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동시에 잡는다 (4)
“이번 진지전, 놀라운 결과가 나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2개 학급이 공동 1위, 나머지 4개 학급이 공동 꼴찌라니.”
진지전이 끝난 뒤, 교수들은 결과를 확인하고 혀를 내둘렀다.
이 결과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색 2반이 백색 5반의 진지를 괴멸한 뒤, 이어서 적색 1반의 진지도 함락해 버렸고…….”
“흑색 6반도 황색 3반과 녹색 4반의 깃발을 다 꺾어 버렸죠.”
“청색 2반도 흑색 6반도 깃발을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한편 나머지 4개 학급은 남의 깃발을 하나도 꺾지 못했죠.”
이렇게 일방적인 결과가 나온 건 처음이었다.
“흑색 6반이 황색 3반과 녹색 4반의 협공을 받았을 때는, 금방 함락당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었는데…….”
“예상 이상으로 잘 막아 냈죠. 세리느 바스티안이 맹활약했습니다.”
“세리느 바스티안이 방어를 맡아 준 덕분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공격에 전념할 수 있었던 거겠죠.”
“흑색 6반도 그렇고 청색 2반도 그렇고, 이번 진지전은 앞장서서 돌격한 대표들이 성과를 냈군요.”
“시간 제한이 없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군요.”
원래 순위에 따라 엘릭시르를 차등 지급 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어 버려서, 청색 2반과 흑색 6반에게만 적색 엘릭시르 두 병이 지급될 것이다.
나머지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되면 청색 2반과 흑색 6반이 가장 앞서 나가게 되겠군요.”
“그렇지요. 특히 대표들은 그래듀에이트로서 남들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게 될 겁니다.”
“이제 곧 있을 ‘비무전’이 기대되는군요. 과연 어느 쪽이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둘지.”
청색 2반의 대표와 흑색 6반의 대표.
둘 중에서 누가 더 뛰어난지… 조만간 결판이 날 것이다.
* * *
흑색 6반의 진지는 흥분으로 가득했다.
지난번에서 굴욕을 안겨 준 황색 3반과 녹색 4반에게 빚을 갚아 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황색 3반과 녹색 4반은 흑색 6반의 진지를 협공했지만, 흑색 6반은 모든 깃발을 지켜 냈다.
그뿐만 아니라 황색 3반과 녹색 4반의 깃발을 모조리 꺾어 버렸다.
서바이벌 훈련에서의 굴욕을 완전히 되갚아 준 것이다.
“아, 에르나스 님!”
“대표님이 오셨다!”
내가 진지에 들어서자, 여러 학생들이 나한테 달려들었다.
“다들 진지를 지키느라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혼자서 공격에 나선 에르나스 님이 가장 고생하셨죠.”
“에르나스 님이 상대편의 대표들을 해치워 주시지 않았다면, 결국 이쪽 진지도 함락당했을 겁니다.”
나를 둘러싼 학생들 너머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세리느가 보였다.
그녀도 기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한테 달려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세리느 님, 뭐 하고 계세요.”
“크, 클로에?”
그때 클로에가 세리느의 손을 끌어당겨 나한테로 데려왔다.
“에, 에르나스.”
클로에가 등까지 떠밀어서, 결국 세리느는 나하고 마주 보게 되었다.
“수, 수고 많았어요. 지난번 일을 설욕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에르나스 덕분이에요.”
“아니, 나 혼자 힘으로 한 일이 아니야.”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진지를 잘 지켜 줬기 때문이지. 특히 세리느, 너를 믿고 맡기길 잘했어.”
“아, 아니요. 그냥…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에요.”
세리느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뭔가 더 말을 건네주려 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비올라가 튀어나왔다.
“에르나스 님, 저도 엄청 활약했는데 칭찬해 주셔야죠!”
“그래그래, 잘했어.”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닌가요?!”
비올라도 지난번 서바이벌 훈련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클로에나 슈미츠에 비해 양호한 편이었다.
원래 몸이 튼튼해서 회복력도 빠른 편이라, 이번 진지전에서는 주된 전력으로 활약했을 것이다.
“에르나스 님, 저는 세리느 님의 참모 역할을 잘했는데 칭찬 좀 해 주세요. 비올라 님보다는 더 성의 있게.”
“젠장, 이번에 나는 거의 활약을 못 해서 칭찬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군…….”
클로에와 슈미츠의 말을 듣고, 대답해 주기 위해 입을 열려 했을 때.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에르나스 님, 왜 그러세요?”
“아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남쪽 산등성이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푸른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학생이었다.
“……!”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2개 학급의 진지를 유린한… 청색 2반의 대표였다.
“설마… 청색 2반의 신동?”
세리느도 눈치챈 듯했다.
“왜 저쪽에… 설마 우리 쪽 진지도 공격할 생각이었을까요?”
“글쎄, 시간 여유가 있었으면 이쪽으로 쳐들어왔을 수도 있겠지.”
“제한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때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던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청색 2반의 대표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대항전에서도 백색 5반에게 패배했잖아요.”
“이유가 있었어요, 비올라 님.”
비올라의 의문에 클로에가 답해줬다.
“대항전에서 청색 2반의 대표는 직접 나서지 않았다고 해요.”
“네?”
“다른 학생들에게 모든 걸 맡긴 뒤, 본인은 후방에서 지켜봤다고 하더군요. 한 번도 검을 휘두르지 않고요.”
“아, 아니, 왜 그런 짓을 했던 거죠?”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대항전에서 승리하면 첫 번째 엘릭시르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녀석은 대항전에서 청색 2반이 패배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건, 여기서 나 하나뿐일 것이다.
“다른 학생들의 수준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내가 입을 열자, 다들 내 얼굴을 쳐다봤다.
“쓸 만한 인재가 있는지, 백색 5반과의 시합을 통해 확인하려 했던 거지.”
“쓰, 쓸 만한 인재요?”
“그래, 본인이 직접 나서면 오늘처럼 독무대가 되어 버리니까, 뒤로 빠져 버리고 다른 학생들한테 기회를 준 거야.”
신동과 영재의 대결을 기대했던 교수들에게는 아쉬운 전개였다.
결국 청색 2반은 백색 5반의 레스터에게 패배했다.
“그러다가 엘릭시르를 못 얻으면 너무 손해인 거 아닌가요?”
“저 녀석에게 그런 건 그다지 중요치 않아. 적색 엘릭시르 하나를 받든 안 받든, 오차 범위 안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엘릭시르를 얻을 기회는 앞으로도 많다.
나는 기초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빨리 마력을 획득해야 하지만, 저 녀석은 아니다.
첫 엘릭시르가 조금 늦어져도 저 녀석한테는 별 상관 없다.
“저 사람은… 예전부터 그런 측면이 있었죠.”
면식이 있는 세리느가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니라면,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성격이었어요.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도 그랬죠.”
“입학시험이요?”
“저 사람은 입학시험을 중간까지만 치르고 퇴장했어요.”
“중간까지만요?”
“지금까지 획득한 점수만으로도 합격권일 거라고 말이죠.”
“……!”
세리느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학시험에서 종합 1위를 차지한 건 세리느였지만, 만약 그가 시험에 진지하게 임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다.
“엄청나게 재수 없는 사람이네요…….”
비올라가 솔직한 코멘트를 했다.
사실 나도 동감이었다.
‘애초에 그런 녀석으로 설정했으니까 말이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산등성이에 있던 푸른 머리카락의 검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충분히 구경할 만큼 구경한 모양이었다.
‘나를 보러 왔던 거겠지.’
슬슬 나에게 흥미를 가질 만한 타이밍이긴 하다.
소설에서도 이 시점부터 주인공 아칸델에게 관심을 드러냈으니까.
‘청색 2반의 신동…….’
레스터가 퇴학당하고, 고르트는 마력을 잃었다.
루퍼스와 베리스리제는 이제 막 그래듀에이트에 도전하는 수준이다.
그러니 현재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 중에서 예의 주시해야 할 상대는 저 녀석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저 녀석도 같은 생각이겠지.’
청색 2반의 신동.
그에게 걸림돌이 되는 상대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뿐이다.
* * *
공동 1위를 차지한 흑색 6반의 학생들에게는 적색 엘릭시르가 두 병씩 주어졌다.
마력 흡수가 서투른 학생들도 이제 슬슬 그래듀에이트 수준의 마력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력량이 충분하다고 해서 그래듀에이트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마력을 제대로 제어해서 검기를 펼칠 수 있어야 그래듀에이트니까.
지금 시점에서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나하고 세리느는 이미 검기를 쓸 수 있고… 이제 곧 슈미츠, 클로에, 비올라 정도가 검기를 터득하겠지.’
하지만, 검기를 터득했다고 해서 2차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듀에이트로서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상태인지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소설 기준으로 생각할 때, 2차 시험을 처음부터 통과할 수 있는 건 나와 세리느 정도일 것이다.
‘다른 녀석들도 빨리 2차 시험을 통과해 주는 편이 좋긴 한데.’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에는 학년 개념이 없다.
시험을 통과하여 진급하는 것으로 다음 단계의 교육을 받게 되는 시스템이다.
2차 시험을 통과하면 흑색 6반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외부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머릿수가 필요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다른 녀석들이 빨리 진급해 주면 도움이 된다.
다만 마력 제어 같은 건 내가 가르쳐 줄 수 없는 부분이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 주는 걸 바랄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다른 녀석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야.’
2차 시험 직전에도 시합이 있다.
소설과 동일하게 흘러간다면, 나는 그 시합에서 그 녀석과 격돌하게 된다.
‘솔직히 좀 부담스러운데 말이지.’
청색 2반의 그 녀석은 지금 내 실력으로도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다.
검기를 쓰지 못하는 상태라면 그나마 승산이 있었겠지만, 그때쯤이면 그 녀석도 검기를 터득한다.
게다가 소설 묘사대로라면… 그래듀에이트 초입 수준을 훨씬 초월한 전투력을 보여 줄 것이다.
‘그 녀석은 검술을 복사한다고 대항할 수 있는 적이 아니야.’
소설 속에서 주인공 아칸델이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는 상대가 그 녀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한테도 매우 어려운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패배를 각오할 생각은 없지만.’
소설은 소설이고, 나는 나다.
소설 주인공이 패배했다고 해서 나까지 패배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때까지 최대한 준비를 해야 해.’
일단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번에 주어진 엘릭시르를 복용하여 마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나는 기숙사 방에 앉아 적색 엘릭시르 두 병을 연달아 마셨다.
그래듀에이트 하급에 도달한 상태이기 때문에, 소량의 마력만 담겨 있는 적색 엘릭시르라면 한꺼번에 소화 가능하다.
‘징벌동 지하라면 엘릭시르의 마력을 100% 가깝게 흡수할 수 있었겠지만…….’
황족 전용 수련장의 야광초 풀밭에서 마력을 흡수했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효율적으로 마력을 마나 하트에 정착시킬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문제를 일으켜서 징벌동에 갇히는 것도 이상하고,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체념하면서 가부좌를 틀었다.
이곳이 야광초 풀밭은 아니지만, 그때 느꼈던 감각을 되새기면서 마력을 다루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차분히 마력을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마력을 혈맥에서 순환시키는 감각이 지금까지하고는 달랐다.
‘뭐지?’
지금까지는 마력이 어디쯤을 흐르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력이 흐르는 혈맥 하나하나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력이 예전보다 빠르게 내 몸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가슴의 마나 하트에 마력을 몰아넣으면, 마치 처음부터 그곳이 정위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착되었다.
이건 징벌동 지하의 야광초 풀밭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동요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메시지가 연달아 표시되었다.
[동부식 마력연공법(B랭크)의 이해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동부식 마력연공법(B랭크)의 성장과 함께 영구 귀속이 진행됩니다.]
[동부식 마력연공법(A랭크)의 영구 귀속이 완료되었습니다.]
내 소설의 아티팩트가, 또다시 내가 모르는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