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래듀에이트의 길 (1)
‘이것이 영약(靈藥) 엘릭시르…….’
아카데미 측에서 나눠 준 엘릭시르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적색 물약이었다.
엘릭시르에도 등급이 있는데, 적색이 가장 등급이 낮다.
‘이걸 복용하면 마력을 얻을 수 있단 말이지.’
기숙사 1인실에 앉아 나는 엘릭시르 약병을 자세히 살펴봤다.
내가 설정한 것이긴 하지만, 이 물약 한 모금으로 몇 년 동안 수련한 것 이상의 마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대단한 약이니 황실의 권위가 강한 거지만.’
엘릭시르를 제조할 수 있는 건 제국 황실뿐이다.
황실은 인재 양성을 위해 아카데미에 엘릭시르를 제공하며, 검술명가들은 후계자를 아카데미로 보내 엘릭시르를 하사받는다.
만약 후계자를 아카데미로 보내지 않는 가문이 있다면, 그 가문은 마력 획득이 늦어져 도태될 것이다.
‘그러면… 슬슬 먹어 볼까.’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뚜껑을 열고, 적색의 물약을 단번에 들이켰다.
약에서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가짜가 아닐까 하고 의심했을 것이다.
“…….”
나는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세리느한테서 복사한 스킬… 동부식 마력연공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세리느는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우수하지. 그래서 입학하기 전에도 연공법을 터득했다는 설정이었어.’
세리느의 동부식 마력연공법은 B랭크.
이 정도만으로도 적색 엘릭시르의 마력은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아칸델은 연공법을 몰라서 마력을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했지만 말이다.
“…….”
목구멍을 지나 위장으로 흘러 들어간 엘릭시르에서 마력이 흡수되었다.
수분이나 영양분과는 달리, 마력은 몸 속으로 들어가면 금방 흡수된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저절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성질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연공법을 사용하여 제어해야 한다.
‘위장에서 흡수된 마력을… 전신의 혈맥에서 순환시킨다.
마력이 혈맥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가만 내버려 두면 몸 바깥으로 빠져나가지만, 이렇게 해 주면 마치 혈액처럼 체내를 순환하게 된다.
그렇게 순환하는 마력을… 조금씩 심장에 정착시킨다.
‘이걸로… 마나 하트를 만드는 것이지.’
마나 하트.
마력을 축적하는 무형(無形)의 심장.
이 마나 하트를 갖추면 본격적으로 마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래듀에이트가 될 수 있다.
“…….”
눈을 감은 채 계속해서 마력을 제어했다.
마력은 혈맥을 따라 흐르면서 조금씩 내 육체와 동조되었다.
그 마력은 조금씩 심장에 모여들었고, 작은 덩어리를 만들었다.
마력 덩어리가 점점 뚜렷해지면서… 마침내 마나 하트가 생성되었다.
“후우…….”
눈을 뜨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되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세리느보다 훨씬 잘된 것 같은데.’
소설에서 세리느는 적색 엘릭시르에 포함된 마력의 80%를 정착시켰다.
하지만 나는 90% 이상을 정착시킨 상태였다.
세리느와 마찬가지로 동부식 마력연공법 B랭크인데, 더 좋은 성과를 낸 것이다.
‘내가 작가이기 때문일까?’
나는 소설에서 묘사된 각종 심득(心得)을 숙지하고 있다.
그것들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친 걸까.
‘적색 엘릭시르의 마력을 90% 이상… 30%도 정착시키지 못한 아칸델과 비교하면, 훨씬 좋은 시작이야.’
솔직히 내 능력은 아직도 소설 속 주인공인 아칸델에게 못 미친다.
아칸델은 육체 능력이나 전투 감각이 탁월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마력만큼은 확실히 아칸델을 앞서 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동안 나는 소설의 지식과 아티팩트의 능력에 의지해 싸워 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것만으로 안 된다.
나 자신의 기초적인 능력도 향상시켜야 한다.
‘주인공인 아칸델보다 앞서 나가야 해.’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가짜 천재’가 아니라 ‘진짜 천재’로 만들기 위해.
나는 전력을 다해 힘을 기를 생각이었다.
“…….”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다른 학생들도 방 안에서 엘릭시르를 복용한 뒤 마나 하트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나보다 시간이 더 걸리겠지.’
나는 다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기숙사에서 빠져나왔다.
어두컴컴한 바깥으로 나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
마나 하트를 활성화했다.
그러자 마력이 흘러나오면서 혈맥을 따라 퍼져 나갔다.
그 마력을 하체에 집중한 뒤,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펼쳤다.
“……!”
휘익!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속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마력을 하체에 집중시켜 근육의 기능을 끌어올린 결과였다.
‘이런 느낌인가!’
가슴이 설렜다.
게다가 다리에 별다른 부담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상태라면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오래 사용해도 다리에 근육통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내 가장 큰 약점은 체력이었지. 이것도 마력으로 극복할 수 있어.’
에르나스는 체력이 상당히 약하다.
마력으로 육체의 부담을 경감시킨다면, 체력 부족도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가만 있자, 검술도 시험해 보고 싶은데.’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연습용 목검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서 목검을 가져올까 생각했을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에르나스.”
“세리느…….”
세리느도 마나 하트 생성을 마쳤을 것이다.
나처럼 마력을 활용해 보기 위해 기숙사 바깥으로 나온 걸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부탁?”
갑자기 세리느가 나한테 물건을 하나 던졌다.
연습용 목검이었다.
“빨리 마력 사용에 익숙해지고 싶어서요.”
“대련을 하자고?”
“승패를 따지지 않고.”
세리느는 목검을 하나 더 들고 있었다.
내가 기숙사 앞에서 마력을 써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목검을 두 자루 들고 나온 모양이었다.
“어때요?”
세리느가 살짝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내가 거절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목소리였다.
“나야 좋지.”
“흥… 그렇겠죠.”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세리느가 고개를 돌렸다.
소설에서는 속마음을 감추려 할 때 종종 저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부탁하지, 세리느.”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우리는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마나 하트 생성에 성공한 다른 학생들이 바깥으로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 * *
검술 수업 시간.
학관에 나타난 욜스 칼레시우스가 강의실 안을 훑어봤다.
“다들 얼굴 표정이 달라졌군.”
흑색 6반 학생들의 얼굴을 살펴보며, 욜스가 말했다.
“보아하니 다들 마나 하트 획득에 성공한 것 같구나.”
“네, 맞습니다!”
“이제 마력을 다루는 검사가 되었으니, 다들 자신감이 생겼겠지.”
욜스의 목소리는 엄격했다.
“하지만, 자만하지는 마라. 너희는 아직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네……!”
마나 하트를 얻어 자신의 육체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듀에이트가 되려면 마력을 검에 담을 수 있어야 한다.
“마침 얘기가 나왔으니, 오늘 예정했던 수업을 취소하고 그래듀에이트 얘기부터 하지.”
“……!”
욜스가 칠판에 분필로 사람의 몸을 그렸다.
“너희들은 가슴에 마나 하트를 만들었다. 마나 하트의 마력은 혈맥을 타고 전신에 퍼질 수 있지.”
“…….”
“마력을 한곳으로 집중하면 해당 부위의 기능을 끌어올릴 수 있다. 근력을 증강하는 것뿐만 아니라 감각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예를 들어 눈에 집중하면 눈의 기능을 증진할 수 있다.
이건 단순히 시력이 좋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동체 시력도 좋아지고, 어두운 곳에서도 물체를 식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육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나 하트를 만든 사람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욜스가 사람 그림에 검 한 자루를 들려 주었다.
“육체 바깥에 있는 검에 마력을 불어넣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마력이 다 흩어져 버리니까.”
마나 하트를 만들 때는 마력이 체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제어해야 한다.
체외로 빠져나간 마력은 흩어져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력을 검에 담으려면 결국 마력을 체외로 내보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력을 철저히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체외로 내보낸 마력을 칼날에 모으고, 그 마력을 다시 체내로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
욜스가 칠판에 화살표로 마력이 이동하는 방향을 그렸다.
“이것이 바로 그래듀에이트의 경지다.”
“아……!”
“미리 말해 두지만, 너희들의 마력량으로는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마력량이 부족하면 칼날 전체를 마력으로 감싸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좋다.”
소설 속에 묘사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들의 마력량으로는 그래듀에이트에 도달할 수 없다.
“어설프게 칼날을 감싸려고 했다가 마력량이 부족해서 흐름이 끊기면 그 마력은 그대로 주위에 흩어져 버린다. 마력을 잃게 되는 것이지.”
“…….”
“마나 하트에 정착시켰다고 해서 마력이 영원히 자기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아차 하는 순간에 마력을 잃을 수도 있으니,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욜스는 칠판에 글씨를 쓰면서 추가적인 설명을 했다.
하지만 나는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력량이 부족하면 칼날 전체를 감싸지 못해 마력의 흐름이 끊길 수가 있다. 하지만…….’
마력이 부족해도 칼날 전체를 마력으로 감싸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그건 바로…….
‘짧은 칼날을 사용하면, 적은 마력으로도 가능하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짧은 칼날부터 시작하지 않는 건 이유가 있다.
‘이 세계의 검사들은 짧은 검에 익숙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무기에 마력을 전개하려고 하면 실수하기 쉽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건 어느 정도 길이가 있는 한손검이다.
아카데미에서도 그런 검을 기준으로 교육한다.
익숙하지 않은 소검(小劍) 내지는 단검(短劍)으로 시도하면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칫하면 기껏 획득한 마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연습 삼아 시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소설 속 캐릭터 중 한 명을 생각해 냈다.
주요 인물들 중에 ‘짧은 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학생이 있었다.
‘그 녀석의 검술을 획득할 수 있다면…….’
남들보다 빨리 그래듀에이트에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흑색 6반의 섬에서 조금 떨어진 곳.
하얀 지붕의 건물이 세워진 곳에서, 단정한 외모의 남학생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휘두르는 검은 연습용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손검과는 달리 칼날이 짧았다.
“훌륭하십니다, 레스터 님.”
남학생의 단련이 일단락되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학생이 수건을 가져다줬다.
“마력을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 마력이 몸에 잘 깃든 것 같군.”
백색 5반은 지난번 대항전에서 청색 2반을 꺾고 엘릭시르를 얻었다.
그 결과 모든 학생들이 마나 하트의 획득에 성공한 상태였다.
“이제 그래듀에이트에 도전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너무 일러. 아직 마력량이 부족한 상태니까.”
“적색 엘릭시르의 마력을 7할 이상 흡수하셨는데도 말입니까?”
“조금 부족하다. 적색 엘릭시르를 한번 더 복용할 필요가 있어.”
남학생이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검술명가의 권력을 활용해 특별히 반입한, 짧은 길이의 진검을.
“그래도 금방 기회가 올 거다. 머지않아 첫 번째 시험이 있을 테니까.”
“네, 시험을 통과하면 엘릭시르를 받을 수 있지요.”
“거기서 다음 엘릭시르를 얻어, 이 레스터 랭커스터가 누구보다 빨리 그래듀에이트에 도달하면 된다.”
레스터 랭커스터.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랭커스터 가문의 후계자로서,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랭커스터 소검술(小劍術)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실력자.
입학 전부터 ‘영재(英材)’라는 별명으로 불려 온 이 남자가 백색 5반의 대표였다.
“그 이전에… 시험을 이용해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짓밟아 줘야겠지만 말이다.”
아카데미에서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흑색 6반의 대표.
그를 짓밟아 주겠다고 선언하면서, 백색 5반의 영재가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