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래듀에이트의 길 (2)
엘릭시르를 복용한 뒤, 나는 수련에 집중했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별다른 사건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몸을 움직여 체력 단련을 했고, 마력을 제어하는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체술 수업 시간에 오래 달리기를 해도 힘이 부치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마력을 활용하면 육체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어. 이제는 체력 고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에르나스는 워낙 체력이 형편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단기전을 해야만 했다.
세리느와 싸울 때도, 슈미츠와 싸울 때도, 루퍼스와 싸울 때도, 나는 빠르게 싸움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제는 장기전도 소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 시작될 1차 시험은 장기전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시험을 진행한다.
그중 첫 번째 시험은 장시간 동안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에르나스의 저질 체력으로는 위험했다.
‘소설처럼 비겁한 계략으로 넘어갈 수는 없으니,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단련해야 했던 거지.’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1차 시험에 도전하면 된다.
* * *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다른 섬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흑색 6반의 담당 교관인 안네리제가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그곳에서 기본적인 설명을 들은 뒤, 다 함께 1차 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이동하게 될 것입니다.”
1차 시험.
그 단어에 여러 학생들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대항전과는 달리, 1차 시험은 탈락할 경우 명백한 페널티가 있기 때문이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1차 시험은 아카데미에서 진행되는 모든 시험 중에서 가장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탈락자는 ‘앞으로 아카데미를 다닐 자격이 없다.’라는 판단하에…….”
“…….”
“퇴학 처리가 됩니다.”
퇴학 처리.
각자의 목표를 가슴에 안고 아카데미에 들어온 학생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페널티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1차 시험만큼은 통과해야 했다.
“1차 시험은 적색 1반부터 흑색 6반까지 모든 학생들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다른 반 학생들도 시험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할 테니, 여러분도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적색 1반, 청색 2반, 황색 3반, 녹색 4반, 백색 5반, 흑색 6반.
이렇게 여섯 학급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배가 도착했군요. 탑승하도록 합시다.”
“네……!”
우리는 배에 올라탔다.
넓은 호수 중앙으로 이동해, 아카데미 본관이 있는 섬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입학식을 치렀던 대형 연무장이 있었다.
“…….”
연무장에는 다른 반 학생들이 전부 집합해 있었다.
우리가 마지막 6반이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 순서로 입장한 것이다.
“이쪽에 정렬합니다. 에르나스, 학생들을 부탁해요.”
“네, 교관님.”
안네리제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흑색 6반의 대표인 내가 가장 앞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 서 있던 백색 5반의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군.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인가?”
단정한 외모를 지닌, 은색 머리카락의 남성.
사람을 깔보는 듯한 녹색 눈동자를 비롯해, 모든 모습이 내 소설 묘사 그대로였다.
“그런 것 같군, 레스터 랭커스터.”
레스터 랭커스터.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랭커스터 가문의 후계자로서, 백색 5반의 ‘영재(英材)’.
그와의 첫 대면이었다.
‘물론,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단순한 성격이었던 이그니아스 가문의 루퍼스와는 달리, 레스터는 교활하고 계산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 측면을 보면 소설 속 에르나스와 가장 가까운 성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 대항전에서 루퍼스 이그니아스를 꺾었다고 들었는데.”
레스터가 녹색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루퍼스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을 텐데 말이야.”
“너야말로 청색 2반의 ‘신동(神童)’을 꺾었다고 들었다만.”
청색 2반의 신동, 백색 5반의 영재.
입학 시점에서 가장 주목받던 두 사람이다.
“흐음, 그건…….”
레스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조금 정정해야겠군. 대항전에서는 우리 백색 5반이 이겼지만, 내가 청색 2반의 대표를 꺾은 건 아니야.”
“그런가?”
“그래, 청색 2반의 명찰은… 대표가 아니라 다른 학생이 차고 있었으니까.”
“그건 몰랐군.”
이건 거짓말이다.
나는 레스터가 결국 청색 2반의 신동을 꺾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의도적으로 이 얘기를 꺼내서 레스터의 신경을 긁은 것이다.
“그 녀석하고는 나중에 결판을 내면 되니까, 상관없지만 말이다.”
레스터가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어쨌든, 에르나스… 나는 지난 대항전 결과를 듣고 꽤 놀랐어. 적색 1반의 루퍼스가 이길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이 많은 것 같더군.”
“솔직히 에르나스 자네는… 실력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레스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째서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궁금했었어.”
“실력이 형편없어서 감추는 거라고 생각했나 보군.”
“하하, 미안하군.”
“미안해할 건 없어.”
나는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실력이 부끄러워서 감추고 있었던 거니까 말이야.”
“농담도 잘하는군.”
“정말이야. 형편없는 실력을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
“…….”
실제 에르나스의 실력이 형편없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레스터는 자신을 놀린다고 받아들인 듯했다.
“그런 말을 해 봤자 소용없어, 에르나스.”
레스터의 녹색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루퍼스를 쓰러뜨린 시점에서, 자네가 대단한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는 게 이미 드러났으니 말이야.”
“글쎄다.”
“무서운 돌진기를 펼쳤다더군. 험준한 지형을 아랑곳하지 않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뒤, 일격에 루퍼스를 쓰러뜨렸다던데.”
“그걸 어디서 들었지?”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자네도 아카데미 내부 사람들을 꽤 회유해 둔 상태 아닌가?”
“…….”
에르나스가 아카데미 교직원 몇 명에게 돈을 뿌려 놓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소설 속에 상세히 적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먼저 그들에게 접촉할 수는 없다.
어차피 내가 작가로서 알고 있는 정보가 있으니, 굳이 필요 없지만 말이다.
“북부의 고르테스 돌격검술인가? 아니면 남부의 에들리안 암살검술? 어느 유파의 검술일지 참 궁금하군.”
“…….”
레스터는 내가 어떤 검술을 썼는지 알아내려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그동안 잘 숨겨 왔으니 굳이 여기서 밝히고 싶지 않겠지. 약점을 공략당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의미심장한 말이군, 레스터.”
나는 레스터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내 약점을 공략해 볼 심산인가?”
“하하, 그런 말은 안 했어.”
레스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만… 이번 1차 시험은 학생들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있단 말이지.”
“…….”
“자칫하면 다른 학생의 방해 때문에 1차 시험에서 탈락할 수도 있어.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1차 시험은 넓은 산속에 흩어져 있는 아카데미 교관들을 잡는 시험이다.
학생들은 교관을 찾아서 공격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공격을 명중시키면 합격증을 준다.
하지만 교관들은 계속 움직이면서 도망다니고 있고, 순순히 공격을 맞아 주지도 않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다른 학생의 방해를 받는다면 난이도는 더 올라가게 된다.
“가장 쉬운 시험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쉽다는 얘기지.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게 되면 시험을 통과 못 할 수도 있어. 실제로 그런 사례가 그동안 종종 있었다고 하고. 그러니…….”
“자칫하면 아카데미에서 쫓겨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얘기군.”
나는 레스터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충고해 줘서 고맙다. 새겨듣도록 하지.”
“흐음…….”
레스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기껏 열심히 겁을 줬는데, 전혀 통하지 않아서 불쾌감을 느낀 것이다.
“자네는 재미있는 사람이야, 에르나스.”
“그렇게 평가해 줘서 고맙군.”
내가 냉담히 대꾸하자, 레스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백색 5반과 흑색 6반은 시험장에서도 가까운 위치에서 출발할 테니… 마주치게 되면 잘 부탁하지.”
“나야말로.”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레스터에게 다가갔다.
“잘 부탁한다.”
“…….”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 * *
‘이 녀석… 웬일이지?’
레스터는 당혹스러웠다.
지금은 모든 학생들이 연무장에서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 에르나스는 줄을 이탈하면서까지 접근해서 악수를 청했다.
‘흑색 6반 녀석들도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고.’
세리느 바스티안 등의 학생들이 놀란 표정으로 에르나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도발인가?’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악수를 받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
지금 백색 5반 학생들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레스터가 악수를 받아 주지 않는다면, 레스터에게 실망할 것이다.
‘녀석들에게 실망감을 줄 수는 없지.’
레스터는 자신이 6대 검술명가의 정점에 오를 자격이 있는 인물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대범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적색 1반의 루퍼스처럼 폭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복종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
그러니 여기서는 악수를 받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레스터는 슬쩍 단상 위를 살폈다.
이제 곧 1차 시험의 상세한 설명이 시작될 것이다.
교수나 교관들한테 혼나면 망신을 당하게 되니, 빨리 악수를 끝내는 편이 좋다.
“잘 부탁한다, 에르나스…….”
약간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레스터도 줄을 이탈해서 악수를 해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
하지만, 잠시 뒤.
레스터는 당혹감을 느꼈다.
에르나스가… 손을 놓아 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뭐야? 왜 이러는 거지?’
슬쩍 손을 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에르나스가 워낙 강하게 잡고 있어서, 강제로 뿌리치지 않으면 손을 뺄 수 없었다.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곧 행사가 시작될 것 같은데!’
단상 위에 올라오는 교수의 모습을 확인하고, 레스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교수한테 지목당하기라도 하면 큰 망신이다.
‘에르나스! 네놈, 대체 무슨 생각이냐?!’
필사적으로 에르나스를 노려봤지만… 그는 냉담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 * *
‘소심한 녀석.’
레스터가 눈알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 정도가 네 그릇이다, 레스터.’
레스터는 본인이 대범하고 여유로운 두뇌파라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 속의 에르나스에 비하면 한 수 아래다.
에르나스의 계략에 말려들어 당황해하는 장면이 수없이 많다.
‘게다가 남들의 시선을 무척 신경 쓰지.’
지금 레스터는 교수나 교관들에게 지적당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을 터.
하지만 나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한테 혼나든, 내가 원하는 것만 얻어 내면 된다.
[인물 ‘레스터 랭커스터’에 대한 ‘능력 재현’을 시도합니다.]
[인물 ‘레스터 랭커스터’에 대한 이해도가 75%입니다.]
[판정: 성공]
[인물 ‘레스터 랭커스터’의 주요 능력을 획득합니다.]
길게 이어진 악수 끝에, 마침내 능력 재현이 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