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새로운 힘 (3)
안네리제에게 능력 재현을 시도하는 건 두 번째다.
장시간의 대련 덕분인지 이해도가 상승해서 바로 성공 판정이 나왔다.
[파르티잔 심판검술(S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으나, 이미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많습니다.]
[시그니안 정화검술(A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으나, 이미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많습니다.]
[리히테나워 경신술(A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으나, 이미 리히테나워 경신술(A랭크)을 보유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효화됩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많기 때문에 1개의 능력만 획득할 수 있습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능력을 삭제하고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지금 빈자리는 하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르티잔 심판검술과 시그니안 정화검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다른 능력을 삭제하고 자리를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러면 12일 페널티를 감수해야 한다.
‘시그니안 정화검술은 지금 당장 필요하지는 않아.’
주로 사악한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것이 시그니안 정화검술이다.
지금으로서는 사용할 곳이 없으니, 굳이 필요 없다.
‘그러니…….’
내게 필요한 건 안네리제가 사용했던 파르티잔 심판검술 하나뿐이다.
현재 내 마력량으로 펼칠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이면서, 모난 곳 없이 정석적인 검술이라 범용성이 높다.
‘기존 능력을 삭제하는 일 없이, 파르티잔 심판검술 하나만을 획득한다.’
머릿속으로 생각하자, 바로 반응이 왔다.
[파르티잔 심판검술(S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습니다.]
이걸로 성공이다.
나는 만족감을 느끼며 안네리제에게서 손을 뗐다.
다행히 안네리제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내 접촉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다보니 안네리제가 잠들어 있을 때만 능력 재현을 시도하게 되는군.’
맨살을 접촉한 상태에서만 능력 재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매번 애로 사항이 많다.
상대방에게 의구심을 주는 게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에, 상대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처리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
‘자칫하면 안네리제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안네리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끝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
그때, 창문 밖으로 갈색 털 뭉치가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
무슨 동물이 지나간 걸까.
‘여기는 고양이 같은 것도 없을 텐데,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하품을 했다.
* * *
주말을 맞이하여 느긋하게 휴식을 하고 있던 클로에는, 갑자기 찾아온 여학생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클로에…….”
“세리느 님? 왜 그렇게 얼굴이 창백해지신 거죠?”
세리느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는… 그동안 에르나스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해요?”
“저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주위의 또래 여자들한테도 더 이상 치근대지 않는 걸 보면서… 이제는 정말로 마음을 고쳐먹고 검술의 길을 걷기로 한 줄만 알았죠.”
“그게 아니었나요?”
“네, 에르나스는, 에르나스는…….”
그렇게 말하다가 세리느가 몸을 떨었다.
“이제 더 이상 저희 같은 또래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어졌을 뿐이었어요. 단순히 연상의 여자를 선호하게 된 거죠.”
“…….”
“자기보다 10살 이상 나이 많은 여자한테만 호감이 가는 거예요. 그게 현재 에르나스의 취향이라고요.”
세리느의 절박한 목소리를 듣고, 클로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리느 님, 요새 너무 무리하신 것 같네요. 주말이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하세요.”
“클로에? 제 말을 안 믿는 건가요?”
“세리느 님이 누구보다 열심이신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오늘만큼은 푹 쉬도록 하세요. 자, 제 침대에 누우시죠.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향초를 켤 테니.”
“클로에……!”
스트레스에 짓눌려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 모범생을 안타깝게 여기며, 클로에는 세리느를 강제로 침대에 눕혔다.
* * *
시간이 흘러, 마침내 비무전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흑색 6반은 배를 타고 예선이 열리는 시합장으로 향했다.
“그러면 여러분,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안네리제가 배 위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비무전은 6개 학급 전체가 참가하는 시합입니다. 다만 먼저 예선을 거칩니다.”
“…….”
“학급 상관없이 4개 조로 나뉘어서 예선을 치르며, 각 조마다 2명씩 본선에 진출합니다.”
현재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학생은 약 200명.
그러니 하나의 조에 50명 정도가 배정된다.
그중에서 두 명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으니, 경쟁률은 상당히 높다.
“예선은 배틀 로얄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두 사람만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으니, 페이스 배분에도 신경 쓰는 편이 좋을 겁니다.”
배틀 로얄이란 여러 명이 동시에 싸워서 마지막 승자를 가리는 형식의 시합이다.
가장 많은 적을 쓰러뜨려도 도중에 탈락하면 그냥 평범한 패배자이기 때문에, 안네리제 말대로 전략이 중요하다.
“조 편성은 시합장에 도착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왔네요.”
안개 너머로 커다란 건물이 세워진 섬이 보였다.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원형의 건물인데, 저곳이 아카데미의 ‘중앙 시합장’이다.
객석이 많기 때문에 외부 인사가 참가하는 공식 시합 같은 것도 저곳에서 열린다.
“긴장되는군요, 에르나스 님.”
중앙 시합장에 시선을 향하면서, 슈미츠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나스 님과 같은 조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하고 다른 조라면 자신 있는 건가?”
“그거야, 뭐.”
슈미츠가 허리에 찬 목검을 만졌다.
“이제는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도 도달했고, 다른 녀석들한테 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며칠 전, 슈미츠는 마침내 검기에 눈 떴다.
나와 세리느에 이어 흑색 6반에서 세 번째로 탄생한 그래듀에이트였다.
“다른 검술명가의 후계자들한테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흠…….”
지금까지 슈미츠가 복용한 적색 엘릭시르는 나와 마찬가지로 4개다.
실제 마나 하트에 정착시킨 마력량은 내 절반 정도겠지만, 그래도 루퍼스나 베리스리제보다는 많은 마력이다.
그 녀석들은 아직 검기를 쓸 수 없으니, 슈미츠가 검기를 써서 싸우면 승산이 있다.
“슈미츠, 그런데 네가 한 가지 알아 둘 게 있어.”
“네?”
그때 안네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깜박했는데 예선에서는 검기 사용이 금지됩니다. 부상자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것이니, 다들 유념해 주세요.”
“…….”
슈미츠의 얼굴 표정이 경직되었다.
드디어 터득한 검기를 사용해 잔뜩 날뛰어 볼 생각이었을 텐데, 검기 금지라니 실망스러울 것이다.
“본선에 오르면 검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너무 낙심하지 마.”
“네…….”
슈미츠가 침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했군요. 다들 내리세요.”
우리는 안네리제의 인솔을 받으며 배에서 내렸다.
중앙 시합장으로 들어서자, 이미 다른 학급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조 편성은 저쪽 대자보에 적혀 있습니다. 확인하고 위치로 이동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교관님.”
“건투를 빌게요.”
마지막 응원을 해 주는 안네리제를 뒤로한 채, 우리는 대자보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4장의 종이 위에 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일단 예선 1조에는 세리느가 들어갔고… 적색 1반의 루퍼스도 1조인가.’
1조에서는 세리느와 루퍼스만 눈에 들어왔다.
소설 속하고 똑같은 편성이니, 무난하게 세리느와 루퍼스가 통과할 것이다.
‘2조에는 클로에와 비올라가 한꺼번에 들어갔고… 황색 3반의 고르트도 있군.’
고르트는 지난번 진지전에서 마력을 전부 잃었지만, 보나 마나 다른 학생의 엘릭시르를 빼앗아서 최소한의 마력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러니 고르트의 통과는 확정적이라 보면 되고, 나머지 하나는 클로에와 비올라가 다투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3조는…….’
3조에 배치된 학생을 확인하려 했을 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둘 다 3조네. 설마 이렇게 다시 맞붙을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어, 에르나스.”
뒤를 돌아봤다.
화려한 금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베리스리제…….”
“그래, 나야.”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
녹색 4반의 대표로, 남부의 검술명가인 슈라이에르 가문의 후계자다.
최근 진지전에서 고르트와 함께 나한테 덤벼들었다가 패배했다.
“지난번 패배, 반드시 설욕해 주겠어.”
“이번에는 고르트와 협공할 수 없어서 아쉽겠군.”
“누굴 놀리는 거야? 그 녀석과의 동맹은 이미 파기했어.”
베리스리제는 고르트가 지난번에 보여 준 태도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내 공격에 당할 때 고르트가 도와주지도 않고 그냥 지켜보기만 했었으니까.
“이번에는 검기 사용 금지니까, 순수한 검술 대결이 되겠지.”
베리스리제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난번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본모습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까발려 줄게, 사기꾼.”
“…….”
평소에 이렇게 도발당하면 바로 받아친다.
하지만 베리스리제 상대로는 강하게 받아치기 어려웠다.
에르나스 쪽에서 원인 제공을 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에르나스가 잘못한 거지만… 아니, 작가로서 그렇게 설정한 건 나니까 내 잘못이기도 한 건가?’
내 마음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등 뒤에서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베리스리제는 에르나스를 싫어하는군.”
“흥, 저 녀석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뒤를 돌아보니, 붉은 머리카락의 남학생과 갈색 머리카락의 남학생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적색 1반의 루퍼스 이그니아스, 그리고 황색 3반의 고르트 발트펠트였다.
‘어쩌다 보니 검술명가들끼리 모이게 되었군.’
루퍼스도 고르트도 나한테 패배한 적이 있기 때문에, 별로 호의적인 시선이 아니었다.
특히 고르트는 나한테 원한이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진지전에서 나한테 패배하면서 마력을 대량으로 잃은 탓이다.
“뭐야, 너희들.”
베리스리제가 두 사람을 노려봤다.
사실 우리들 중에서 서로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술명가의 후계자로서 경쟁심도 있긴 하지만, 다들 개인적으로 서로를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있었다.
한때 동맹을 맺고 있었던 베리스리제와 고르트조차 서로 사이가 좋아서 뭉쳤던 게 아니다.
공통의 적을 밟아 주기 위해, 가장 입장이 약한 두 사람이 뭉쳤을 뿐이니까.
“나하고 에르나스가 얘기하고 있는데, 함부로 끼어들지 마.”
“뭐냐고, 베리스리제.”
고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에르나스와 단둘이서 얘기하는 게 좋은 건가? 싫어하는 사람과 단둘이서 얘기하는 게 좋다니, 취향이 특이한데?”
“뭐, 뭣?”
베리스리제가 인상을 찡그리자, 루퍼스가 끼어들었다.
“고르트, 너무 그러지 마라. 베리스리제도 이유가 있다.”
“이유라니?”
“베리스리제는 예전에 에르나스에게 농락당한 원한이 있다. 처음으로 참가한 무도회에서 에르나스에게 구애를 받고 잔뜩 들떠 있었는데, 그 직후에 다른 여자와 밀회를 갖는 모습을 목격해서…….”
루퍼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하자, 베리스리제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루퍼스!”
“네가 에르나스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줬을 뿐이다. 문제가 있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잖아! 문제투성이라고!”
“그 트라우마로 네가 무도회를 기피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상세히 설명할 생각이었다만.”
“상세히 설명할 필요 없으니 입 닥쳐!”
베리스리제가 루퍼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목검이긴 하지만, 베리스리제의 목검은 끝이 뾰족하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하다.
“흠, 너하고는 본선에서 싸우게 될 줄 알았는데.”
베리스리제의 공격을 피하며, 루퍼스도 허리에 차고 있던 목검을 뽑아 들었다.
“생각해 보니 본선에서 너를 만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군. 여기서 상대해 주마.”
루퍼스도 만만치 않게 호전적인 녀석이다.
베리스리제의 분노를 진정시켜 줄 이유가 없었다.
“아주 개판이군.”
루퍼스와 베리스리제가 대치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르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에르나스, 네가 원인이라 할 수 있는데 책임지고 수습해야 하는 것 아닌가?”
“…….”
나는 입을 다문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까도 생각했던 거지만, 베리스리제의 경우는 에르나스가 잘못한 게 사실이기 때문에 영 껄끄러운 상대였다.
소설 속 에르나스는 그걸 다 알면서 베리스리제를 이용했지만 말이다.
“편성표를 확인할 수 없다. 거슬리니 비켜라.”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
주위 구경꾼들이 다급히 물러섰다.
대치하고 있던 루퍼스와 베리스리제도 움직임을 멈췄고, 고르트도 입을 다물었다.
나도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낸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
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푸른색 장발의 남자.
청색 2반의 신동, 하인리히 아그리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