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312화 (312/315)

312화

시간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것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여전히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해나가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우진 또한 언제나처럼 앞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우진은 2018년에 이미, 꿈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무려 서울의 강남. 그것도 삼성동 업무지구의 한복판에.

본인이 만족할 수 있을 만한 최고의 설계를 디자인해 내어, 그것을 지어 올리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준공이 되어야 마침표가 만들어지겠지만, 어쨌든 우진이 그 꿈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우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으니까.

[삼성 글로벌 비즈니스 타워, 현재 공정률 56%!]

[SGBC가 삼성 국제 업무지구에 불러올 새로운 바람은?]

[일자리만 5천개? 매머드 급 업무시설 SGBC!]

[천웅건설의 천종걸 회장, “천웅의 이름을 걸고, SGBC를 최고의 건축물로 지어보일 것.”]

[KCA인베스트먼트, 송주빈 이사. 자금 조달 계획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SGBC는 예정보다도 조금 더 빨리 준공될 수 있을 것.”]

하지만 이렇게 사실상 꿈을 이룬 것임에도, 우진은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사실 그것은 당연했다.

꿈을 이뤘다는 것은 그것으로 모든 할 일을 다 했다는 뜻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우진이 그토록 꿈꾸던 무대에 첫발을 디뎠다는 뜻에 가까웠으니까.

누구에게라도 의뢰를 받을 수 있으며, 또 어떤 건축이든 할 수 있는 그런 건축가.

이제 서우진이라는 건축가는 세계적인 건축가 중 한 명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으니 말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아트 갤러리 H 아트센터. 한남동 알짜배기 땅에, 내달 착공 들어가…….]

[H아트센터의 대표 임석호. “최고의 아트갤러리를 디자인해 준 서우진 대표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H아트센터에서 소장할 첫 번째 작품은 ‘서우진의 파빌리온’]

[착공을 앞둔 H아트센터. 그 아름다운 조감도 공개!]

우진은 계속해서 디자인을 했고, 또 계속해서 건축을 하였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리던 과거와 조금은 달랐다.

우진은 이제, 건축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위치한 복합 문화공간 ‘極隆101广场(이하 101광장)’이 2020년 겨울 개관 소식을 전했다.]

[한국의 세계적인 건축가 서우진이 설계한 이곳은 중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컨셉으로 설계‧디자인이 계획되었다 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우진은 “가장 모던하고 가장 절제된 공간”이라는 말로 101광장을 표현하였다.]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수만 평이 넘는 넓은 공간에 지어진 이 건축물은…….]

[한편 건축주 루한(Luhan)은 서우진의 이 건축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현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는 서우진 건축가로부터,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가장 아름다운 광장을 선물 받았다.”]

우진의 활동무대는 이제 더 이상 국내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2018년을 기점으로 아예 글로벌 사업부를 설립한 WJ 스튜디오는, 세계 각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할 정도로 빠르게 사업을 확장해 나갔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당연히 프로젝트의 숫자는 늘어났지만, 그 와중에도 우진은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것은 바로 모든 프로젝트의 컨셉 기획단계에서, 우진이 조금이라도 꼭 참여한다는 원칙이었다.

그래서 회사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진도 계속해서 바빠졌다.

안식년 이후로 손에 쥐고 있던 일들의 많은 부분들을 경영진에게 나누었지만.

이제는 기업경영이 아닌 ‘디자인’이라는 분야 하나만 갖고도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바빠진 것이다.

하여 2021년 봄.

드르륵-

우진이 오늘 이렇게 캐리어를 끌고 인천공항에 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우진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될 신규 프로젝트의 참석을 위해, 스페인행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으니까.

철컥-

우진이 짐칸에 짐을 올리고 좌석에 착석하자, 옆에 앉은 디자인팀장이 창밖을 응시하며 밝게 웃었다.

“날씨 진짜 좋네요, 대표님.”

우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황사도 없고, 하늘 정말 맑네요.”

우진의 옆에 앉은 디자인팀장은, 9년 전 WJ 스튜디오에 인턴으로 입사했던 유수영이었다.

학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부 선배였던 우진을 동경하여 WJ 스튜디오에 지원했고.

그 이후로 WJ 스튜디오와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하며 성장해 온 디자이너 유수영.

우진과 함께 실사를 나가는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해 있던 그 인턴은 더 이상 없었다.

수영은 이제 WJ 스튜디오가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든 인정받고 탐낼만한 뛰어난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수영이 WJ 스튜디오를 떠날 일은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대표님께서 계시는 한, 내가 이직할 이유 같은 건 없겠지.’

WJ 스튜디오는 이제 전 세계를 놓고 봐도 손에 꼽을 만한 최고의 디자인 스튜디오다.

게다가 그녀의 우상이 아직도 현업에서 뛰고 있었으며.

그렇다고 업계 표준보다 연봉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수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바로 뒷자리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스페인이라니!”

그 낯익은 목소리에, 수영이 고개를 돌리며 물어보았다.

“김 주임은 스페인 처음이야?”

“네, 팀장님. 저 지금 너무 설레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창밖을 응시하는 김 주임을 보며, 수영의 머릿속에 잠시 추억이 떠올랐다.

‘나도 저랬던 때가 있었지.’

수영도 회사업무로 해외 출장을 갔던 처음이 분명히 있었고.

그때 출국 비행기에선 김 주임과 같은 마음이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수영은 피식 실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앉았다.

그리고 김 주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김 주임 아마 딱 2주 정도만 지나면 한국이 그리워질걸?”

“네……? 그럴 리가요.”

“스페인에서 소금기 가득한 음식 먹으면서 한 달 동안 도면만 치다 보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에엑……! 내 감성 돌려내요, 팀장님!”

두 사람의 대화에,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우진의 입에서도 실소가 새어 나왔다.

‘김 주임이 많이 들떴네.’

우진은 김 주임의 설렘을 이해한다.

우진을 포함한 일행은 오늘 단순히 해외 미팅을 위해 스페인행 비행기를 탄 게 아니었으니까.

그랬더라면 이렇게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며, 열 명도 넘는 디자인팀 전체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터다.

우진은 수년 전 마테오가 한국에 왔던 것처럼, 프로젝트를 위해 아예 한 달이라는 기간을 잡고 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이것은 스페인의 초대형 복합 문화시설의 설계권을 따기 위한 출장이었다.

“다들 비행기에서 푹 자 둬요. 내일부터는 바쁠 테니까.”

“네, 대표님.”

“히히. 알겠어요, 대표님.”

이번 프로젝트는 SGBC에 어느 정도 비견될 정도의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런 중요한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한 특별 원정대(?)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2년 차 디자이너인 김 주임의 입장에서 충분히 설렐 만한 일.

그와 동시에 이것은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 일이었다.

직원들에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이번에 차출된 인원은 우진이 생각할 때 충분한 실력이 있는 사람들뿐이었고.

뛰어난 디자이너가 수두룩한 WJ 스튜디오 안에서 2년 차가 이번 프로젝트 인원으로 선정됐다는 것은, 꽤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이번 프로젝트까지 따낸다면, 본격적으로 유럽 사업장을 키울 수 있겠지.’

구구구궁-!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우진은 눈을 감고 머리를 의자에 기대었다.

그는 함께 비행기를 탄 다른 직원들만큼이나, 이번 스페인행이 기대되었다.

* * *

관광으로 무척이나 유명한 도시인 바르셀로나 외곽에는, ‘신 업무지구’로 불리는 첨단산업지구가 있다.

과거 ‘혁신지구’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낙후된 공업지역을, 도시재생과 개발계획을 통해 완전히 탈바꿈시킨 첨단산업지구.

마치 신도시처럼 멋들어진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이곳에는 다양한 업체가 입주해 있었고.

그만큼 많은 업무인력이 상주하는 지역이었다.

하루에도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며, 또 수많은 비즈니스 미팅이 이뤄지는 이곳.

그렇기에 이 첨단산업지구에 입점한 카페들은, 대부분 미팅 룸을 가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팅 룸 예약해 뒀는데…….”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제 이름으로 예약한 건 아니고요. ‘EL컴퍼니’ 라는 이름으로 예약했거든요.”

그리고 이곳 카페 엘 노마드(El Nomade)는, 업무지구의 메인스트릿에 있는 가장 큰 카페 중 한 곳이었다.

메인 스트릿의 코너 라인,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있는 모던한 디자인의 신축 카페.

그래서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외부인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미팅을 잡곤 했다.

디자인도 깔끔하고 분위기도 좋은데다, 커피 맛도 나쁘지 않은 카페였다.

“아아! 찾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일찍 오셨네요?”

“네, 어쩌다 보니…….”

하지만 오전 일찍부터 이 카페를 찾은 이 여성은, 이곳 ‘엘 노마드’에 처음 오는 외부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일찍 와서 자리가 없는 건 아니죠?”

캐셔와 대화하고 있는 그녀의 옆으로, 어느새 나타난 점장이 불쑥 끼어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럴 리가요. 종종 이렇게 일찍 오시지 않습니까?”

“아, 점장님. 오늘은 일찍부터 계시네요?”

“오늘은 오후에 일이 있어, 오전 타임으로 나왔습니다. 하하하.”

여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점장이, 메뉴판을 톡톡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미팅 전에 브런치를 하시려고 일찍 오셨지요?”

“네.”

“항상 주문하시던 거로?”

“그렇게 해 주세요.”

주문을 마친 그녀는 직원에게 안내받은 미팅 룸으로 걸어갔다.

또각- 또각-

자리에 앉은 그녀는 작은 노트북을 먼저 세팅하였고, 그 사이 그녀가 주문한 브런치가 나왔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따뜻한 라떼에 치즈가 듬뿍 얹힌 크로크무슈(Croque monsieur)였다.

딸깍-

한 손으로 크로크무슈를 집어 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벽걸이 시계를 확인하였다.

‘미팅까지는 아직 30분 정도 남았고…….’

그런데 그녀가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을 때.

지이잉-

탁자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으응?”

전화 올 데가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화면에 떠오른 발신자 표시를 보고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 시간부터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

“할머니!”

물론 전화가 걸려온 곳은, 지금 이미 저녁 시간일 테지만 말이다.

[그랴, 우리 소연이, 잘 지내고 있지?]

전화를 받은 그녀의 입에서는, 카페 분위기와 이질적인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저야 당연히 잘 지내죠! 우리 할매, 큰 손주 보고 싶어서 전화했구나?”

[그라모. 당연하제.]

“할머니는 몸 좀 어떠세요?”

[할미야 우리 손주들 보고 싶은 것만 빼면 괜찮지.]

“헤헤. 이번 여름휴가 때는 꼭 한국 들어갈게요.”

빵과 커피를 입안에 우겨 넣으면서도, 그녀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오랜만에 듣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너무 그리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번 여름에는 우리 소연이, 이 할미한테 사윗감도 보여주고 하는 거제?]

“아, 할머니는 진짜 맨날…….”

[너 이제 서른이여, 서른! 일이 바쁘고 고될수록, 의지할 배우자가 필요한 거여.]

통화는 역시 여느 때나 다름없는 레퍼토리였지만, 그녀는 이 진부한 이야기도 싫지 않았다.

할머니의 이 이야기 속에는,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가장 많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계를 힐끔 확인한 소연은, 통화를 계속하였다.

미팅 10분 전까지는 전화를 좀 더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가연이 아연이도 잘 있죠?”

[그럼. 가연이는 회사 잘 다니고, 아연이는 학교 잘 다니지.]

“그렇구나.”

[아연이가 눈 퍼런 형부도 괜찮디야. 알겄지?]

“아, 할머니!”

그녀, 소연의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른 시간인 만큼 카페 안은 워낙 조용하였고, 이 안에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그녀뿐.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카페 안에 도드라지게 울려 퍼졌지만, 본인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전화에 집중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왼쪽 어깨로 스마트폰을 받친 채, 미팅에 쓸 PPT를 세팅하기 위해 분주히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었으니까.

“할머니, 나 이제 미팅.”

[그랴, 일 잘 하고.]

“제가 조만간 다시 전화 드릴게요.”

[할미는 우리 큰손주가 최고인 거 알제?]

“알아요. 흐흐.”

그런데 그렇게 할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을 때.

‘음……?’

소연은 뭔가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는 그녀의 옆으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다음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통화, 끝났어?”

그곳에는 그녀가 무척이나 그리워했던, 한 남자가 앉아있었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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