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검술 천재가 될 소양 (1)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는 바다처럼 넓은 호수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카데미 본관은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섬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본관이 있는 중앙 섬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작은 섬에 와 있었다.
“흑색 6반은 여기로 오는 게 맞지?”
“그래, 주위에도 다들 검은색 넥타이를 하고 있잖아.”
“우리는 가장 북쪽에 있는 이 섬으로 들어오는 게 맞아. 이제 보니 건물 지붕색도 다 검은색이네.”
아카데미 신입생은 6개 학급 중 하나에 배정되며, 학급에 따라 넥타이 색깔이 다르다.
적색 1반, 청색 2반, 황색 3반, 녹색 4반, 백색 5반, 흑색 6반으로 나뉘는데… 나는 흑색 6반이었다.
‘세리느도 흑색 6반이고…….’
추종자들에 둘러싸인 세리느도 근처에 있었다.
하지만 세리느는 내 시선을 느끼자마자 무서운 눈으로 나를 째려봤다.
‘약혼도 취소해 줬는데, 여전히 악감정이 많이 남아 있는 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리느는 오래전부터 에르나스를 혐오해 왔으니까.
‘그런데 아칸델은 역시 없는 건가.’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아칸델도 흑색 6반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아칸델은 없었다.
‘머리색이 특징적이니까 내가 놓칠 리는 없어. 정말로 아칸델이 없는 세계인 건가.’
내 예상대로 이곳은 주인공이 없는 세계다.
에르나스가 새로운 주인공이 되어 스토리를 진행해야 한다.
“다들 주목해 주세요.”
그때 차분한 인상의 20대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흑색 6반의 지도 교관으로서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할 안네리제 그레인저라고 합니다.”
안네리제 그레인저.
흑색 6반을 전담하는 교관으로, 아직 나이는 젊지만 실력은 뛰어난 편이다.
소설 초반에는 꽤 비중이 있는 조연이었다.
“여러분의 입학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앞으로 흑색 6반에서 함께 생활하며 좋은 성과를 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한 뒤, 안네리제가 고개를 돌렸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봐 주시길 바랍니다.”
“……?”
학생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린 순간.
갑자기 쿵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뭐, 뭐야?!”
“다리가……!”
섬에 연결되어 있던 다리가 끊겨 버렸다.
호수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다른 섬으로 건너가는 것도 불가능하게 말이다.
“앞으로 여러분은 이 섬에서 생활하게 될 겁니다. 무단으로 바깥에 나가는 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
학생들이 술렁였다.
아직 10대에 불과한 소년 소녀들 입장에서는 섬에 가둬 놓는다는 게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무단으로 바깥에 나갈 수 없는 대신, 바깥에서의 위협도 차단됩니다.”
그런 학생들을 향해, 안네리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은 대부분 명망 있는 가문의 후계자들입니다. 목숨을 위협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도 많겠죠.”
“…….”
“이곳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각의 섬은 외부인이 드나들 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저희 교직원들이 철저히 경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검술 공부에만 전념하시면 됩니다.”
암살을 두려워해 호위 담당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필요가 없다.
이건 몇몇 가문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얘기겠지만… 별로 호응은 없었다.
“지금 여러분 오른편에 있는 건물이 기숙사이고, 왼편에 있는 건물은 수업이 이루어지는 학관입니다. 기숙사에는 식당과 매점이 딸려 있기 때문에, 웬만한 건 이 섬에서 다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
안네리제가 앞으로의 아카데미 생활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부 다 내가 짜 놓은 설정이니까 말이야.’
심지어 지금 설명하는 내용도 내가 소설에 적어 놓았던 대사와 똑같다.
지금 당장 안네리제가 나를 지목해서 질문을 던져도 유창하게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안네리제의 설명을 듣는 대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안네리제의 검술을 복사하면 어떨까.’
안네리제는 상당히 뛰어난 검사다.
바스티안 기사검술 같은 것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준 높은 검술을 사용한다.
만약 안네리제의 검술을 복사할 수 있다면, 나는 하루아침에 어마어마한 경지의 검술을 터득하게 된다.
‘아니, 소용없는 짓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안네리제의 검술을 복사해 봤자, 나한테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제부터 설명된다.
“거기, 뒤쪽에서 하품하고 있는 여학생.”
“아, 네?!”
안네리제의 지목을 받고, 하품을 하고 있던 보라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이 흠칫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름이 뭐죠?”
“비, 비올라 오리셔스입니다.”
“비올라 양, 아카데미에서 여러분이 1차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게 무엇일까요?”
“앗, 그, 그게…….”
비올라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안네리제는 곧바로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
“그러면… 가장 뒤에 있는, 방금 전까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남학생.”
아무래도 안네리제는 설명에 집중하지 않고 있던 학생들을 지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름이 뭐죠?”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입니다.”
주위가 살짝 웅성거렸다.
그래도 안네리제는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아카데미에서 여러분들이 1차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게 무엇일까요?”
“검의 본질을 깨달아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듀에이트.
영적(靈的) 에너지인 ‘마력’을 검에 담을 수 있는 경지.
아카데미는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니다.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는 교육기관이다.
“잘 대답했어요. 그런데…….”
안네리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응시했다.
“여러분은 아카데미 입학 전에도 검술 수련을 했죠. 그런데 왜 바깥에서는 그래듀에이트가 되지 못했던 걸까요?”
“그래듀에이트가 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문의 어른들이나 가정교사들이 가르쳐 주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뿐인가요?”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듀에이트에게 필수적인… 마력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거죠.”
안네리제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마력은 미약합니다. 그걸 억지로 끌어올려서 사용하려고 하면… 전신의 혈맥이 망가져 영영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몸이 됩니다.”
“…….”
“원래 마력을 검에 담는 건 수십 년 넘게 수련한 ‘소드 마스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죠. 마력은 수련 시간에 비례해서 늘어나니…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여러분이 그 정도 마력을 지닌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내가 안네리제에게서 검술을 복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안네리제의 주력 검술은 마력 사용을 전제로 한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이니까.
그걸 내가 억지로 사용하려고 하면 안네리제 말대로 내 혈맥만 망가진다.
‘이런 제약이 없었다면, 지금 당장 소설 속 실력자들한테 가서 한 번씩 만지고 왔을 텐데 말이야.’
게다가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도 단계가 있다.
수준 높은 검술은 그만큼 요구하는 마력량도 많다.
어떤 검술은 정말 엄청나게 많은 마력을 요구해서, 안네리제 수준의 마력으로 시도했다간 혈맥이 망가져 버린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한 여러분에게는 마력을 획득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안네리제가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그 병 안에 담긴 적색 액체를 보고 다들 탄성을 질렀다.
“저건……!”
“엘릭시르, 엘릭시르다!”
흥분한 학생들 앞에서 안네리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실적을 낸 학생들에게는 영약(靈藥) 엘릭시르가 주어집니다. 이 엘릭시르를 복용하면 마력을 빠르게 향상할 수 있습니다.”
원래 마력은 오랜 세월에 걸쳐 체내에 축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릭시르가 개발되면서 인위적으로 빠르게 마력을 증진할 수 있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도 그래듀에이트 수준의 마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엘릭시르는 제국 황실에서만 생산할 수 있지. 6대 검술명가조차 엘릭시르를 생산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엘릭시르를 받아야 하는 거야.’
결국 이 세계에서 강해지려면 아카데미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최선이다.
엘릭시르를 얻어 마력을 증진한 뒤, 유스레흐트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의 검술을 복제하여 강해지면 된다.
검술에 따라 마력의 요구량이 다르니 단계적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지금 내가 습득한 바스티안 기사검술 A랭크.
세리느에게 얻어 낸 이 검술로 내가 어느 정도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 * *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에… 대표를 정해야겠군요.”
기본적인 설명을 마친 뒤, 안네리제가 웃으면서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흑색 6반을 이끌 대표를 정해야 합니다. 뜻있는 학생이 나서 줬으면 좋겠군요.”
“…….”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추천해도 좋습니다.”
안네리제의 말을 듣고, 여러 학생이 앞다투어 손을 치켜들었다.
“입학시험 수석이었던 세리느 바스티안 님을 추천합니다!”
“세리느 님이야말로 대표에 걸맞으신 분입니다!”
“입학시험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 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님이 좋을 것 같습니다!”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인 에르나스 님이 대표가 되셔야죠! 다른 반도 6대 검술명가가 대표를 맡을 겁니다!”
학생들이 언급하는 이름은 세리느와 에르나스 둘뿐이었다.
다만 차석임에도 불구하고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인 에르나스 쪽이 조금 더 많이 호명되었다.
세리느의 바스티안 가문도 후작의 작위를 지닌 명문가지만…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란즈슈타인 가문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
“흠, 세리느와 에르나스, 두 사람이 추천을 받았군요.”
안네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경우 아카데미에서는 후보들끼리의 대결로 결정하지요.”
투표가 아니라 대결.
검술 아카데미다운 선출 방법이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교관님, 저는 하겠습니다.”
세리느는 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많은 분이 추천해 주셨으니,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이건 세리느에게 좋은 기회였다.
다른 여학생들 앞에서 말한 대로, 에르나스의 진짜 실력을 까발릴 기회인 것이다.
“그러면… 에르나스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
에르나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세리느는 살짝 허를 찔렸다.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대련을 하자고 해도 온갖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었는데.’
그동안 세리느는 에르나스의 진짜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서 몇 번이고 대련을 신청했다.
하지만 에르나스는 매번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그래도 이렇게 에르나스가 대련을 받아들인 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
꿍꿍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력으로 꺾어 주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두 사람의 대결로 흑색 6반의 대표를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히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 주세요.”
결국 세리느와 에르나스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입학시험 수석과 차석, 그것도 약혼 관계였던 두 사람의 대치에 주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대체 어떤 꼼수를 부릴까.’
안네리제가 건네준 연습용 목검을 들고 세리느는 생각에 잠겼다.
에르나스가 익힌 검술은 북부 계통 검술인 ‘아그타스 결전검술’이다.
북부 쪽 검술이 대부분 그렇듯이 강력한 일격을 중요시하는 검술인데, 에르나스의 실력으로는 세리느에게 유효타를 먹이기 어려울 것이다.
‘내 바스티안 기사검술로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어.’
바스티안 기사검술.
정석적인 움직임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동부 검술이다.
세리느는 그동안 바스티안 기사검술을 열심히 수련해 왔다.
에르나스가 변칙적인 전법에 능한 고수라면 몰라도, 아그타스 결전검술을 어설프게 익힌 수준이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러면 에르나스, 슬슬…….”
자세를 취하며 에르나스와 마주 본 순간.
세리느는 눈을 치켜떴다.
“지금 장난치는 건가요?”
“그게 무슨 뜻이지?”
“저하고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잖아요!”
그렇다.
에르나스는 세리느하고 완전히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 그 자세, 바스티안 기사검술이잖아요! 당신은 아그타스 결전검술을 쓰는 거 아니었나요?”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세리느.”
“네?”
“내가 바스티안 기사검술을 쓰지 못한다고 말한 적 있었나?”
“……!”
세리느는 숨을 삼키면서 에르나스를 관찰했다.
에르나스의 자세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팔의 각도도, 허리의 높이도, 세리느의 눈으로 보기에 정말로 완벽했다.
‘설마 나하고 거의 같은 수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언제 바스티안 기사검술을 이 정도 수준까지 익혔단 말인가.
“그러면 세리느.”
에르나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수 가르쳐 줬으면 한다.”
* * *
눈앞에 서 있는 세리느를 보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걸로 최종 점검이다.’
상대는 내가 보유한 바스티안 기사검술의 오리지널인 세리느.
그 세리느한테 바스티안 기사검술을 사용하며 맞선다면, 지금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정말로 세리느 수준으로 바스티안 기사검술을 쓸 수 있게 되었는지, 세리느 본인을 상대로 확인해야 해.’
혼자서는 이미 시험해 봤다.
이제 대인전(對人戰)을 통해 검증해 볼 차례다.
‘근소한 패배 내지는 무승부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이기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아슬아슬한 패배나 무승부 정도라면 내가 정말로 세리느 수준의 검술을 획득했다는 게 증명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무리를 지은 뒤… 천천히 성장해 나가면 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리느와 대치한 채 심호흡을 하고 있었을 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
착각한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 깨달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면서… 나는 침을 삼켰다.
‘이거, 이길 수 있겠는데?’
가짜 천재의 몸으로, 진짜 천재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