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폭우가 쏟아지는 아카데미 메인 광장.
관객 없이 진행되던 처절한 혈투(血鬪)는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세리느가 펼치는 바스티안 기사검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그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이미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아카데미를 장악하고, 6대 검술명가를 제압하여, 제국의 정점에 올라야 할 내가… 천재 검사인 내가, 너 따위 여자한테 쓰러질 수는 없단 말이다!”
“닥치세요, 에르나스.”
세리느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천재 검사 따위가 아닙니다. 아무런 재능도 없는… 가짜 천재였죠.”
위천재(僞天才) 에르나스.
아티팩트의 힘으로 다른 사람의 검술을 훔쳐, 모든 검술에 통달한 천재처럼 행세해 왔던 가짜 천재.
하지만 타인의 검술을 흉내 내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검술이 아니라 권모술수로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르려 했고… 이제는 모든 음모가 발각되어 공공의 적으로 전락해 버린 악당.
“한때 당신의 약혼자였던 사람으로서, 모든 이를 속여 왔던 당신의 죄를 벌하겠습니다.”
“세리느 바스티안!”
절규하면서 에르나스가 검을 세 번 연속으로 휘둘렀다.
바스티안 기사검술의 대표적 기술인 ‘버티컬 트리니티’였다.
하지만, 아티팩트의 능력으로 조잡하게 흉내 냈을 뿐인 검술에 세리느가 당할 리가 없었다.
“소용없습니다.”
“크윽……!”
파앗!
단 한 번의 공격에 에르나스의 기술은 파훼되었다.
에르나스는 검을 놓쳤고, 세리느의 칼끝은 에르나스의 목덜미로 향했다.
“이제 그 거짓된 삶을 끝내도록 하세요, 에르나스.”
“……!”
절망에 휩싸인 에르나스를 향해, 세리느는 마지막 공격을 펼쳤다.
위천재 에르나스의 모든 죄악이… 이 빗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기를 바라면서.
* * *
“메일로 보내 주신 원고 확인했습니다, 작가님!”
원고를 전송한 뒤 휴식을 취하고 있자,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드디어 위천재 에르나스가 죽는군요! 언제 죽나 궁금했었는데.”
“원래 이쯤에서 죽이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걸로 『검술 아카데미의 주인공이 되었다』도 슬슬 종반부에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검술 아카데미의 주인공이 되었다』.
5년 차 웹소설 작가인 내가 연재하고 있는 판타지 소설로, 소위 ‘아카데미물’이라는 장르에 해당된다.
검술을 가르치는 학교에 들어간 주인공이 여러 등장인물과 엮이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로, 지금까지 집필했던 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상업적 성과를 기록했다.
“처음부터 에르나스는 주인공이 아니라 세리느가 해치우게 할 계획이셨습니까?”
“그렇죠. 솔직히 에르나스는 지금의 주인공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약해요.”
“하긴, 공격 한 번에 목이 날아갈 테니까요. 차라리 옛 약혼자였던 세리느가 해치우게 하는 편이 더 재밌겠네요.”
이번 에피소드에서 목숨을 잃게 되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소설 초반부터 등장해 온 대표적 악역이다.
아티팩트의 힘으로 타인의 능력을 흉내 낼 수 있는데, 그걸로 자신이 모든 검술을 다 사용할 수 있는 검술 천재인 것처럼 행세했다.
하지만 본인의 진짜 실력은 형편없었고, 아티팩트의 효과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권모술수에 의존하여 온갖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 에르나스가 자신의 약혼녀였던 세리느 바스티안에 의해 쓰러지는 게 최신 화의 내용이었다.
“솔직히 에르나스가 죽으니까 좀 아쉽긴 합니다. 등장인물 중에 권모술수에 가장 능한 게 에르나스라서, 작품에 긴장감을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 측면도 있지요. 저도 필요할 때마다 잘 써먹었고요.”
“그동안 6대 검술명가 사이에서 암약하면서 두뇌 플레이 하는 게 재밌었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담당자는 에르나스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에르나스는 죽는 게 당연한 캐릭터니까, 어쩔 수 없다.
“작가님, 혹시 완결 후에 외전 쓰실 생각은 없으세요?”
“외전이요?”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일까.
가끔 본편 완결 뒤에 후일담이나 서브 스토리를 추가 연재하는 작품들이 있지만, 나는 그런 걸 써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전혀 생각 안 해 봤는데요.”
“If 루트 같은 건 어떠세요? 본편하고는 다른 전개로 진행되는 스토리 말입니다.”
“아… 다른 전개로 써 보라는 말씀이시죠?”
“에르나스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6대 검술명가를 제압하고 아카데미를 장악하는 스토리,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음…….”
흥미로운 얘기이긴 했다.
다만 별로 현실성은 없는 얘기였다.
“에르나스가 파멸하지 않는 결말로 가려면 아예 처음부터 스토리를 다시 짜야죠. 좀 쉽지 않겠네요.”
“그럴까요?”
“네, 입학할 때부터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야 할 테니까요.”
에르나스는 작품 초반부터 온갖 사람에게 원한을 산다.
그 원한이 존재하는 한, 에르나스는 최종적으로 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니 에르나스를 구제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6대 검술명가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고, 에르나스의 검술 실력은 계속 형편없을 테니, 쉽지 않겠죠.”
“하하, 쉽지 않다고 보시는군요.”
“엄청 하드 모드일 테니까요.”
결국 에르나스는 진짜 천재가 아니라 가짜 천재다.
그런 실력으로 작중의 여러 사건을 헤쳐 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말입니다, 작가님.”
“네?”
“하드 모드니까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으세요?”
“…….”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내가 실제로 ‘에르나스가 파멸하지 않는 이야기’를 집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그냥 잡담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별생각 없이 가볍게 대꾸했다.
“네, 재미있겠네요.”
“그렇죠?”
그 순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대체 이게 무엇일까.
“작가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네?”
“에르나스가 파멸하지 않는 이야기… 어떤 스토리가 될지 정말 궁금하네요.”
서늘한 감각이 더욱 뚜렷해졌다.
알 수 없는 공포심에 휩싸인 채, 나는 다급히 입을 열려고 했다.
“……!”
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거대한 어둠이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상태였으니까.
무수한 검(劍)으로 가득 차 있는, 무시무시한 어둠이었다.
‘설마……!’
어떤 스토리가 될지 정말 궁금하네요.
방금 전에 담당자가 했던 말이 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면서, 나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