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2화 (2/212)

2화 소설 속 가짜 천재가 되었다 (1)

“서명하세요, 에르나스.”

서류를 내밀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한 건,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였다.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요? 처음부터 당신이 제시한 내기였으니까요.”

단정한 이목구비와 투명한 피부를 지닌, 고귀한 분위기의 소녀.

눈빛과 목소리가 냉정하고 당당하여, 절대적인 자신감을 지닌 귀족 영애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입학시험 결과로 내기를 했어요. 이긴 사람은 진 사람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녀의 이름은 세리느 바스티안.

후작의 작위를 지닌 명문 바스티안 가문의 장녀(長女).

그리고…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재녀(才女).

“당신은 차석이었고, 저는 수석이었어요. 제가 이긴 거죠.”

그녀의 눈빛은 냉정했다.

승부에서 이겼다고 해서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빨리 이 일을 해결하고 싶다는 눈치였다.

“제가 원하는 건 약혼을 파기하는 거예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 이름을 듣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거울을 통해 얼굴을 확인했다.

“…….”

빛을 반사하여 찬란하게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

살짝 창백한 편인 하얀 피부, 날카로운 눈매, 오똑한 콧날.

내가 원래 갖고 있던 얼굴하고는 전혀 다른… 비현실적인 미남자의 얼굴.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 세계의 소설가였던 나는… 내가 쓴 『검술 아카데미의 주인공이 되었다』의 악역 캐릭터,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되어 있었다.

* * *

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담당자와 통화하면서 에르나스 외전 얘기를 한 것과 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원리인지 알 수 없었다.

내 담당자가 자기 뜻대로 사람을 소설 속에 처넣을 수 있는 초월적 존재라도 됐던 걸까.

나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 상태를 보면, 나는 소설 도입부 시점에서의 에르나스가 된 거야.’

세리느의 얘기를 들으니, 지금 시기는 입학시험 직후다.

시험 내용을 미리 입수하고 시험관을 매수하여 차석을 차지한 시점인 것이다.

‘그리고 에르나스는 이 반지의 힘을 사용해 검술 천재로 이름을 날리게 되지.’

지금 에르나스는 오른손에 검은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다.

이건 소설에 나오는 중요한 아티팩트인데, 현시점에서는 란즈슈타인 가문의 극히 일부 사람들만 그 정체를 알고 있다.

이 반지를 끼고 있으면 남의 능력을 모방해서 마치 자기가 처음부터 그런 힘을 지니고 있던 것처럼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

쉽게 말하자면 복사 능력을 부여하는 반지인 것이다.

‘에르나스는 다른 인물들의 능력을 복사하면서, 마치 자기가 다재다능한 천재인 것처럼 속였어.’

하지만 에르나스의 복사 능력은 완벽하지 않았다.

한 단계, 아니 두 단계 낮은 수준으로 모방하는 게 한계였다.

게다가 에르나스 본인의 육체 능력이 워낙 형편없어서, 실전에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에르나스는 교묘하게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의 진짜 실력을 숨겼지만, 결국 정체가 드러나고 만다.

‘거짓 천재’라고 욕을 먹게 된 에르나스는 개과천선하기는커녕 점점 선을 넘는 악행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주인공 일행과의 싸움에서 죽게 된다.

‘그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세리느에게 죽게 되는 거지.’

세리느 바스티안은 에르나스의 약혼자다.

바스티안 가문과 란즈슈타인 가문 사이의 정략적인 약혼이었는데, 세리느는 거만하고 이기적인 에르나스를 싫어해서 약혼을 취소하고 싶어 한다.

‘원래는 에르나스가 세리느에게 흑심을 품고 내기를 제안했던 거지만, 세리느는 그걸 역이용해 약혼을 취소하려 했어.’

정략적인 약혼이지만, 란즈슈타인 가문에서 에르나스가 갖고 있는 권한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약혼을 취소할 수 있다.

하지만 세리느를 자기 아내로 삼고 싶은 에르나스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약혼을 취소해 주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세리느는 에르나스를 더욱 미워하게 되고, 이후에도 이 문제 때문에 계속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세리느의 손에 에르나스가 죽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에르나스의 생명을 위협하는 건 세리느뿐만이 아니야.’

6대 검술명가.

이것은 작중 세계관에서 가장 큰 권위를 지닌 여섯 공작 가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에르나스의 란즈슈타인 가문도 6대 검술명가 중 하나다.

이들은 오랫동안 권력 싸움을 해 왔는데, 아카데미에서도 가문 간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

‘란즈슈타인 가문의 후계자인 에르나스는 다른 가문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어.’

소설 속의 에르나스는 온갖 권모술수로 그 암투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할 것이다.

‘게다가 아카데미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도 있으니… 대체 어떻게 살아남지?’

소설 속에서는 다양한 사건이 발생한다.

심지어 아카데미 전교생이 몰살당할 뻔한 사건까지 있었다.

그것들을 해결한 히어로가 바로 주인공 아칸델이었다.

하지만 아칸델은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칸델은 다른 세계에서 ‘전이’한 인물이라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아칸델이 이 세계에 나타나지 않고, 그 대신 내가 들어온 거라면…….’

담당자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이 세계는 에르나스를 주인공으로 한 if 스토리다.

그렇다면 아칸델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말로 하드 모드군.’

아무런 재능이 없는 몸으로.

수많은 위험 요소에 둘러싸인 채.

주인공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정말로… 어려운 상황이다.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이죠, 에르나스?”

계속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향해, 세리느가 차가운 시선을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약혼 파기 서류를 나한테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

“설마 거부할 생각은 아니겠죠? 라즈슈타인 가문의 후계자로서,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

“알겠다.”

“네?”

나는 세리느에게서 서류를 빼앗았다.

서류에는 난생 처음 보는 문자가 적혀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전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는 용지다.

내가 여기다가 서명하면 약혼 취소가 확정된다.

어딘가에 제출할 필요도 없이.

“여기에 서명하면 되는 거지?”

“네?”

눈을 크게 뜨는 세리느 앞에서 펜을 집어 들었다.

나머지 항목은 이미 세리느가 다 작성해 놓은 상태라 서명만 하면 됐다.

“됐나?”

서명을 한 서류를 앞으로 내밀자 세리느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로… 서명한 거예요?”

“서명하는 거 봤잖아.”

“정말로, 약혼 파기, 해 주는 거예요?”

세리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동안 그렇게 고집을 피웠으면서…….”

“불만인가?”

“불만은… 아니지만.”

“그러면 됐군.”

나는 세리느에게 서류를 건넸다.

“이걸로 약혼이 파기되었군.”

“…….”

약혼 파기 서류를 받아들며, 세리느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냉정했다.

‘이걸로 첫 번째 위험 요소를 제거했다.’

세리느는 소설 속에서 에르나스의 목숨을 빼앗은 존재다.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는 위험 요소였다.

‘안 그래도 세리느는 예전부터 에르나스를 싫어했어. 내가 살아남으려면 세리느와의 관계를 빠르게 청산하는 게 좋아.’

소설 속의 에르나스는 세리느에게 집착하고 있었지만, 에르나스에게 빙의된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다.

세리느와 약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면 다양한 트러블에 휘말릴 수 있고, 이 세계에서 무사히 살아남는 데 방해가 된다.

이런 위험 요소는 처음부터 배제하는 게 맞다.

‘위험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면서… 이 반지를 활용해 힘을 길러야 해.’

나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 ‘유스레흐트’를 응시했다.

불세출의 천재를 연기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타인의 능력을 모방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큰 어드밴티지다.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게다가 나는… 이 세계의 작가니까.’

나는 이 세계를 창조한 작가다.

수많은 설정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으며, 앞으로 이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알고 있다.

그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에르나스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내가 살아남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아무런 재능이 없는 몸으로, 수많은 위험 요소에 둘러싸인 채, 주인공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재능을 모방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써먹으며, 위험 요소를 신속히 제거하고, 작가로서의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소설 속 에르나스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걸로 우리 관계는 끝이다, 세리느.’

솔직히 말하자면, 아쉬운 감정이 있었다.

세리느는 내가 아끼는 캐릭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이야기처럼 세리느와 파트너가 되어서 온갖 사건을 해결해 나가면 좋겠지만… 어려운 상황이다.

괜히 세리느한테 집적대다가 미움받는 것보다는, 그냥 거리를 두는 편이 낫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걸로 우리 관계는 해소되었군, 세리느.”

“아, 네…….”

“마지막으로 악수라도 하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의 세리느를 보면서, 나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계속 저한테 집착했으면서, 갑자기 그렇게 냉정한 표정을 지으니 뭔가 기분 나쁘네요.”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리느가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고마워요. 약혼을 취소해 줘서.”

“약속한 건데 지켜야지.”

“네, 그게 맞죠.”

우리는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이걸로 세리느와의 약혼 관계는 완전히 청산된 것이다.

그리고…….

[인물 ‘세리느 바스티안’에 대한 ‘능력 모방’을 시도합니다.]

내가 의도한 대로, 에르나스의 반지 ‘유스레흐트’가 세리느의 능력을 복사하기 시작했다.

능력을 복사하고 싶은 상대와 직접 접촉하는 것이 발동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세리느는 현재 바스티안 기사검술 A랭크에 도달해 있을 거야.’

바스티안 기사검술.

바스티안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정통파 검술이다.

바스티안 기사검술의 숙련도가 A랭크면 아카데미 신입생으로서는 최상위권의 실력을 가졌다 할 수 있다.

‘유스레흐트의 복사 능력으로 A랭크를 온전히 복사하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C랭크 수준으로 복사하는 건 가능할 터.’

나는 유스레흐트의 설정을 되새기면서 세리느의 손을 잡았다.

소설대로라면 이제 곧 세리느의 검술 능력이 복제되어 나에게 깃들 것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아티팩트 ‘유스레흐트’에 대한 이해도가 95%입니다.]

[아티팩트 ‘유스레흐트’의 잠재 능력이 개방됩니다.]

[아티팩트 ‘유스레흐트’의 ‘능력 모방’이 ‘능력 재현’으로 진화합니다.]

이상한 메시지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물 ‘세리느 바스티안’에 대한 ‘능력 재현’을 시도합니다.]

[인물 ‘세리느 바스티안’에 대한 이해도가 95%입니다.]

[판정: 성공]

[인물 ‘세리느 바스티안’의 주요 능력을 획득합니다.]

[바스티안 기사검술(A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습니다.]

[로렐리안 실전검술(C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습니다.]

[동부식 마력연공법(B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습니다.]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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