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신입생 대항전 (2)
신입생 대항전이 열리는 시합장.
그곳에는 관전을 위해 찾아온 교수들이 시합의 감상을 얘기하고 있었다.
“황색 3반이 승리를 거둔 첫 번째 시합은 별로 볼 게 없었지만, 두 번째 시합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역시 백색 5반의 ‘영재’는 대단한 기량을 갖고 있었습니다. 승리를 거둘 만했죠.”
“그래도 청색 2반의 ‘신동’의 활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게 아쉽군요.”
청색 2반과 백색 5반의 시합이 끝나고, 뒷정리도 마무리되었다.
이제 곧 적색 1반과 흑색 6반의 마지막 시합이 시작될 것이다.
“북서쪽에 적색 1반의 배가 도착했군요.”
“남동쪽에도 흑색 6반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기숙사가 있는 섬에서 배를 타고 온 학생들이 상륙하고 있었다.
적색 1반의 대표 루퍼스 이그니아스, 흑색 6반의 대표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앞세운 채.
“드디어 시작되는군요, 칼레온 교수님.”
“크흠, 그렇군.”
아들인 루퍼스가 있는 북서쪽을 쳐다보던 칼레온이, 힐끔 고개를 돌리고 욜스를 쳐다봤다.
“적색 1반과 흑색 6반… 어느 쪽이 이길지, 한번 지켜보자고.”
“…….”
욜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상륙하는 남동쪽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 * *
바위로 뒤덮인 섬.
그 위에 상륙한 루퍼스는 적색 1반의 부하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준비됐나?”
“네, 루퍼스 님!”
그동안 실시했던 지옥 훈련 때문에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기운 빠진 대답을 했다간 루퍼스에게 구타를 당하기 때문이다.
“이미 너희들은 이 시합장의 지형을 숙지한 상태다. 놈들보다 훨씬 유리한 상태이니, 안심하고 공세를 펼치면 된다.”
“네……!”
“좋다. 그러면 작전을 다시 한번 확인하지.”
루퍼스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인원을 둘로 나눈다. 전체 50명 중에서 40명은 공격대가 되어 진격한다.”
“…….”
“나머지 10명은 여기 본진에 남는다. 나도 대기하다가 상황에 따라 대응할 것이다.”
대표인 루퍼스가 달고 있는 명찰을 빼앗기면 적색 1반의 패배다.
하지만 루퍼스가 본진에 대기하는 건 명찰을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공격대가 슬슬 밀린다 싶을 때 참전하여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흑색 6반의 대표인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원래 그렇게 비겁한 녀석이니까.”
“…….”
“굳이 찾아내려고 시합장을 샅샅이 뒤질 필요는 없다. 다른 학생들이 다 쓰러지면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
명찰을 빼앗기 위해 에르나스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그냥 흑색 6반 전체를 제압해 버리면 된다는 것이 루퍼스의 생각이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가장 주의해야 할 건 세리느 바스티안이다.”
“…….”
“만약 세리느 바스티안이 모습을 드러내면 신호를 보내서 나를 불러라. 그 여자만큼은 내 손으로 쓰러뜨리고 싶으니 말이다.”
세리느는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입학시험 수석이라고 해서 가장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루퍼스 입장에서는 거슬리는 존재였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명찰을 빼앗는 건 내가 직접 할 테니, 꼭 나를 호출해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좋다.”
루퍼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오후에 들어서면서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어쩌면 비가 쏟아질지도 모른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됐는데…….”
휘익!
시끄러운 호각 소리가 섬 전체에 울려 퍼졌다.
시합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공격대, 움직여라!”
“네, 루퍼스 님!”
40명으로 구성된 공격대가 일제히 움직였다.
훈련시킨 대로 질서정연하게 대형을 유지하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루퍼스는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밀어붙여서… 승리를 거둔다.’
대항전에서 승리하면 엘릭시르를 얻을 수 있다.
마력을 획득해 그래듀에이트에 가까워져야 다른 검술명가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특히 청색 2반과 백색 5반의 그 녀석들을 제치려면… 여기서 반드시 이겨야 해!’
그러니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따위에게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
그 사기꾼을 짓밟고… 이 대항전에서 승리를 거둬야 한다.
* * *
“양측이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적색 1반이 적극적으로 전진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흑색 6반은 좀 움직임이 느리군요.”
“지형이 험난해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지대에 설치된 관람석에서 교수들은 대화를 나눴다.
지금 여기 있는 교수들은 전부 그래듀에이트다.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장비 없이도 섬 전체를 살펴보는 게 가능했다.
“적색 1반의 루퍼스는 측근들과 함께 시작 지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군요. 흑색 6반의 에르나스는… 어디 있는 거죠?”
“이 위치에서는 각도 때문에 얼굴을 확인하기 어렵군요. 루퍼스처럼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지형적인 이유로 적색 1반 쪽이 더 잘 보이는 상황이었다.
적색 1반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쪽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아, 슬슬 접촉할 듯하군요.”
“적색 1반이 흑색 6반 쪽으로 돌격을 시작했습니다!”
적색 1반의 공격대가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다.
흑색 6반 측은 주춤하면서 다급히 방어 진형을 취했다.
시합용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섬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적색 1반의 기세가 대단하군요!”
“흑색 6반은 제대로 반격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아, 지금 후퇴하는군요! 흑색 6반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흑색 6반이 점차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빠르게 우세를 점한 적색 1반의 모습을 보며, 칼레온 교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도망치는 것밖에 못 하는데요?”
“흑색 6반,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닙니까?”
“자꾸 뒷걸음치다가 호수에 빠지겠군요, 하하하!”
여러 교수가 후퇴하는 흑색 6반을 비웃고 있었을 때.
검술사학(劍術史學) 담당인 마르켈스 교수가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
“마르켈스 교수,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교수들의 주목을 받으며, 마르켈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색 1반의 공세에 밀려서 후퇴하고 있는 것치고는… 대형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있습니다.”
“네? 대형이요?”
마르켈스의 말을 듣고, 교수들이 다시 한번 흑색 6반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계속 뒷걸음치고 있긴 한데, 대형이 잘 유지되고 있군요.”
현장에 있는 적색 1반 학생들은 깨닫기 어렵겠지만, 고지대에서 내려다보는 교수들의 눈으로 보면 확실히 진형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
오히려 흑색 6반을 추격하는 적색 1반 쪽의 진형이 흐트러지고 있는 상태였다.
“상대방의 돌진에 못 이겨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작전상 후퇴인 것 같습니다.”
“작전상 후퇴?”
“마, 마르켈스 교수님, 그렇다면…….”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욜스가 입을 열었다.
“마르켈스 교수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협곡처럼 되어 있는 지형으로 들어가는 흑색 6반의 학생들을 지켜보면서, 욜스가 말했다.
“흑색 6반 녀석들이, 적색 1반을 유인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
“아마 저기에 복병을 숨겨 놓았을 겁니다.”
욜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임이 있었다.
매복해 있던 학생 두 명이 검은색 넥타이를 휘날리며 적색 1반의 배후를 급습한 것이다.
“저건……!”
“세리느 바스티안과 슈미츠 하르트만입니다!”
6대 검술명가 출신들을 제외하면 최고 수준의 실력을 지닌 두 신입생.
그들의 기습과 동시에, 다른 학생들도 후퇴하는 걸 멈추고 공세에 나섰다.
흑색 6반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 * *
우리는 도망치는 척하면서 놈들을 끌어들인다.
아침에 에르나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세리느는 목검을 휘둘렀다.
‘에르나스의 작전이 옳았어!’
적색 1반의 공격대가 적극적으로 전진해 오면, 방어에 치중한 진형을 유지한 채 조금씩 후퇴한다.
멋모르고 쫓아오는 적색 1반 학생들을 협곡처럼 움푹 파인 지형까지 끌어들인 뒤… 매복해 있던 세리느와 슈미츠가 기습한다.
이것이 에르나스가 지시한 작전이었다.
“이 자식들, 이런 곳에서 매복을……!”
“윽, 이놈들 왜 이렇게 실력이… 커헉!”
세리느의 정확한 공격에, 그리고 슈미츠의 신속한 공격에 적색 1반의 학생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다른 흑색 6반의 학생들도 클로에와 비올라를 중심으로 반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신호를 보내라! 루퍼스 님에게 이 상황을 알려!”
“루퍼스 님이 오면 역전할 수 있다! 어떻게든 버티면서… 크악!”
이윽고 하늘 높이 여러 색깔의 불꽃이 솟구쳤다.
적색 1반 학생들이 본진의 루퍼스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너, 너희들도 이제 끝이다!”
남학생 한 명이 세리느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소리쳤다.
“우리를 여기까지 유인해서 기습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우리 본진에서 거리가 머니까 말이다!”
“…….”
“루퍼스 님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를 괴멸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루퍼스 님은… 경신술 실력도 매우 뛰어나시니까!”
경신술.
험난한 지형도 빠르게 돌파할 수 있게 해 주는 체술.
“루퍼스 님은 경신술을 사용해 여기까지 순식간에 달려오실 거다! 그리고 너희들을 순식간에 제압하시겠지! 세리느 바스티안, 너조차도……!”
“아니요.”
세리느는 고개를 저으며 검을 휘둘렀다.
바스티안 기사검술의 대표적인 기술인 버티컬 트리니티가 작렬했고, 상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루퍼스가 여기에 도달할 일은 없을 겁니다.”
모든 것은 에르나스의 작전대로 진행될 것이다.
루퍼스가 경신술을 사용해 여기로 달려오는 것 또한, 에르나스의 작전이었으니까.
* * *
“한심한 놈들!”
루퍼스는 혀를 찼다.
남쪽에서 솟구친 불꽃은, 공격대가 매복에 당해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루, 루퍼스 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공격대 놈들이 너무 깊숙이 추격했습니다. 어느새 저렇게 먼 곳까지 들어갔을 줄은…….”
측근들이 당혹스러워했다.
지금 도와주러 가 봤자 너무 거리가 멀어서 제때 도착하기 힘들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가겠다.”
“네? 혼자서 가시겠다고요?”
“위, 위험합니다, 루퍼스 님!”
측근들이 만류하자 루퍼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멍청한 놈들! 너희들과 함께 가면 너무 늦는다!”
“……!”
“어차피 너희 몇 명이 따라오든 말든 큰 차이는 없어!”
방금 신호에 의하면 세리느 바스티안이 기습했다는 것 같았다.
루퍼스가 그녀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금방 전세가 바뀔 것이다.
“지름길을 사용해서 나 먼저 가겠다! 너희들은 알아서 따라와!”
“아, 알겠습니다!”
측근들을 내버려 둔 채, 루퍼스는 경신술을 사용했다.
루퍼스가 사용하는 경신술은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그니아스 경신술이다.
직선적인 움직임에 특화되어 있어, 최단거리로 목적지에 달려가기에 딱 알맞은 경신술이었다.
‘정말 한심한 놈들이군! 유인당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 루퍼스는 바위산을 돌파했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지만, 루퍼스의 경신술 실력이면 미끄러지는 일 없이 전진할 수 있었다.
‘흑색 6반 녀석들, 어느새 이런 작전을…….’
루퍼스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흑색 6반은 시합장의 지도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움직임을 보면 처음부터 지형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대체 어느 놈이 이런 작전을 꾸민 거지? 세리느 바스티안? 아니면…….’
루퍼스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과의 대결에서 핑계를 대면서 도망쳤던, 비겁한 남자의 얼굴이.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놈이……?’
흑색 6반의 대표를 맡고 있는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빗줄기를 가르면서 날아온 목검이, 루퍼스의 측면을 덮쳤다.
* * *
오늘 아침.
나는 다른 학생들에게 이번 작전의 진정한 목적을 설명해 줬다.
적색 1반의 공격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건, 어디까지나 루퍼스를 유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어차피 이번 대항전은 상대방을 전멸시키는 시합이 아니니까 말이지. 대표인 루퍼스 하나만 쓰러뜨리면 돼.’
세리느의 기습으로 공격대가 위기에 빠지면, 루퍼스는 반드시 경신술을 사용해 달려올 것이다.
호위 한 명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그걸 예상할 수 있었기에, 나는 이번 작전을 세웠다.
‘그렇게 홀로 단독 행동을 하는 루퍼스를… 이 포인트에서 기습하는 것이지.’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전력 질주 하는 루퍼스가 반드시 통과할 수밖에 없는 위치.
내가 모습을 숨긴 채 유스부르크 유검술로 목검을 날려 기습할 수 있는 위치.
이곳이 바로 내가 루퍼스를 격파하기 위한 위치다.
“크악……!”
유스부르크 유검술로 날린 목검에 명중당한 루퍼스가 바위 언덕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아무리 루퍼스가 경신술이 뛰어나도, 전력 질주를 하던 도중에 기습당하면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는 상태고 말이다.
“끄으윽……!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바위에서 추락해 피투성이가 된 루퍼스가 살기를 드러내며 솟구쳤다.
유스부르크 유검술로 기습하긴 했어도, 완전히 쓰러뜨리기에는 부족했다.
‘그래도 옆구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걸 보면… 갈비뼈에 금 정도는 생긴 것 같군.’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또 하나의 목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갔다.
높은 바위 위에서 나타난 내 모습을 보고, 루퍼스가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네놈……!”
루퍼스가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그니아스 기사검술’의 자세를 취한 채.
“감히 네놈 따위가, 이 루퍼스 이그니아스를……!”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경신술과 검술을 조합하여… 루퍼스 이그니아스를 꺾는다.’
안네리제에게서 획득한 리히테나워 경신술.
그리고 오늘 아침에 슈미츠에게서 획득한… 하르트만 쾌검술.
두 개의 기술을 조화시키면서, 바위 위에서 몸을 날렸다.
빗줄기를 뚫고, 초고속의 검격(劍擊)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