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비무전 (1)
하인리히 아그리파.
입학 시점에서는 ‘영재’라 불렸던 레스터 랭커스터와 동격이라 여겨졌지만, 그 이후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 ‘신동’.
그가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처음이군.’
그동안 연무장 등에서 얼굴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다.
소설 속 묘사대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푸른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인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 하인리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얼굴이었나.”
“이상한 소리군, 하인리히.”
그때 루퍼스가 끼어들었다.
방금 전까지 베리스리제와 싸우려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목검은 거둬들인 상태였다.
“진지전에서 나에게 에르나스의 이름을 들은 뒤, 에르나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북쪽으로 향하지 않았나?”
“그래, 맞다.”
“그때 확인을 못 한 건가?”
“멀리서 본 거여서 말이다.”
하인리히가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거리에서는 누가 에르나스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예전에 얼핏 본 적이 있을 뿐이라.”
“…….”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얼굴을 인식했다. 다음부터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지.”
도발 같지만, 딱히 그런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인리히는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인물의 얼굴 따위는 머릿속에 기억해 두지 않는다.
그동안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그에게 그 정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된 것이지.’
소설에서도 하인리히가 주인공 아칸델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는 건 이 시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소설의 주인공에게 뒤처지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이, 하인리히.”
고르트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하인리히에게 다가갔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에르나스가 기분이 나쁘지. 아무리 에르나스가 그동안 보잘것없는 찌질이였다고 해도 말이야.”
그 찌질이한테 패배해서 마력까지 잃었던 주제에… 참 얼굴 가죽이 두꺼운 녀석이다.
“…….”
하지만 하인리히는 아무 대답 없이 고르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짧게 중얼거렸다.
“누구였지.”
“……!”
고르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검술명가의 후계자들은 하나같이 자존심이 강한 놈들이다.
이런 취급을 받으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봐, 하인리히!”
고르트가 하인리히의 어깨를 움켜쥐려 했다.
몸집이 큰 고르트와는 달리, 하인리히는 키만 크고 마른 체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 보면 고르트가 하인리히의 어깨를 박살 내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생각났다.”
“윽……!”
쿠웅!
고르트가 넘어져서 바닥을 굴렀다.
하인리히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고르트의 팔을 꺾었기 때문이다.
“그 천박하며 거친 행동, 고르트 발트펠트로군.”
“이, 이 자식……!”
목소리를 높이며 고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고르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비켜라. 나는 편성표를 확인하러 온 거다.”
“큭……!”
고르트가 까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더 이상 하인리히한테 달려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계속해 봤자 자신만 땅을 구르면서 망신을 당할 거라고 눈치챈 것이다.
“하인리히 님.”
그때, 냉정한 목소리가 하인리히를 불렀다.
안경을 낀 흑발의 남학생이 하인리히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인리히 님은 4조였습니다. 제가 확인했습니다.”
“4조인가.”
하인리히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카밀로 파브리스.”
“아닙니다, 하인리히 님.”
카밀로 파브리스.
청색 2반 소속으로, 세리느와 마찬가지로 후작 가문의 후계자다.
입학 직후에 대표 자리를 놓고 하인리히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한 뒤, 하인리히의 열광적인 신봉자가 되었다.
사실상 하인리히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저는 3조입니다. 반드시 본선에 진출하여 청색 2반의 이름을 빛낼 수 있도록 하겠…….”
카밀로가 하인리히 앞에서 열심히 떠들어 댔지만, 하인리히는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 대신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에르나스, 너를 상대하는 건 본선 이후가 되겠군.”
“그렇겠지.”
“본선에 올라온다고 해서 우리가 대전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행여나 예선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길 바란다.”
그렇게 말한 뒤, 하인리히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
4조가 예선을 치르는 장소로 이동한 것이다.
“하인리히 녀석이 저런 말을 하다니… 정말로 너한테 기대를 하고 있는 모양이군, 에르나스.”
루퍼스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도 동감이다. 지난번 패배를 설욕하고 싶으니, 예선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도록 해라.”
그렇게 내뱉은 뒤, 루퍼스도 자리를 떴다.
자신이 속한 1조의 예선 장소로 이동한 것이다.
“쯧, 재수 없는 자식들…….”
한편 고르트는 투덜거리면서 퇴장했다.
그도 2조 예선 장소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갈까?”
함께 남은 베리스리제에게 말을 꺼내자, 바로 쌀쌀맞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내가 왜 너하고 동행해야 하는 거지?”
“그럼 따로따로 가든가…….”
“딱히 그런다고는 안 했어.”
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베리스리제가 내 옆에 섰다.
“3조 예선 장소는 어디지? 안내해.”
“…….”
소설 속 묘사대로, 방약무인한 아가씨다.
굳이 대꾸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걸어가려 했을 때,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라, 에르나스.”
“…….”
카밀로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의 차가운 눈빛을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너도 예선 장소가 어딘지 모르면 따라와.”
“그런 게 아니다!”
버럭 소리를 지른 뒤, 카밀로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에르나스, 하인리히 님한테 인정받았다고 해서 잘난 척하지 마라.”
“…….”
“하인리히 님은 어디까지나 네 실력이 궁금해서 저러시는 것뿐이다. 네 실력을 확인한 다음에는 지금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실 거다.”
카밀로는 하인리히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이 녀석은 하인리히에게 과도한 신앙심을 갖고 있어, 종종 이런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카밀로.”
“뭐냐.”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예선 3조에서 나를 탈락시키면 어떨까?”
그렇게 말하자 카밀로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마지막 두 명이 본선에 진출하는 규칙이니, 일찌감치 나를 쓰러뜨려 두면 탈락시킬 수 있잖아.”
“…….”
“그렇게 될 경우, 하인리히도 더 이상 나한테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지.”
자기도 아니고 자기 부하한테 패배했으니, 실망하는 게 당연하다.
“오히려 너를 더 높게 평가하게 될 테고 말이다.”
“……!”
“고려해 봐.”
그렇게 내뱉은 뒤, 나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카밀로를 내버려 두고서.
“에, 에르나스? 왜 굳이 그런 도발을 한 거지?”
베리스리제가 다급히 나를 쫓아오며 물었다.
“카밀로 파브리스는 나름 유명한 녀석이야. 예전에 황실에서 주최한 유소년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어.”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들은 참가하지 않은 대회였지.”
“그래도 실력 있는 녀석인 건 확실해. 그런 녀석이 너를 표적으로 삼으면 예선을 통과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잖아.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한 거지?”
“그러면 네가 나를 지켜 주든가.”
“뭐, 뭣?”
내 말을 듣고 베리스리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왜 너를 지켜 주는데? 미쳤어?!”
“지켜 주는 게 싫으면, 도와주기라도 해 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카밀로하고 일대일로 싸우기 쉽도록, 주위의 다른 학생들을 정리해 줬으면 하는데.”
“……!”
베리스리제가 숨을 삼켰다.
“예선이 시작되면 나는 카밀로를 맡고, 너는 나머지 학생들을 맡는 거지. 어때?”
“왜 내가 그런 짓을…….”
“그렇게 하면 우리 둘이 예선을 돌파하기 쉬워지잖아.”
“우, 우리 둘이?”
“네 말대로 카밀로는 실력 있는 녀석이야. 그 녀석을 탈락시키면 우리 둘이 3조 예선을 통과하는 게 거의 확정되지.”
예선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조마다 두 명뿐이다.
3조에는 더 이상 네임드 캐릭터가 없으니, 카밀로를 탈락시키면 우리의 본선 진출은 거의 확정적이다.
“그건… 나하고 같이 본선에 나가고 싶다는 얘기?”
“뭐?”
“어, 어쩔 수 없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잔챙이들은 처리해 줄게.”
베리스리제가 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 대신 카밀로는 네가 반드시 해치워. 알겠어?”
“그래, 고마워.”
“흥, 함께 본선에 나가기로 한 약속이나 지켜. 또다시 내 뒤통수를 치면 가만 안 둘 테니까.”
“…….”
딱히 내 입으로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굳이 정정하는 것도 귀찮으니,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
‘이걸로 카밀로를 상대하기 편해졌군.’
예선은 50명이 동시에 싸우는 배틀 로얄 형식이다.
그런 난투 속에서 카밀로와 제대로 맞붙는 건 어렵기 때문에, 베리스리제에게 이번 제안을 한 것이다.
‘하인리히를 상대하기 전에, 카밀로를 상대로 연습해 두고 싶었으니 말이야.’
카밀로의 전투 스타일은 하인리히와 비슷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아카데미에 입학한 뒤 하인리히를 추종하면서 그렇게 바뀌게 되었다.
예선을 기회 삼아 카밀로와 대전해 본다면, 하인리히와 본선에서 맞붙기 전에 꽤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길게 끌 생각은 없지만.’
비무전은 예선부터 본선까지 하루에 다 끝난다.
예선 이후에도 경기를 계속 치러야 하니, 오래 싸우면서 체력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카밀로와의 싸움은 빠르게 마무리 지을 것이다.
‘그러면 이걸로 대충 본선 출전자를 예상할 수 있게 된 건가.’
나는 조 편성을 되새겨 봤다.
1조는 무난하게 루퍼스와 세리느가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
2조는 고르트와 클로에, 비올라 중에서 통과자가 나올 것이다.
3조는 카밀로를 밀어내고 나하고 베리스리제가 본선에 진출한다.
마지막으로 4조는 하인리히하고…….
‘아, 그러고 보니.’
어느 조에 배치되었는지 확인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시합장에 도착하기 전에 내 옆에서 의욕을 불태웠던 슈미츠였다.
‘1조하고 2조에는 분명히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3조였으면 내 주위에서 계속 알짱거렸을 것이다.
지금 전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건…….
“에르나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베리스리제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의아해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슈미츠, 고생 좀 하겠군.’
슈미츠의 명복을 빌어 주면서, 나는 예선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 * *
예선 4조 학생들이 모인 시합장.
그곳에서 슈미츠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지금 눈앞에는 푸른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남학생이 서있었다.
슈미츠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차가운 눈빛을 유지한 채.
‘하필이면 이놈하고……!’
청색 2반 대표, 하인리히 아그리파.
불행히도 슈미츠는 예선 시작부터 이 신동과 맞부딪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