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래듀에이트의 길 (3)
연무장에서의 설명이 끝난 뒤, 학생들은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지난번 대항전은 호수 위의 바위섬에서 진행되었지만, 1차 시험은 호수 바깥에서 치러진다.
호수 옆에 솟아 있는 커다란 산이 바로 시험장이었다.
“오랜만에 호수 바깥으로 나왔네요, 에르나스 님.”
배에서 내리면서 클로에가 말을 걸어왔다.
“기껏 호수 바깥으로 나왔는데, 금방 섬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아쉽네요.”
“그러면 좀 더 있지 그래?”
“후후, 그러면 시험에서 탈락해 버리죠.”
1차 시험은 시험장에서 교관을 찾아내 공격을 명중시키기만 하면 합격이지만, 시간 제한이 있다.
24시간 안에 합격증을 받지 못하면 탈락인 것이다.
교관들도 어느 정도 봐주긴 하지만, 그래도 매년 적지 않은 숫자의 탈락자가 나온다.
“마음만 같아서는 에르나스 님 곁에서 딱 붙어서 움직이고 싶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네요.”
“무리지어 행동하는 건 반칙이니까 말이야.”
이번 시험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찾아낸 교관을 단체로 둘러싸고 공격하면 바로 탈락이다.
혼자서 찾아내서 혼자서 공격하는 게 원칙이기 때문에, 우연히 두 사람 이상이 교관을 동시에 발견했을 경우에는 학생들끼리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산이 워낙 크기도 하고, 쉽지 않아.’
소설 전개를 위해 내가 직접 설정한 거긴 하지만… 정말 한숨이 나는 시험이었다.
이걸 통과 못 하면 퇴학이라니.
‘소설 속 에르나스는 미리 교관을 매수하여 1등으로 통과했지만 말이야.’
소설 내용을 떠올리며, 나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시작 위치로 향했다.
이윽고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고, 1차 시험이 시작되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에르나스 님!”
흑색 6반에서는 슈미츠가 가장 앞장서서 뛰어 들어갔다.
이어서 세리느와 클로에, 비올라도 산으로 들어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사실 처음부터 열심히 뛰는 건 비효율적이야.’
나무 사이를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협공을 금지하는 규칙 때문에, 기껏 교관을 발견해 놓고 다른 학생과 다투는 상황이 빈번히 일어나지. 그러는 사이 교관이 도망가 버릴 수 있어.’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아칸델이 이런 상황과 연달아 조우했다.
다른 사람들이 한발 앞서 시험을 통과하는데, 혼자서만 산속에서 한참 동안 헤매게 된다.
그러던 도중… 레스터의 습격을 받는 것이다.
‘레스터는 6대 검술명가도 아니면서 두각을 드러내는 아칸델을 경계했지. 일찌감치 손을 써서 퇴학시키려 한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세계에 아칸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내가 레스터의 표적이 되었다.
‘레스터와 싸우는 건 새벽 시간이 좋아. 그동안 쓸데없이 힘을 뺄 필요는 없지.’
나는 작은 동굴 하나를 찾아냈다.
소설 속에서는 아칸델이 비올라와 함께 토끼를 구워 먹으면서 허기를 채웠던 장소다.
‘여기서 좀 쉬어 볼까.’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베개 삼아, 동굴 안에 드러누웠다.
때가 될 때까지 나는 여기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 * *
‘에르나스, 이 자식……!’
숲속을 걸으면서 레스터는 이를 갈았다.
방금 전, 연무장에서 지적당했던 게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칼레온 이그니아스한테……!’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이그니아스 가문의 가주, ‘염옥검’ 칼레온.
그는 단상 위로 올라오자마자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라!’라고 호통을 쳤다.
경쟁 가문의 가주한테 그렇게 혼났으니 얼굴이 빨개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에르나스 때문이다! 그놈이 악수를 오래 끌어서……!’
에르나스는 칼레온의 호통과 거의 동시에 레스터의 손을 놓아 줬다.
하지만 에르나스는 칼레온의 호통을 들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냔 말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거친 발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자, 뒤에서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스터 님, 진정하십시오.”
“유세르, 네가 감히……!”
평소 레스터의 시중을 드는 여학생, 유세르였다.
그녀는 레스터를 따라 아카데미에 입학한 오랜 측근이었다.
“여기서 흥분하시면 에르나스의 함정에 빠지는 겁니다.’
“……!”
유세르의 말에 레스터는 발을 멈췄다.
“함정이라고?”
“에르나스가 왜 거기서 그런 악수를 했겠습니까? 레스터 님을 흥분하게 만들기 위해 함정을 판 겁니다.”
“설마… 단상 위로 칼레온이 올라와서 호통을 칠 것도 예상했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에르나스도 교직원 몇 명 정도는 매수해 뒀을 것이다.
이번 시험의 지도 교수가 불같은 성격의 칼레온이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에르나스도 이번 시험에서 레스터 님을 공격할 생각인 겁니다. 그래서…….”
“그만.”
레스터는 유세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더 이상 말 안 해도 된다.”
“레스터 님…….”
“에르나스 그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교활한 놈인 것 같군.”
까드득.
레스터는 이를 갈았다.
“나를 흥분시킨 뒤, 산속 어딘가에서 불의의 기습을 하려는 생각이겠지.”
“네,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하지만, 이미 내가 눈치챈 이상 그렇게는 안 될 거다.”
눈을 부릅뜨고 레스터가 말했다.
“유세르, 내 검은 갖고 왔겠지?”
“갖고 왔습니다.”
유세르가 허리에 찬 검에 손을 댔다.
목검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레스터가 가져온 진검이 들어 있다.
교관한테 들킬 경우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레스터가 아니라 유세르가 소지하고 다녔다.
“계속 내 주위를 맴돌면서 정찰을 해라. 만일 에르나스가 기습해 오면…….”
“역으로 에르나스를 기습한 뒤, 상황을 봐서 레스터 님에게 검을 넘기겠습니다.”
충성스러운 대답을 들으며 레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는 떨어져라. 몰려다니는 모습을 교관에게 들키면 경고를 받으니까.”
“알겠습니다, 레스터 님.”
유세르는 고개를 숙인 뒤 바로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대대로 은신술을 수련한 가문 출신이라, 이렇게 모습을 숨기면 레스터도 찾기 어려웠다.
‘이건 내 함정이다, 에르나스.’
아무것도 모른 채 에르나스가 접근해 오면 유세르가 움직일 것이다.
에르나스의 돌진 공격이 아무리 뛰어나도, 유세르가 사각에서 기습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틈을 이용해 레스터가 공격에 나서면 충분히 에르나스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검을 사용해서…….’
레스터는 이번 기회에 에르나스의 힘줄 한두 개 정도는 끊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악수 따위로 굴욕을 준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해 주마.’
그렇게 다짐하면서, 레스터는 주먹을 꽉 쥐었다.
* * *
“흐엑? 에르나스 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비올라……?”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을 떠 보니, 비올라 오리셔스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설 속 전개처럼 이 동굴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마침 잘 왔어. 배고프던 참이었거든.”
“네?”
비올라가 손에 들고 있던 토끼를 다급히 숨겼다.
“이, 이건 제 저녁거리로…….”
“나도 저녁 못 먹었는데.”
“에르나스 님의 저녁은 에르나스 님이 직접 챙기셔야죠!”
“너 지난번에 내가 먹을 스테이크 다 가져가서 먹었잖아.”
“그 빚은 지압을 해 드려서 갚은 걸로 아는데요?!”
“설마 그걸로 다 갚았다고 생각했어? 지금 이자도 많이 쌓인 상태야.”
“고, 고리대금업자?”
투덜대면서 비올라가 동굴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휴, 알겠어요. 조금 나눠 드릴게요.”
“그래, 준비 잘해라.”
나는 하품을 하면서 비올라가 모닥불을 피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비올라도 남작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일단 귀족 영애다.
하지만 오리셔스 가문은 북부 설원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다니는 게 생업이라 이런 일도 능숙했다.
“자, 다 익었어요.”
비올라가 모닥불에 구운 토끼 다리 하나를 내밀었다.
살을 베어 먹으니 닭고기 비슷한 맛이 났다.
“맛있네.”
“호, 혹시 더 필요하신가요?”
“아니, 됐어. 나머지는 네가 먹어.”
“에헤헤… 다행이다.”
비올라가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토끼 고기를 뜯어 먹었다.
언제 봐도 잘 먹는 녀석이다.
“그,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혹시 저한테 흑심이…….”
“전혀 흑심 없으니까 괜한 기대 하지 마.”
“너무하셔라.”
내가 냉정하게 말하자 비올라가 울상을 지었다.
“저, 정말로 흑심 없으신 거 맞아요? 보름 전인가? 그때도 제 몸을 만지셨잖아요.”
“이상하게 표현하지 마. 검술 자세 교정해 준 거였잖아.”
“그래도 1분 가까이 제 손목을 잡고 있었잖아요. 솔직히 많이 두근거렸다고요.”
“흑심은 너한테 있었군.”
솔직히 말하면, 다른 마음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올라에게서 능력을 복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올라.”
“네?”
“너희 오리셔스 가문의 수렵술은… 숲속에 숨어 있는 사냥감을 찾는 데 유용하지?”
갑자기 내가 던진 질문에 비올라가 눈을 깜빡였다.
“네, 그렇긴 한데… 교관님들 찾는 것에는 별 도움이 안 될걸요. 지형지물을 이용해 은신하고 있는 마물들을 찾을 때 사용하는 거니까.”
“그건 알고 있어. 그냥 확인한 거야.”
“……?”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비올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젠장, 에르나스 이놈, 대체 어디 간 거지?’
레스터는 산속을 걸으며 두리번거렸다.
지금까지 여러 학생과 마주쳤지만, 에르나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10시간 넘게 유세르와 함께 에르나스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에르나스가 벌써 시험을 통과한 건…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나오면 교관이 큰 소리로 호명해 준다.
지금까지 에르나스의 이름이 울려 퍼진 적은 없었다.
‘교관을 잡는 것도 포기하고 놈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아까부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껴 있는 걸 보니, 조만간 비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비를 맞는 걸 싫어하는 레스터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젠장, 일단 어딘가에서 비를 피해야겠어.’
어디 적당한 동굴 같은 게 없을까.
레스터는 유세르를 불렀다.
“유세르, 잠시 나와 봐라.”
은신술로 몸을 숨기고 있는 유세르를 불러내,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으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유세르?”
레스터는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레스터도 유세르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는 한, 유세르의 은신술을 간파하는 건 불가능하다.
“……!”
털썩!
나무 위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레스터는 다급히 뒤돌아 봤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유세르!”
유세르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게다가…….
“에, 에르나스?!”
에르나스가 나무 위에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려왔다.
정황상 에르나스가 유세르를 기절시킨 것으로 보였다.
“네, 네 녀석, 어떻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세르의 은신술은 레스터도 간파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에르나스가?
“어떻게 유세르를 찾아낸 거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냥꾼도 아닌데!”
“글쎄, 사냥꾼의 기술을 익혔을지도 모르지.”
“또 나를 놀리는 거냐, 에르나스……!”
목소리를 높이는 레스터 앞에서, 에르나스가 몸을 숙였다.
그리고… 유세르가 허리에 차고 있던 목검을 집어 들었다.
“……!”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에르나스는 목검 안에 숨겨져 있던 진검을 꺼냈다.
“에르나스! 당장 그 검에서 손을…….”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레스터 입장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네놈, 네놈……!”
어느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레스터는 비를 싫어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 자세… 네놈, 대체 어디서 훔친 거냐?!”
랭커스터 소검술(小劍術).
랭커스터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소검 전투술의 자세를… 에르나스가 완벽하게 선보여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