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쓰러뜨리기 위한 준비 (1)
지난번에 적색 1반과 대항전을 치렀던 제1실습장.
그곳에서 세리느는 굴욕감을 느끼면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사흘 동안 진행된 ‘야외 서바이벌 훈련’에서 흑색 6반이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에르나스를 대신해서 흑색 6반을 잘 이끌어야 했는데……!’
멀리 보이는 텐트에서는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
부상자는 대부분 흑색 6반의 학우들이었다.
슈미츠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클로에는 손목을 다쳤다.
학우들 중에서 가장 몸이 튼튼했던 비올라조차 야전침대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어이쿠, 혼자서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세리느 양?”
“……!”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리느는 몸을 움찔했다.
갈색 머리카락의 거한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 흑색 6반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임시 대표님이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고르트 발트펠트…….”
황색 3반의 대표, 고르트 발트펠트.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발트펠트 가문의 후계자다.
곰을 연상케 하는 거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파워를 중시하는 북부 스타일의 검사다.
발트펠트 중검술(重劍術)을 펼치면 바위도 부술 수 있다고 한다.
“무슨 일이죠?”
“특별한 일이 없을 때 말을 건네면 안 되나? 응?”
고르트가 천박하게 웃었다.
“가벼운 잡담 정도는 웃는 얼굴로 응해 줘야지. 안 그런가?”
“당신하고 잡담을 나눌 생각은 없습니다.”
세리느가 고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 실습에서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용케도 말을 거는군요.”
“하하, 그런 짓이라.”
이번 실습은 바위로 가득한 섬에서 생존하는 서바이벌 실습이었다.
몬스터나 마교도를 토벌하러 오지에 나갔을 때를 대비한 훈련인데, 약간의 식량만으로 사흘 동안 버텨야 한다.
문제는… 다른 학생에게서 식량을 ‘빼앗는’ 것도 허용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딱히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학생의 식량을 빼앗는 게 규칙 위반인가?”
“시치미 떼지 마시죠!”
세리느는 목소리를 높였다.
“녹색 4반과 작당해서… 우리 흑색 6반을 협공했으면서!”
첫날에는 아무런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새벽이 되자 황색 3반과 녹색 4반이 흑색 6반의 캠프를 습격했다.
불침번은 세워 놓은 상태였지만, 별 의미 없었다.
두 학급의 합동 공격에 흑색 6반 학생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많은 식료품을 강탈당했다.
그 이후 흑색 6반은 식량을 되찾으려 했지만, 서로 연계해서 움직이는 황색 3반과 녹색 4반을 당해 내지 못했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체력이 고갈된 흑색 6반을 기습해 여러 학생에게 부상을 입혔어요! 더 이상 빼앗아 갈 것도 없는데 말이죠!”
“아침에 출출해져서 말이야. 혹시 숨겨 놓은 식량이 있을까 해서 쳐들어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들은 흑색 6반 학생들을 망가뜨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망가뜨리다니, 너무 과장해서 말하는군.”
고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불구가 된 사람이 있었나? 뼈가 부러진 사람이 있었나? 타박상을 입은 사람 몇 명, 손목이나 발목을 삔 사람 몇 명 있는 정도지.”
“그 정도로 쉽게 말할 일이……!”
최소 2주 이상 검을 휘두를 수 없는 부상을 입은 학생들도 있다.
이건 분명 지나친 짓이었다.
“규칙 위반 같으면 교관한테 말하면 어떨까, 세리느.”
“……!”
그때, 쌀쌀맞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화려한 외모를 지닌 금발의 여학생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 당신…….”
“내 말이 틀렸어? 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교관한테 말하라고, 세리느.”
녹색 4반의 대표,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슈라이에르 가문의 후계자다.
고르트와는 대조적으로 스피드를 중시하는 남부 스타일의 검사다.
레이피어로 고속의 찌르기 공격을 하는 슈라이에르 세검술(細劍術)이 특기였다.
“아주 볼만하겠네. 다른 반한테 얻어터졌다고 교관한테 매달려서 징징 짜는 세리느 바스티안의 모습, 너무 꼴사나워서 유쾌할 거야.”
“베리스리제……!”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웃는 베리스리제의 모습에, 세리느는 눈을 치켜떴다.
“어이쿠, 베리스리제의 말이 너무 심하군. 내가 대신해서 사과하지.”
고르트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한쪽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세리느 양, 우리는 몬스터나 마교도와의 싸움을 대비해서 서바이벌 훈련을 한 거야. 이게 만약 실전이었으면 너희는 식량을 빼앗기고 부상을 입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겠지. 아예 목이 날아갔을 거라고.”
“그건…….”
“그래서 교관들도 우리를 제지하지 않은 거야. 이건 그런 훈련이라고.”
얼핏 듣기에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세리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하지만, 결코 납득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열심히 훈련에 임했을 뿐이야.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세리느 양.”
“…….”
세리느가 침통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 때.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이 정말로 열심히 훈련에 임했을 뿐이라면, 저희들도 할 말이 없었겠죠.”
고개를 돌려 보니, 클로에가 손목에 붕대를 감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황색 3반과 녹색 4반은 처음부터 악의를 갖고 저희를 협공했습니다. 열심히 훈련에 임한 게 아니라, 훈련 규칙을 악용해 흑색 6반을 괴롭혔을 뿐이죠.”
“……!”
그 말을 듣고, 세리느는 자신이 납득할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정당한 경쟁 끝에 부상을 입은 거라면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규칙을 악용해 린치를 한 거라면, 세리느가 받아들이기 힘든 부당한 짓이다.
“세리느 님, 이런 궤변을 들어 줄 필요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냥 비겁자들일 뿐이니까요.”
“클로에…….”
“하하, 비겁자라…….”
고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고 있자, 베리스리제가 클로에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누구였지?”
“클로에 유스부르크입니다, 베리스리제 님.”
“아, 유스부르크 자작의 딸인가.”
상대의 ‘작위’를 확인한 뒤, 베리스리제는 흥미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부터 6대 검술명가로서의 자부심이 높은 여자라, 최소 후작 가문 이상이 아니면 제대로 말을 섞으려 하지 않는다.
세리느도 후작 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면 베리스리제와 대화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흠, 클로에 양.”
그 대신 고르트가 앞으로 나서면서 미소 지었다.
“비겁자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제 말이 너무 심했다면 사과드리죠. 하지만 솔직한 감상이니, 철회하지는 않겠습니다.”
“사과는 하지만 철회는 하지 않겠다, 하하.”
고르트가 웃으면서 세리느에게 시선을 향했다.
“참 똑 부러진 여학생이야. 안 그런가, 세리느 양?”
“고르트, 그런 말은…….”
“어이쿠,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칭찬이니까.”
그렇게 고르트가 세리느를 보며 웃고 있자, 클로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비겁자라는 말이 듣기 싫으시다면, 에르나스 님이 있을 때 다시 도전해 주시죠.”
“…….”
클로에의 말에, 고르트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관심 없는 척하던 베리스리제조차 흠칫 하며 클로에를 쳐다봤다.
“에르나스 님이 이번 실습에 참가했다면, 여러분도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봐, 클로에 양…….”
“이번 실습에 에르나스 님이 불참하게 되었다는 걸 알고, 급히 이번 습격을 계획한 것 아닌가요?”
“거참, 웃기지도 않는군.”
고르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 비실이가 있었다면, 우리가 겁먹고 덤벼들지 않았을 거란 얘기인가?”
“아닌가요?”
“물론이지! 그런 찌질한 녀석 정도는 단번에 제압할 수 있다고! 안 그런가, 베리스리제?”
갑자기 지목 당하자, 베리스리제가 몸을 움찔했다.
“그, 그렇지. 그 사기꾼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어. 예전에도 나를 두려워해서 도망 다녔는걸.”
“그래, 에르나스는 나하고의 대련에서도 도망친 적이 있어! 그런 녀석을 내가 두려워할 것 같나?!”
고르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 클로에 양, 방금 발언은 철회하라고. 그냥 넘어가기 힘드니까.”
“그러면, 앞으로 에르나스 님과 직접 대결할 기회가 생긴다면 얼마든지 정면 승부를 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물론이지! 베리스리제도 마찬가지일 거야!”
베리스리제가 왜 멋대로 대답하느냐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고르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방금 전 발언은 철회하도록 하지요.”
“크흐흐, 그래야지!”
“나중에 에르나스 님이 돌아오시면, 고르트 님과 베리스리제 님이 그렇게 의욕을 드러냈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클로에는 대답도 듣지 않고 세리느에게 시선을 향했다.
“세리느 님, 치료도 다 끝났고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시죠.”
“아, 네, 알겠어요.”
고르트와 베리스리제를 내버려 둔 채, 세리느는 클로에를 뒤따라갔다.
뒤에서 뭐라 소리가 들렸지만, 클로에를 따라가느라 대답해 줄 수 없었다.
* * *
“세리느 님은 조금 임기응변에 약하시네요.”
“네?”
“저런 사람들의 도발도 제대로 맞받아치지 못하다니, 그러시면 안 되죠.”
기숙사로 가는 배 위에서 클로에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성격이면 나중에 연애하실 때도 고생하시겠어요.”
“그, 그런 얘기가 왜 나와요?”
“남자가 조금만 예상 밖의 행동을 해도 어버버하면서 얼굴만 붉히고 있겠죠. 연애 관계에서 항상 당하고만 있을 타입이에요.”
“크, 클로에는 연애에 대해서도 잘 아나 보죠?”
“그럭저럭요. 실전 경험은 없습니다만.”
“뭐예요…….”
세리느는 무심코 피식 웃었다.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 표정이 풀려 있었다.
어쩌면 클로에는 세리느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이런 얘기를 꺼낸 걸지도 모른다.
“고르트 님은 세리느 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더군요.”
“네?”
“세리느 님을 보는 눈빛이 음흉했습니다. 저를 보는 눈빛도 별로 건전한 것은 아니었지만요.”
“그, 그럴 리가…….”
“세리느 님은 에르나스 님이 약혼녀로 선택했을 정도의 미녀이시니, 고르트 님이 세리느 님에게 흑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죠.”
“에, 에르나스 얘기는 왜 나오는 건가요. 그리고 제가 미녀라면 클로에도…….”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클로에가 세리느의 말을 끊었다.
“문제는 고르트 님이 호감 가는 여성한테 상냥하게 대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군요. 오히려 여성이 울상을 짓는 모습에 흥분하는 타입 같았습니다.”
“네? 그, 그게 무슨…….”
“세리느 님에 대한 호감을 이용하는 건 어려울 거란 얘기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요?”
“제가 지혜를 짜내야죠. 그게 제 역할이니.”
“클로에…….”
그동안 클로에는 여러 아이디어를 내면서 보좌해 주었다.
세리느가 임시 대표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건 클로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역시 에르나스 님의 힘이 필요한 것 같네요. 황색 3반과 녹색 4반을 동시에 꺾으려면.”
“클로에, 그러면…….”
“황색 3반과 녹색 4반을 각개격파 해 봤자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승리로는 오늘의 상처를 회복할 수 없겠죠.”
“…….”
세리느는 주위를 둘러봤다.
부상을 입은 흑색 6반의 학생들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색 3반과 녹색 4반… 고르트 발트펠트와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를 동시에 꺾는 것만이, 이번 패배를 만회할 방법이에요.”
“…….”
맞는 말이다.
한쪽을 각개격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번 실습과 마찬가지로 양쪽을 동시에 상대해서 승리를 거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쪽을 보며 비웃어 대던 그 사람들에게 진정한 패배감을 안겨 줄 수 없다.
“그러니… 아!”
“왜 그래요, 클로에?”
흑색 6반의 기숙사가 있는 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선착장 쪽에서 사람이 한 명 기다리고 있었다.
“저 사람은…….”
“……!”
누구인지 깨닫고, 세리느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배가 선착장에 닿기도 전에 누구보다 먼저 뛰어내렸다.
“에르나스……!”
구두가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갔다.
자신의 옛 약혼자이자, 흑색 6반을 대표하는 란즈슈타인 가문의 후계자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나스, 왜 이제야……!”
“미안, 일이 좀 있어서 늦어졌어.”
차분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세리느는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남자를… 아카데미에서 가장 든든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러면, 세리느.”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세리느를 향해, 에르나스가 담담히 말했다.
“고르트와 베리스리제를 쓰러뜨리기 위한 준비를 하자.”
세리느와 흑색 6반에게 어떤 말이 필요한지,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