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자객에 맞서다 (1)
징벌동에 갇힌 지 6일째 아침.
나는 야광초 풀밭 위에서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하압……!”
휘리릭!
새하얀 기운이 깃든 칼날이 허공을 수놓았다.
지금 나는 짧은 검을 손에 들고 랭커스터 소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레스터에게서 얻은 랭커스터 소검술의 숙련도는 S랭크… 거의 완벽에 가까워.’
랭커스터 소검술은 변화무쌍한 서부 검술로서 완성도가 높다.
그걸 S랭크의 숙련도로 펼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화려한 기술을 연발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이게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력 사용을 전제로 한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이라면 보다 수준 높은 움직임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이 정도만 되어도……!’
파앙!
검기가 전개된 칼날이 공기를 갈랐다.
이제는 랭커스터 소검술의 각종 기술에 검기를 적용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본래 이건 레스터가 도달해야 할 경지지만… 내가 먼저 도달했다!’
파파팟!
칼날이 요란할 정도로 복잡한 궤적을 그렸다.
이 정도 연속기라면 웬만한 그래듀에이트 초입은 일방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윗단계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듀에이트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엘릭시르를 많이 먹어도 ‘깨달음’을 얻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면 강해질 수 없다.
‘이제 막 그래듀에이트에 진입한 사람을 그래듀에이트 초입이라 부르고… 그다음 단계는 그래듀에이트 하급, 중급, 상급 순으로 이어지지.’
지금 나는 그래듀에이트 하급이라 할 수 있다.
하급이라 하니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바깥세상에서는 인간 흉기 취급 받는다.
흑색 6반의 지도 교관인 안네리제도 그래듀에이트 하급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상급보다 높은 경지를 노려야 하지만… 지금 그걸 생각할 때는 아니지.’
지금은 그래듀에이트 하급을 넘어, 중급에 도달하는 걸 목표로 해야 한다.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징벌동 입구를 지키는 교관도 10년 넘게 벽을 넘지 못하고 하급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니까.
‘가만있자, 슬슬 식사를 할 시간인가.’
매일 아침마다 교관이 하루 치 식사를 가져다준다.
딱딱한 빵과 맹물이 전부지만, 징벌방에 갇혀 있는 신세니 어쩔 수 없다.
‘기숙사로 돌아가면 식당에서 거하게 먹어야겠어.’
물론, 비올라 오리셔스에게 음식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황족 전용 수련장을 뒤로했다.
그리고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사용해 절벽을 뛰어올라…….
“…….”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방금 휘둘렀던 소검을 집어 들었다.
‘올라가자.’
소검을 든 채 절벽을 뛰어올랐다.
마력 사용에 능숙해지니 리히테나워 경신술도 예전보다 훨씬 성능이 좋아졌다.
순식간에 절벽을 오른 뒤, 나는 식사가 놓이는 장소로 이동했다.
“…….”
딱딱한 빵을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억지로 씹어 넘기면서… 나머지 부분은 어둠 속으로 집어 던졌다.
“놀랍군.”
파앗!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빵이 두 조각 났다.
그리고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던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알아냈지?”
“친구한테 사냥감의 은신을 간파하는 법을 배워서 말이야.”
비올라 오리셔스에게서 습득한 오리셔스 수렵술.
이건 서부 계열 은신술에 효과적이다.
게다가 비올라는 무려 A랭크에 도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먼 곳에 숨어 있는 놈까지 알아챌 수 있다.
‘비올라의 최대 재능이었지.’
레스터의 측근인 유세르를 기습할 때도 오리셔스 수렵술을 활용했다.
유세르는 서부 계통 은신술인 ‘브로시안 은신술’을 배웠는데, 설정상 B랭크에 불과하다.
그 정도는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쪽이 사용하는 은신술… 브로시안 은신술이지?”
“……!”
괴한이 흠칫 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유세르보다 뛰어났으니 A랭크 정도 되나 본데, 유감스럽게도 나한테는 A랭크의 오리셔스 수렵술이 있었다.
“대대로 랭커스터 가문을 보좌해 온 브로시안 가문 출신이겠군.”
“네놈…….”
“그러면… 얼마 전에 레스터와 함께 퇴학당한 유세르 브로시안의 아버지, 라지엘 브로시안인가?”
“……!”
반응을 보니 정답인 것 같다.
사실 이 시점에서 모습을 드러낼 만한 브로시안 가문의 자객은 라지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도 브로시안 은신술을 사용해 주인공들을 습격하려 했다가 비올라에게 간파당했다.
“딱 보니 알겠군. 헨리 랭커스터가 나를 죽이라고 보낸…….”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라지엘이 움직였다.
역시 암살자는 암살자다. 기습이 실패했다고는 하나, 내 잡담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여기서 라지엘과 싸우는 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어차피 나중에 싸우게 될 인물이다.
지금 해치워 놔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랭커스터 가문과는 끝장을 봐야 하니까 말이야.’
그렇게 각오하면서, 나는 검을 잡았다.
* * *
‘정말로 놀랍군.’
라지엘 브로시안은 마음속으로 탄복했다.
‘은신술을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내 정체까지 꿰뚫어 보다니, 대체 어떻게 한 걸까.’
그러고 보니 에르나스가 랭커스터 소검술을 썼다는 얘기가 있었다.
랭커스터 내부에 첩자라도 심어 놓은 걸까.
‘조용히 처리하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군.’
입구를 지키던 교관은 바깥에 잠들어 있다.
브로시안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수면 향을 맡았기 때문이다.
20분쯤 뒤에 잠에서 깨어날 텐데, 자신이 깜빡 졸았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빨리 제압한 뒤, 시체를 처리해야겠다.’
에르나스는 그래듀에이트 초입이라고 한다.
벌써 그래듀에이트가 되었다는 건 상당히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고작 초입 정도면 라지엘의 상대가 안 된다.
마력이 부족해 그래듀에이트 하급에 머물고 있지만, 라지엘은 수십 년 동안 암살 임무를 수행해 온 베테랑이다.
이제 막 그래듀에이트에 입문한 애송이 정도는 쉽게 목을 딸 수 있다.
‘나를 원망 마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라지엘은 경신술을 사용했다.
일직선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좌우로 격렬히 움직이면서 적의 시야를 교란한다.
마력 사용에 익숙한 그래듀에이트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어디를 막아야 할지 알 수 없을 거다……!’
에르나스의 방어 자세는 우측으로 치우친 상태.
그걸 간파한 라지엘은 좌측으로 파고들었다.
미끄러지듯이 움직여, 에르나스의 왼쪽 측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에는 검기로 코팅된 단검이 반짝이고 있었다.
“……?!”
파앗!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측을 방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에르나스의 검이, 어느새 좌측을 방어하고 있었다.
‘뭐지?’
라지엘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펼쳤다.
에르나스의 우측 하단이 비어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목덜미로 에르나스의 검이 쇄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자세를 비틀면서 겨우 공격을 피했다.
칼날이 목을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검기의 여파에 피부가 찢어졌다.
‘방금 그건… 랭커스터 소검술의 기만 전법!’
일부러 빈틈을 보이는 것으로 상대를 유인해서 공격하는 전법이다.
물론 라지엘도 에르나스가 랭커스터 소검술을 사용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듀에이트 초입 따위가 그런 전법을 펼쳐도, 나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을 텐데…….’
예를 들어 레스터 랭커스터와 싸운다고 해 보자.
레스터가 일부러 좌측을 비워 두고 있으면, 라지엘은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좌측을 공격할 것이다.
레스터의 움직임보다 라지엘의 움직임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라지엘이 그냥 좌측을 공격해도, 레스터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 빠르게 결정타를 먹일 수 있다.
‘그래듀에이트 초입에 불과한 이 녀석이… 그 정도로 빠르다고?’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라지엘은 다음 공격에 나섰다.
이번에는 단검을 하나 더 뽑아 들었다.
양손을 사용해 현란하면서 신속한 공격을 펼쳤다.
하지만, 에르나스는 그 공격을 모조리 막아 냈다.
‘이 녀석……!’
몸놀림이 빠르다.
라지엘의 공격에 전부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
‘육체 능력인가? 아니, 이건……!’
마력으로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그래듀에이트 초입 수준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그래듀에이트 하급?’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라지엘은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지금까지 에르나스는 적색 엘릭시르 두 개를 먹었을 터.
그것만으로 그래듀에이트 하급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적색 엘릭시르의 마력을 9할 이상 흡수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마나 하트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의 연공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뭔가 이상한 수법을 쓴 게 분명하다!’
라지엘의 머릿속에 ‘마교’의 이름이 떠올랐다.
사악한 수법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그놈들이라면, 에르나스에게 그런 힘을 부여해 줄 수도 있다.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가 마교에 물들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라지엘 브로시안.”
그때, 갑자기 에르나스가 입을 열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그래듀에이트 초입에 불과할 텐데, 어떻게 내 속도에 대응하고 있는 걸까… 하고.”
“……!”
완전히 마음을 꿰뚫어 본 발언에, 라지엘은 흠칫 놀랐다.
“한 가지 알려 주지.”
“무, 무엇을…….”
“나는 그래듀에이트 초입이 아니다.”
동요하는 라지엘의 빈틈을 향해, 에르나스의 검이 쇄도했다.
“이미 나는 그래듀에이트 하급에 도달한 상태니까.”
촤악!
검기가 라지엘의 복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 * *
“크윽……!”
라지엘이 신음하면서 뒷걸음쳤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너무 공격이 얕았다. 역시 베테랑 암살자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군.’
라지엘의 복면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마가 찢어져서 출혈이 심할 뿐이지, 상처는 그리 심하지 않을 것이다.
“젠장……!”
라지엘이 욕설을 내뱉으며 복면을 벗어 던졌다.
얼굴에 흉터가 많은,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얼굴에 상처를 하나 더 늘려서 미안하군, 라지엘 브로시안.”
“닥쳐라……!”
라지엘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네가 그래듀에이트 하급? 마나 하트를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송이가 무슨……!”
“내 발언이 많이 거슬렸던 모양이군, 라지엘.”
아까는 말을 섞지 않고 다짜고짜 달려들더니, 이제는 내 말에 반박을 하고 있었다.
“하긴, 수십 년째 그래듀에이트 하급에 머물고 있으니 답답하겠지. 랭커스터 가문에서 너한테 마력연공법 비전서 하나쯤 읽게 해 주면 좋을 텐데 말이다.”
“뭐, 뭣?!”
“오랫동안 충성을 바쳐 온 부하한테 그 정도 포상조차 안 주다니, 치사한 놈들.”
내 말을 듣고, 라지엘의 얼굴 살이 파르르 떨렸다.
“네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라지엘이 격렬히 분노했다.
“너는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그 순간.
라지엘에게서 거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바닥을 박차면서 동굴 천장까지 뛰어올랐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브로시안 암살검술’의 최종 비기를 펼치려 하는 것이다.
아무에게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제한이 걸려 있는… 중급 그래듀에이트조차 쓰러뜨릴 수 있는 초견즉살(初見卽殺)의 기술을.
‘드디어 쓰는군.’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