이 실시돼. 교수들 입장에서는 누가 쓸 만한 녀석인지 판별하고 싶은 거야.”
“아…….”
“수백 명 있는 신입생 중에서 상위 8명만 골라서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으니, 좋은 기회지.”
지금까지도 종종 교수들이 관전하러 오는 날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는 평소 볼 수 없었던 교수들이 착석해 있었다.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쟁쟁한 교수들이다.
“그래듀에이트로서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도 여러 명이야. 여기서 눈도장을 찍으면, 나중에 진급해서 그 교수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어.”
“……!”
그래듀에이트 절정급.
하급, 중급, 상급을 넘어선 곳에 있는 경지.
그들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는 건 모든 검사들의 꿈이라 할 수 있다.
“너도 나중에 진급하면 각 클래스에서 교육을 받을 거잖아?”
“네, 그렇죠.”
“일찍 눈도장을 받으면 해당 클래스의 지도 교수님들한테 직접 교육을 받을 수도 있어. 평교수나 조교수들한테 교육받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아……!”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에는 ‘클래스’라는 제도가 있다.
일반적인 아카데미의 ‘학과’와 비슷한데, 도제식 교육을 위해 철저한 수직 구조가 존재한다.
클래스를 이끄는 것은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의 ‘지도 교수’이며, 그 아래에 평교수와 조교수, 조교들이 존재한다.
2차 시험을 통과하여 진급한 학생들은 이 클래스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평교수나 조교수들한테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니 지도 교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매우 큰 특전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비무전은 정말로 중요해. 단순히 엘릭시르 몇 개를 더 얻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앞으로의 아카데미 생활에서…….”
“그런데요, 베리스리제.”
“뭔데?”
“저쪽에 계신 분들은…….”
세리느는 객석에서 구석진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카데미 교수들과는 분위기가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제가 알기로 저분들은 황실 궁내부의…….”
“조용히 해, 세리느.”
베리스리제가 인상을 찡그리며 세리느의 말을 가로막았다.
“역시 그 얘기가 사실이었나 보네.”
“네?”
“이번 기수는 지금까지하고 다르다고 하더라고.”
“……?”
처음 듣는 얘기다.
혹시 6대 검술명가들만 알고 있는 사항이 있는 걸까.
“그동안 여러 가문이 아카데미에서 경쟁해 왔어.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면 이 제국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으니까.”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천 년 전에 이 제국을 건국한 철혈검제의 방침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검사만이 제국 사회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
그동안 6대 검술명가 사이의 서열도 아카데미에서의 실적에 따라 변동되어 왔다.
“하지만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정점에 오르는 사람한테는… 정말로 엄청난 특전이 주어진다는 얘기가 있어.”
“엄청난 특전? 그게 뭔가요?”
“나도 자세히는 듣지 못했어. 하지만 칼레온 이그니아스 교수가 잔뜩 화가 나서 랭커스터 가문에 항의하러 간 것도 이것 때문인 것 같아. 6대 검술명가의 가주들은 전부 이것 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것 같더라고.”
대체 무슨 얘기인 걸까.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됐어. 어차피 너희 바스티안 가문하고는 큰 상관 없는 얘기일 테고 말이지.”
그렇게 내뱉으면서, 베리스리제가 깔보는 표정을 지었다.
“네,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세리느는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황실이나 6대 검술명가와 관련된 얘기인 것 같은데, 어떤 일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렇지. 그러니 너 따위는…….”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네요.”
“뭐?”
“지금은 제가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이쪽을 쳐다보는 베리스리제를 노려보면서, 세리느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계속 위로 올라가다 보면, 진실을 알 수 있겠죠.”
“……!”
“그러니, 이번 시합에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계속 승리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도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르고 싶은 사람 중 하나니까요.”
“세리느…….”
베리스리제가 눈을 치켜떴다.
“6대 검술명가도 아닌, 후작 가문의 딸 주제에… 감히 아카데미의 정점을 넘봐?”
“제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직접 확인해 주시죠.”
“에르나스에게도 버림받은 주제에, 겁도 없이…….”
세리느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를 중얼거리며, 베리스리제가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아, 그러면 여기서 너를 꺾고…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 줄게!”
베리스리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 직후, 시합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객석에서 제1시합을 지켜보는 관중들 중에는, 클래스 단위로 몰려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 가장 큰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카데미에서 최대 파벌이라 할 수 있는 발렌티아노 클래스의 사람들이었다.
“이번 제1시합은 어떻게 보십니까, 발렌티아노 교수님.”
“저희들은 아무래도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가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흐음…….”
측근들에게 둘러싸인 채, 노교수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가 바로 발렌티아노 클래스를 이끄는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 ‘기사검(騎士劍)’ 발렌티아노였다.
“자네들은 가문의 이름에 너무 구애받고 있군.”
“네?”
“슈라이에르 가문의 슈라이에르 세검술은 확실히 뛰어난 검술이지.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는 그걸 아주 잘 사용하고 있고.”
지금 시합장에서는 베리스리제가 세리느를 향해 맹공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신속한 찌르기가 돋보였는데, 교수들이 보기에도 위협적일 정도였다.
“하지만 잘 보게. 세리느 바스티안이 수세에 몰린 듯하지만… 자세가 흐트러진 적이 한 번도 없네.”
“앗……!”
“그러고 보니!”
뒤늦게 깨달은 측근들이 숨을 삼켰다.
“그렇다고 해서 검술의 수준이나 신체적 능력에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닌 것 같군. 이건 아무래도… 마력의 차이겠지.”
“마력의 차이…….”
“아무래도 세리느 바스티안 쪽이 더 많은 마력을 지닌 것 같군. 누구 아는 사람 있나?”
주위를 둘러보자, 조교 한 명이 다급히 손을 들었다.
“교수님, 그동안 세리느 바스티안은 적색 엘릭시르 4병을 지급받았다고 합니다. 한편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는… 지금까지 1병밖에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발렌티아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4병을 마셔도 1병을 마신 사람보다 마력량이 적을 수도 있지. 연공법 실력에 따라 마나 하트에 축적되는 마력량이 다르니까. 하지만…….”
시합장에서 베리스리제의 공격을 막아 내는 세리느를 손가락질하면서, 발렌티아노가 계속 말했다.
“세리느 바스티안은 엘릭시르의 마력을 아주 제대로 흡수한 것 같군. 그리고 그걸 동부식 검술에 반영해서, 상대의 맹공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방어술을 펼치고 있지.”
“아……!”
“너무 모범생적인 검술이어서 살짝 지루한 측면도 있지만… 그건 우리 클래스에서는 단점이 아니지.”
발렌티아노는 동부 검술의 대가이며, 발렌티아노 클래스에서도 동부 검술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정석적이고 안정적인 검술을 추구하기 때문에, 세리느는 딱 알맞는 인재였다.
“나중에 2차 시험을 통과하면, 한번 얼굴을 봤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교수님!”
시합장에서는 마침 세리느가 반격에 나선 참이었다.
공격에 열중하다가 체력을 소진한 베리스리제를 순식간에 몰아세우는 모습을 보며, 발렌티아노는 미소를 지었다.
* * *
선수 대기석에 앉은 채, 나는 세리느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매끄러운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간 공격이 베리스리제의 목검을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무방비해진 베리스리제의 손목 안쪽을 정확히 가격했다.
“악……!”
베리스리제의 짧은 비명이 울려 퍼졌고, 이어서 목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리느의 승리였다.
“8강전 제1시합, 세리느 바스티안의 승리입니다.”
시합장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고, 객석에서 환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도 대기석에 앉은 채 작게 박수를 쳤다.
‘소설에서 묘사한 대로, 정말 올곧은 녀석이야.’
마지막까지 세리느는 베리스리제 상대로 검기를 쓰지 않았다.
베리스리제는 아직 검기를 쓰지 못하는 상태이니, 자신도 검기를 쓰지 않는 게 공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설 속 모범생 히로인다운 행동이었다.
“베리스리제가 졌군.”
“흥, 쪽팔린 녀석.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야.”
옆에서 루퍼스와 고르트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고르트.”
“뭐라고?”
“내가 보기에는 너도 세리느와 일대일로 맞붙으면 비슷한 꼴을 당할 거다.”
“웃기는군! 그건 네 애기겠지, 루퍼스!”
루퍼스의 평가에 고르트가 벌떡 일어나면서 화를 냈다.
“이번 시합에서 피떡을 만들어 주지, 어서 나와!”
“마음껏 덤벼 봐라, 고르트.”
제2시합을 치르기 위해 루퍼스와 고르트가 시합장으로 향했다.
대기석에는 제3시합에 출전할 클로에와 슈미츠, 제4시합에 출전할 나와 하인리히만 남았다.
“…….”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하인리히가 다가온 것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동안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하인리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시합 전에, 잠깐 얘기 좀 하지.”
“잘됐군.”
하인리히는 다른 검술명가의 후계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는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
아그리파 가문의 신동, 하인리히.
이 녀석과 싸우기 전에 해결해 둬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