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래듀에이트의 길 (5)
“크아악……!”
빗줄기 속에서 레스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검기(劍氣)가 전개된 칼날이 레스터의 오른쪽 허벅지에 파고들고 있었다.
“내, 내 다리……!”
“호들갑 떨지 마라.”
나는 검을 거둬들였다.
마력은 이미 완전히 거둬들인 상태였다.
“다리가 잘려 나간 것도 아니니까.”
“크으윽……!”
레스터가 허벅지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지 단정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방금……!”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레스터가 나한테 따지고 들었다.
“방금, 검기를 쓴 것이냐?! 어떻게 네가 검기를 쓸 수 있지?!”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말도 안 된다! 대체 어떻게……!”
“하긴, 네 입장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
나는 레스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방금, 너는 검기 형성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으니까 말이다.”
“……!”
“기껏 엘릭시르를 먹어서 획득한 마력도 대부분 잃어버린 것 같더군.”
레스터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그, 그래, 랭커스터 가문에서 사전 교육을 받았던 나조차, 검기 형성에 실패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검기 형성에 성공한 거지?”
그렇게 화를 내다가, 레스터가 흠칫 놀랐다.
“설마 네 녀석, 어디서 엘릭시르를 미리 입수한 건가? 그걸로 대량의 마력을 얻어서……!”
“그렇지 않다. 너처럼 지난번 대항전에서 적색 엘릭시르를 하나 얻었을 뿐이지.”
“그, 그러면 나하고 똑같은 마력량인 거 아닌가?!”
“엘릭시르에서 획득할 수 있는 마력량은 사람마다 다르다, 레스터.”
“……!”
레스터가 눈을 크게 떴다.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것이다.
“나, 나는 적색 엘릭시르의 마력을 7할 이상 정착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너는 그보다 더 많이 흡수했다는 건가?”
“그렇지.”
“그, 그럴 리가 없다. 영재(英材)라 불리는 이 레스터 랭커스터조차 7할 정도가 한계였는데, 어떻게 너 따위가…….”
“너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 많다, 레스터.”
“……!”
세리느의 마력 연공법은 아카데미 신입생들 중에서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나는 이 세계의 마력 관련 설정을 모조리 알고 있는 창조주.
그렇기에 적색 엘릭시르의 마력을 90% 이상 정착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슬슬 지혈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출혈량이 상당한데.”
“윽……!”
레스터는 나한테 따지고 드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상처에 응급처치를 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상태면 산을 돌아다니며 교관을 추적하는 건 불가능하겠군.”
“……!”
충분한 마력을 보유한 상태라면 몰라도,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마침 네가 매수한 교관은 이 시험장에 없으니, 곤란하겠어.”
1차 시험에서 탈락하면, 곧바로 퇴학이다.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랭커스터 가문의 후계자, 레스터 랭커스터가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네, 네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너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나를 비난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다, 닥쳐라……!”
하지만, 지금 레스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레스터, 우리는 정당한 결투를 했다. 그리고 네가 패배했지.”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결과를 갖고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인다면… 아버님이 격노하시겠지.”
“……!”
“물론, 네 아버님은 이 패배 자체에 더 격노하시겠지만 말이다.”
아버지를 언급하자 레스터가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등을 돌렸다.
배후에서 비통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자리를 떴다.
* * *
홀로 숲속을 걸으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걸로 레스터는 탈락이군.’
소설 속에 등장하는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 중에서 가장 먼저 탈락하는 것이 레스터였다.
주인공인 아칸델을 밟아 주려 했다가, 결국 역공을 당해 시험에서 탈락하게 된다.
‘이걸로 6대 검술명가 사이의 싸움은 더욱 격렬해지지.’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6각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러 가문들이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게 되고, 랭커스터 가문도 이렇게 몰락할 수는 없다고 발악하게 된다.
결국 피 튀기는 혈전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아카데미 안에서 목숨을 빼앗는 건 안 되지만, 팔다리 하나 정도 잘라 놓는 건 상관없으니 말이야.’
아카데미에서 다른 학생을 죽이게 되면 즉각 퇴학이다.
하지만 목숨을 빼앗지 않으면 아무리 심한 부상을 입혀도 문제 삼지 않는다.
정당한 대결의 결과라면 상대방을 불구로 만들어도 용납해 주는 곳이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였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강해져야 한다.’
나는 남들보다 빠르게 그래듀에이트 초입에 들어섰다.
첫걸음이 빨랐던 만큼, 계속 검기를 수련하면서 능숙해진다면 남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카데미에는 그 녀석이 있으니까 말이야.’
청색 2반의 ‘신동(神童)’.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 중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놈이다.
‘영재’ 레스터와 동격이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주인공인 아칸델조차 능가하는 ‘검술 천재’가 청색 2반의 신동이었다.
‘그 녀석을 쓰러뜨리려면, 지금 상태로는 부족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계속 산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자 작은 계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빗물 때문에 물살이 거세진 상태였는데, 한 여자가 그 물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네리제 교관님.”
“어라, 에르나스.”
안네리제가 졸린 표정으로 하품을 하면서 나를 쳐다봤다.
“에르나스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니, 조금 의외네요.”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랬군요.”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년 1차 시험에서는 사적인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죠. 다른 학생을 아카데미에서 탈락시킬 기회이니.”
그렇게 말하면서 안네리제가 목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면… 시작할까요?”
“도망치지 않으시는 겁니까?”
“에르나스라면 제가 도망쳐도 바로 쫓아오겠죠.”
안네리제는 미소를 지으면서 자세를 잡았다.
“덤벼 보세요. 봐주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 자세를 잡았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교관님.”
오늘 나는 안네리제를 상대로 합격증을 얻어 낸 뒤… 다음 행보에 나설 것이다.
* * *
‘젠장, 젠장……!’
교관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레스터는 몸을 떨었다.
주위에는 다른 부상자들도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너무 굴욕적이었다.
‘내가 1차 시험에서 탈락해서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게 되다니……!’
에르나스에게 패배한 뒤에도, 레스터는 시험을 포기하지 않았다.
측근인 유세르를 깨워서 응급처치를 시킨 다음, 교관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가 벌어져서 출혈이 심해졌고, 체력도 고갈되었다.
레스터는 마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결국 유세르에게 업혀서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랭커스터 가문의 후계자가 탈락했어?”
“지금까지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가 1차 시험을 통과 못 한 적이 있었나?”
“영재라고 불리면서 칭송받더니… 가짜 영재였나?”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레스터는 그냥 개인 자격으로 아카데미에 온 것이 아니다.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랭커스터 가문의 대표로서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이다.
그렇기에 레스터의 탈락은 랭커스터 가문 전체의 망신이다.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들으시면……!’
레스터의 아버지인 헨리 랭커스터는 가문의 명예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인물이다.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 사람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영재’라 불리던 친아들이 아카데미에서 조기 탈락 해 버렸으니… 격노할 게 뻔하다.
‘내, 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
물론 아들의 목을 직접 베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결하라고 요구할 수는 있다.
실제로 가신들한테 그렇게 강요하는 걸 몇 번 봤기 때문이다.
레스터 입장에서는 상상만 해도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젠장, 이게 전부 다… 에르나스 그놈 때문이다!’
공포에 몸을 떨면서, 레스터는 마음속으로 에르나스를 저주했다.
‘그 녀석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런 꼴을 당하는 일을 없었을 텐데……!’
모든 것이 에르나스 탓이다.
레스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를 갈았다.
‘뭔가 이상했어! 무슨 속임수를 쓴 게 분명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이상했다.
유세르의 은신술을 간파한 거라든가, 랭커스터 소검술을 펼친 거라든가, 검기를 펼친 거라든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그래, 생각해 보면 루퍼스 이그니아스를 쓰러뜨렸던 것도 이상했어!’
무슨 부정을 저지른 게 분명하다.
레스터는 점점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돼!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해야 돼!’
레스터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고개를 치켜들고, 깜짝 놀랐다.
이번 1차 시험의 책임자인 ‘염옥검’ 칼레온 이그니아스 교수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레스터 랭커스터.”
“카, 칼레온 교수님!”
레스터는 다급히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붕대로 감싼 허벅지가 아파서 인상을 찡그렸다.
“부상이 심한 것 같군.”
“아, 아닙니다. 약간 긁혔을 뿐입니다.”
“약간 긁혔을 뿐인데 더 이상 시험을 수행하지 못하나?”
“윽…….”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자, 칼레온이 레스터의 허벅지를 응시했다.
“교관한테 들었는데, 칼로 베인 상처라더군.”
“아, 그건…….”
“이상한 일이라서 직접 확인하러 온 거다. 지금 산속에는 날붙이를 든 사람이 한 명도 없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
그 질문을 듣고, 레스터는 칼레온이 왜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탈락한 자신을 조롱하러 온 줄 알았는데, 이번 시험의 책임자로서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 같았다.
“그게…….”
“사실대로 말해 봐라.”
“그러니까, 검기…….”
그 순간.
레스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카, 칼레온 교수님!”
레스터는 다리의 통증도 잊고 몸을 일으켰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진검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녀석이 저를 진검으로 찌른 겁니다!”
이건 묘수였다.
에르나스는 지금 진검을 소지하고 있다.
진검을 몰래 들고 다니는 건 교칙 위반이니, 들키면 처벌받을 수밖에 없다.
에르나스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는 것이다.
“목검으로 위장한 검입니다! 녀석이 갖고 있는 검을 조사하면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 검은 원래 레스터의 것이다.
그래도 지금 에르나스가 진검을 들고 다닌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점을 잘 파고들어, 에르나스가 무거운 처벌을 받게 만들어야 한다.
‘어리석은 녀석! 내 검을 탐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심지어 에르나스는 진검으로 다른 학생을 다치게 만들었다.
잘하면 퇴학 처분도 가능할 것이다.
“칼레온 교수님! 저는 비록 아카데미를 떠나야 하지만, 그런 놈이 버젓이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더 다치게 전에 어서…….”
“이상한데.”
그때 칼레온이 레스터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에르나스의 얘기하고 다르군.”
“네?”
“방금 전, 하산한 에르나스가 자수했다.”
“자수……?”
자수.
그게 무슨 뜻이더라.
“진검으로 다른 학생을 다치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소검 한 자루를 우리한테 제출하더군.”
“네……?”
“다른 학생이 숨기고 있던 진검을 압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나, 잘못을 저지른 게 사실이니 처벌을 받겠다고 했다. 고개를 숙이면서 말이다.”
“…….”
“자네는 에르나스가 진검을 숨기고 있다고 했는데, 정작 에르나스는 자진해서 진검을 제출하더군. 이상하지 않나?”
레스터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슈페르트 공방(工房)의 검이 탐나서 빼앗아 간 게 아니었나?
어째서 그걸 자진해서 제출한 거지?
처벌을 받을 위험성도 있는데?
‘에르나스… 대체 너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거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던 걸까.
도저히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건 바로…….
“아무래도 자세한 조사가 필요할 것 같군.”
“카, 칼레온 교수님…….”
“만약 조사 과정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드러날 경우… 랭커스터 가문에 통보하도록 하겠다.”
“……!”
레스터 랭커스터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