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311화 (311/315)

311화

시간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것들

홍식은 지난 몇 년, 정말 늘어지게 여유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의 나이는, 은퇴할 나이도 한참 지난 연배다.

하지만 은퇴 직후에 청담 선영아파트의 조합장이 됐던 그는,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일해 왔었다.

청담 선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이후에는, 곧바로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조합장으로 몇 년을 더 일했으니까.

물론 그렇게 바쁘게 살아온 것에 후회는 없었다.

은퇴 시점부터 근 10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노년의 열정을 불태운 덕에, 지금의 부유함을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재건축 조합을 이끌면서 투자도 병행한 덕에 자산가치도 수 배 이상 상승하였고.

무엇보다 서울에서 가장 핫한 두 구역의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전적 덕분에, 그의 몸값도 엄청나게 솟아오른 것.

강남 재건축 단지 조합에서 지금까지 홍식에게 보내온 러브콜만 해도 열 곳이 넘을 정도였다.

압구정의 어떤 재건축 단지에서는, 홍식에게 연봉 5억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 정도 연봉을 지불하더라도 홍식의 능력으로 재건축을 몇 달만 앞당길 수 있다면, 결코 아깝지 않은 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홍식은 그 어떤 러브콜에도 응하지 않았다.

돈은 이미 자식들에게 증여하고도 노년을 충분히 호화롭게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였고.

그러다 보니 이제 그에게 돈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준공승인이 떨어진 뒤부터, 홍식은 작정하고 여유로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

우진과 마찬가지로 성수 전략정비구역에서 펜트하우스를 분양받은 홍식은, 우진의 바로 옆 동에 살고 있었다.

‘내가 이런 집에도 다 살아보고……. 역시 인생은 모른단 말이지. 허허허.’

그리고 이렇게 여유로운 자체휴식기를 보내고 있는 홍식에게, 요즘 가장 큰 행복은 바로 두 어린 손자들이었다.

홍식이 성수동으로 이사 온 이후, 손자들이 놀러 오는 빈도수가 배 이상은 늘어난 것 같았다.

큰아들의 집과 좀 더 가까워져서기도 했지만, 이유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부지!!”

“허허, 우리 장군이들, 왔구나!”

펜트하우스인 홍식의 집은 서비스면적으로 제공되는 테라스만 30평이 넘었고.

앞마당처럼 잘 꾸며놓은 그 테라스는 네 살 배기 손자들에게 더 없이 훌륭한 놀이터였던 것이다.

“아버님,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안 했다. 뭐라도 시켜줄까?”

“할부지! 짜장면!”

“그래, 짜장면 먹자. 하하. 애미도 괜찮지?”

“네, 아버님. 좋아요.”

테라스에 놓아둔 푹신한 빈백(Beanbag) 위에 앉은 홍식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손주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업장의 조합장을 맡는 동안 10년은 더 늙어버린 느낌이었다면, 요즘의 여유롭고 행복한 삶은 그를 다시 젊어지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연봉 5억이고 나발이고. 아무리 비싼 돈을 줘도 이렇게 귀한 시간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비싼 연봉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돈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선택한 것에 정말 단 한 번도 후회는 없었다.

“아버지, 이번 추석도 큰아버지 댁에서 쇠기로 한 거죠?”

“아, 그렇지 않아도 얘기하려 했는데, 이번 추석은 성수동에서 쇠기로 했다.”

“네? 아버님 댁에서요?”

“그래. 여기서.”

“큰집에 갑자기 무슨 일 있으세요?”

“형님께서 집 구경 좀 하자고 하시는구나.”

“아하.”

며느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큰아들이 홍식을 향해 물어보았다.

“그럼 올해는 큰아빠가 서울로 올라오시는 거네요?”

“뭐,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사실 어디서 지내든 별 상관은 없으니까.”

“흐흐, 아버지.”

“뭐, 인마.”

“집 자랑하고 싶으셔서, 아버지께서 부르신 건 아니고요?”

“에잉. 자랑은 무슨. 그런 거 아니다.”

여느 때처럼 나른한 주말의 오후.

가을이 성큼 다가와서인지, 테라스에는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이 평화로운 풍경을 감상하며, 홍식은 빈백에 완전히 몸을 뉘였다.

“아버님, 커피 한 잔 내려도 될까요?”

“그래라. 원두 어디 있는지 알지?”

“네, 아버님도 한 잔 드실래요?”

“좋지. 난 따뜻하고 연하게.”

“네에. 조금만 기다리세요.”

시원한 가을바람 속에 반쯤 누워 따뜻한 커피까지 한 잔 마시면,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 아닌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이런 상황에선, 돈 따위보다 이러한 여유와 행복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만족스런 표정으로 잠시 눈을 감은 홍식은, 솔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순간 꾸벅 졸았다.

아마 바지춤에서 진동하기 시작한 스마트폰이 아니었다면, 며느리가 커피를 타오기 전까지 잠시 잠이 들었을지도 몰랐다.

위이잉-!

홍식은 요란하게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꺼내며 투덜거렸다.

‘이 시간에 누구야? 전화 올 사람이 없는데.’

하지만 다음 순간.

[서우진 대표]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음? 서 대표가 어쩐 일로……?’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준공승인이 떨어진 뒤, 우진의 연락이 오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험험.”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일어나 앉은 홍식은, 일부러 조금 큰 목소리로 통화를 시작하였다.

이제 국내에서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유명인인 서우진과의 인맥(?)을, 은근히 아들 내외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허허, 서 대표님. 오랜만이십니다.”

[하하하. 잘 지내셨지요, 조합장님!]

“어허. 이 사람이. 저 이제 조합장 아니잖습니까.”

[뭐, 지금이야 아니시겠지만…….]

“앞으로도 아닐 겁니다.”

[그래요?]

“물론이지요. 조합장 하는 동안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아요.”

[하하하하하.]

오랜만의 통화지만.

그리고 나이 차이가 수십 년 이상 나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유쾌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껄껄 웃고 있었다.

지난 긴 시간 동안 함께했던 사업 파트너였으니, 나이 차이 같은 것은 큰 의미 없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됐던 것이다.

“그나저나 바로 옆 동 사시면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듭니다, 서 대표.”

[저야 워낙 벌려놓은 일이 많잖습니까.]

“그러니까 일도 좀 쉬엄쉬엄하시고……. 아, 서 대표는 아직 열심히 일해야 할 나이긴 하군요.”

[저 이제 서른 넘었습니다, 조합장님.]

“어허, 조합장 아니라니까.”

우진과 통화를 하면서, 홍식은 오랜만에 껄껄 웃었다.

연배로 따지면 작은아들보다도 어린 서우진이었지만, 홍식은 그렇게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던 홍식의 표정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조합장님. 이제 압구정이 대격변을 시작할 겁니다.]

“진짜……. 사업 진행이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성수 전략정비 어떻게 밀어붙였는지 보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함께하셨지요.]

“흐음…….”

[조합장님만 오셔서 저랑 손발 맞춰 주시면, 늦어도 3년 내로는 삽 뜰 수 있을 겁니다.]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홍식은, 저도 모르게 한쪽 뺨을 철썩철썩 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 돼. 절대로 안 돼지. 날 더러 재건축 현장으로 다시 오라고? 이 여유를 버리고?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우진의 말을 듣다 보니, 어느 순간 들썩이기 시작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서 대표님.”

[네?]

“일전에 다른 조합에서 연봉 5억을 불러도 안 갔던 접니다.”

[음…….]

“서 대표는 아직 젊지만, 난 이제 시간이 귀한 나이예요.”

[아직 살아오신 만큼은 더 사셔야 할 텐데요?]

“……?”

[이제 120세 시대 아닙니까. 하하하.]

어처구니없는 우진의 말에 홍식은 순간 말을 잃었고.

그런 그의 귓전으로 우진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연봉 5억 거절했다 하셨지요?]

“…….”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거보다 훨씬 더 많이 드리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뚝-

서우진과의 통화를 마친 홍식은,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거절하기엔, 역시 너무 많은 돈이었다.

* * *

서울 시청 앞에는 푸른 잔디가 깔린 드넓은 광장이 있다.

덕수궁을 서쪽에 끼고 북쪽에는 시청, 동쪽에는 을지로를 끼고 있는.

무려 사천 평 면적의 널찍한 광장.

그리고 2019년 6월 30일.

우진은 오전 일찍부터 이곳에 나와 있었다.

그가 이곳에 나와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에게 초대를 받았으니까.

‘시장님 임기가 벌써 끝날 때가 되다니…….’

이제 잠시 후면 ‘전’ 서울시장이 될, 2010년대의 서울시를 책임졌던 2선 시장 구윤권.

오늘은 8년간 서울시의 시장직을 훌륭하게 맡아 온 구윤권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이었다.

“오, 서 대표. 와줬군요.”

“당연하죠. 어떻게 이런 자리에 초대받고 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하.”

“여튼 정말 감사드립니다. 서 대표께서 제 퇴임식 자리를 더 의미깊은 자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구윤권은 우진의 전생에서와 정확히 같은 날 퇴임하게 되었다.

전생에서도 그랬듯 윤권은 충분히 3선시장이 될 수 있을 만큼 서울시민들의 지지와 신임을 얻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이후의 선거에 더 이상 나서지 않고 임기를 마무리 지은 것이다.

일각에서는 대권을 노리기 위한 포석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것은 억측에 가까웠다.

2019년도의 정세상 실제로 대권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임기를 더 채우는 것이 구윤권에게 유리했으며.

윤권은 일찌감치 더 이상 정계에 발들이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상황이었으니까.

서울 시민들은 그의 이러한 선택을 진심으로 아쉬워하였다.

그가 임기를 지내던 지난 8년 동안, 서울시의 눈부신 발전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어째서 여기서 물러나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무리 맑은 물도, 고이면 썩게 마련입니다.”

“저는 8년의 임기 동안 꿈꿔왔던 대부분의 것들을 이뤘으며, 2020년 이후의 서울시에는 저보다 더 창의적이고 새로운 시장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시의 광장에는,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민들을 향해, 윤권은 마지막 소감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조금은 먹먹한 듯 느껴지기도 하는, 윤권의 단단하고 묵직한 목소리.

“여러분이 계셨기에 서울시가 존재할 수 있었고. 서울시가 있었기에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윤권은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향해, 진심으로 이야기하였다.

“제가 만들고 싶었던 아름다운 서울. 최대한 많은 시민 여러분께 행복한 추억을 남겨드릴 수 있는 도시, 서울.”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윤권은 한 차례 마른침을 집어삼켰고.

그 이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멋진 서울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온 윤권의 소감문이 광장에 천천히 울려 퍼졌다.

그는 준비했던 이야기들을 차분히 이어가면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면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하여 이윽고, 윤권의 시선이 우진에게 도달했을 때.

빙긋-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우진에게 구윤권이라는 사람은, 그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만들어준 최고의 서울시장이었으며.

반대로 윤권에게 서우진이라는 사람은, 그가 꿈꿔왔던 아름다운 서울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 최고의 건축가였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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