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소설 속 가짜 천재가 되었다 (2)
‘이 남자, 대체 뭐야.’
세리느 바스티안은 당혹스러웠다.
‘왜 내 손을 계속 붙잡고 있는 거지?’
악수를 청해서 받아 줬더니 놔주지 않는다.
물론 억지로 손을 빼면 되지만, 그건 귀족의 예법 기준으로 너무 무례한 짓이다.
‘뭐야? 역시 미련이 있는 건가?’
순순히 약혼 취소 서류에 서명을 해 주길래, 정말로 마음을 고쳐먹었나 했는데… 아니었던 건가?
‘역시 이 남자는 신용할 수 없어.’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란즈슈타인 가문의 후계자.
별다른 실적도 없으면서 거들먹거리기만 하고, 진짜 실력자하고는 절대로 검을 맞대려 하지 않는 허풍쟁이.
그리고…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한.
‘약혼을 순순히 취소해 준 것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어렸을 때부터 자주 얼굴을 봤기 때문에, 세리느는 에르나스가 얼마나 교활한 심성을 지닌 인물인지 알고 있다.
이번에도 분명 속셈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든, 나는 결코 넘어가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에르나스의 얼굴을 노려본 순간.
갑자기 에르나스가 세리느의 손을 놓아 줬다.
그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이만 가 봐.”
“네?”
“혹시 다른 볼일 있나?”
“……!”
세리느는 모욕감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에르나스의 냉담한 목소리가 무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없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세리느는 에르나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 * *
세리느가 뭔가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나는 그런 걸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방금 그게 뭐였지?’
홀로 소파에 앉아 왼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반지 형태의 아티팩트 ‘유스레흐트’를 살폈다.
‘분명히… 이상한 메시지가 떴어.’
유스레흐트에는 타인의 능력을 흉내 낼 수 있게 되는 ‘능력 모방’ 기능이 있었다.
하지만 오리지널에 비해 한두 단계 이상 낮은 수준으로밖에 복사가 안 된다는 게 단점이었다.
하지만 방금 ‘능력 모방’이 ‘능력 재현’으로 진화했다는 메시지가 뜨더니 세리느의 바스티안 기사검술 A랭크를 그대로 복사해 낸 것이다.
‘유스레흐트에 이런 기능이 있었나?’
소설에서 나는 이런 설정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런 게 없다고 설정한 적도 없다.
‘가만있자, 방금 분명 이해도가 95%라고 했지?’
가설을 세워 보자.
나는 소설의 창조자로서 유스레흐트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게 95%다.
하지만 유스레흐트에는 내가 모르는 숨겨진 기능이 있었다. 이게 5%다.
어쨌든 95%는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스레흐트의 나머지 5% 기능이 개방되어 ‘능력 모방’이 ‘능력 재현’으로 진화했다.
소설 속의 에르나스한테는 불가능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세리느에게도…….’
세리느의 이해도가 95%라는 메시지가 표시된 뒤, 능력 재현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판정을 했다.
판정은 성공이었고, 세리느의 바스티안 기사검술 A랭크를 온전히 복사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로렐리안 실전검술 C랭크와 동부식 마력연공법 B랭크까지 얻어 버렸다.
‘가만있자, 그러면…….’
나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던 장식용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후우…….”
잠시 심호흡을 했다.
검을 드는 건 처음이다. 묵직한 감각이 낯설었다.
하지만 감이 왔다.
‘할 수 있다.’
휘익!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른 순간, 짜릿한 충족감이 느껴졌다.
‘이건……!’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정확한 풋워크로 위치를 바꾸면서 연속적인 동작을 펼쳤다.
엄숙할 정도로 완벽한 정통파 검술이 지금 내 몸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몸을 크게 비틀면서 연속적인 동작을 펼쳤다.
바람처럼 빠른 3연격이 허공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파파팟!
바스티안 기사검술의 숙련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 버티컬 트리니티.
소설에서 세리느가 즐겨 사용하던 필살기를 완벽하게 재현해 낸 것이다.
“…….”
동작을 멈추고 검을 거둬들였다.
숨이 찼다. 하지만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다.
“정말로… 되잖아?”
나는 전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목검 한번 들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바스티안 기사검술의 정수를 순식간에 터득해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이건 소설 속의 에르나스에게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이 소설의 창조주인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능력을 흡수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소설가로서 내가 생각했던 온갖 기술.
그걸 모조리 내 몸으로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
제국 황실 직속의 교육기관으로, 검술을 숭상하는 이 나라에서 출세하려면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3년에 한 번씩 신입생을 받는데, 다양한 가문의 젊은 검사들이 몰려들어 입학시험을 치른다.
입학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은 가문의 번영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치열한 경쟁에 몸을 던지게 된다.
‘게다가 이번 신입생들은 특별하지.’
올해는 제국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들이 집결했다.
여섯 명의 후계자가 어떤 성적을 거두느냐에 따라 앞으로 6대 검술명가의 서열이 달라질 것이라 예상되고 있었다.
에르나스가 온갖 권모술수를 쓰면서 암약하던 것도 결국 이것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성적은 단순한 필기시험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치열한 싸움으로 정해지는 것이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검술명가의 후계자들과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거둬야 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거대한 호수 위에 세워진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가 보였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다!”
“입학시험에서 차석을 차지한 천재……!”
나처럼 입학을 위해 모여든 학생들이 수군댔다.
이 시점에서 이미 에르나스는 천재라고 소문이 난 상태다.
입학시험에서 자기 재능을 과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실제로 결과를 통해 증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에르나스의 실제 능력이 아니었지만.
‘얼굴도 잘생겼고 가문도 좋지. 주목받을 수밖에 없어.’
시선을 의식하면서 계속 걸어가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에르나스 님!”
“좋은 아침입니다!”
남자 세 명, 여자 세 명으로 구성된 집단이다.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봤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에르나스의 추종자들이다.
에르나스를 졸졸 따라다니는 똘마니들인데, 남자들은 주인공인 아칸델한테 시비를 걸었다가 맨날 얻어터지는 역할이고 여자들은 세리느 등 히로인들한테 시비를 걸었다가 맨날 처발리는 역할이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
“필요 없어.”
“네?”
냉정한 목소리로 쏘아붙인 뒤, 혼자서 걸어갔다.
저 녀석들하고 엮이면 다른 등장인물과의 트러블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소설 속 에르나스처럼 추종자들을 우르르 끌고 다니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성격도 아니고, 굳이 가까이 지낼 필요는 없다.
“에, 에르나스 님……!”
당황해하며 나를 부르는 녀석들을 뒤로하고, 나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우와, 저 도도한 분위기 좀 봐. 저는 저렇게 자신만만한 남자가 좋더라고요.”
“그렇죠? 그냥 평범한 남자가 저런다면 꼴값 떤다는 느낌이겠지만, 에르나스 님이 저러니까 더 멋있네요. 세리느 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꼴값 떠는 걸로만 보이는데요.”
“네?”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심코 본심을 말해 버렸다.
귀족답지 않은 말투를 쓴 것을 반성하면서 세리느는 헛기침을 했다.
“여러분도 에르나스에게 관심이 있으신가 보군요.”
“물론이죠!”
에르나스에게 추종자들이 있는 것처럼, 세리느에게도 추종자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 세리느 곁에 있는 건 주로 귀족 출신 아가씨들뿐이다. 남학생들은 입학시험 때부터 세리느가 쌀쌀맞은 태도를 취한 탓에 함부로 접근해 오지 못하고 있었다.
“잘생기셨고, 가문도 좋으시고, 능력도 뛰어나시니까요!”
“남성미가 부족한 얼굴이고, 가문이 좋다고 해서 본인이 잘난 건 아니고, 정말로 능력이 뛰어난지도 알 수 없고 말이죠.”
“세리느 님, 왜 화를 내시는 거죠……?”
의아해하는 아가씨들 중에서, 남들보다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흑발 소녀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후후, 저는 알아챘답니다.”
“뭘 말인가요?”
“세리느 님은 걱정하고 계신 거죠? 약혼자인 에르나스 님이 너무 인기가 많아서… 다른 여자들이 추파를 던질까 봐 걱정하시는 거잖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 다른 아가씨들이 눈을 반짝였다.
“아, 그렇군요!”
“에르나스 님은 예전에 수도에 있을 때부터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다고 하니까…….”
“소중한 약혼자를 다른 여자한테 빼앗길까 봐 걱정하시는 거네요!”
재잘대는 여자애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리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한심한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어라, 아닌가요?”
“당연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세리느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약혼은 이미 취소했어요. 저하고 에르나스는 이제 서로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네? 그게 무슨…….”
“진짜예요.”
어제 작성한 약혼 파기 서류를 꺼내서 보여 줬다.
“여기 서명 보이시죠? 계약 술식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요. 약혼은 정식으로 파기된 거죠.”
“세, 세리느 님?!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어째서 약혼을 취소하신 거죠?!”
“부모님들은 알고 계신 거예요?”
당황해하는 아가씨들.
“이건 란즈슈타인 가문과 바스티안 가문 사이의 약혼이잖아요. 어떻게 뒷수습을 하시려고…….”
“세리느 님, 아직 늦지 않았어요. 약혼 취소를 취소하세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요. 두 번 다시 저 사람하고 약혼자 관계가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다.
에르나스와 그런 관계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어째서죠? 에르나스 님이라면 최고의 신랑감인데!”
“최고의 신랑감? 대체 어딜 보고?”
“그, 그야…….”
“잘생기고, 가문도 좋고, 능력도 있다고 했죠?”
세리느는 코웃음을 쳤다.
“잘생긴 거하고 가문이 좋은 건 그렇다 쳐도… 능력만큼은 아니에요.”
“네?”
“다들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저 사람은 결코 천재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은 속고 있지만, 세리느는 이미 꿰뚫어 본 상태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가짜 천재다.
세리느는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두고 보세요. 제가 금방 그 사람의 진짜 실력을 까발릴 테니까.”
“……!”
“별것 아닌 남자라는 걸, 여러분한테 보여 드리죠.”
세리느는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