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어느 건축가들의 탄생
2018년 1월 1일.
새해를 맞은 석현은, 상당히 기분이 뒤숭숭했다.
‘2018년? 벌써 2018년이라니. 이게 말이 돼?’
그의 기분이 뒤숭숭한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최근 사귀던 여자친구와 두 달도 채 못 사귀고 헤어지게 됐기 때문도 아니었으며, 지난주 애지중지하던 포르쉐 엉덩이에 약간의 기스가 났기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석현의 기분이 꿀꿀한 이유는 한 가지.
‘내가 30대라니.’
그의 나이 앞자리가, 올해부터는 3으로 바뀌기 때문이었다.
“30대 형들은 다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기분이 꿀꿀 해서인지, 아침에도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1월 1일은 공휴일.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날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사실 오늘 그에게 약속이 하나 있긴 했다.
조금 귀찮지만 가야 하는 약속이었다.
꿀꿀한 기분 탓에 집에 콕 박혀있고 싶었지만, 만약 약속에 가지 않는다면 앞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피곤해질 그런 약속이었다.
[헤이, 석현. 10시까지 와야 하는 것 알지?]
“10시? 꼭 그렇게 일찍 가야 해?”
[당연하지. 준공식이 10시에 시작인데, 그럼 대체 언제 오려고 한 거야 Bro?]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걸어 시끄럽게 구는 제이든의 목소리에, 석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30대 아저씨(?)가 된 석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이든 어린이는, 오늘도 한껏 텐션이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 여느 때보다 몇 배는 더 업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오늘은, 내가 이해해 줘야지, 뭐. 신날 만한 날이니까.’
드레스 룸으로 가 깔끔한 세미 정장을 차려입은 석현은, 두꺼운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집을 나섰다.
오늘 그가 가야 하는 곳은 한남동.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제이든이 설계한 첫 건축물의 준공식이 있는 곳이었다.
띵-!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석현은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제이든의 스튜디오가 어찌어찌 굴러가는 게 진짜 신기하긴 하네. 그 천방지축이 회사를 운영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몇 년 전 우진은 제이든의 스튜디오에 꽤 큰돈을 투자하였다.
‘J&S 디자인 스튜디오’라는 이름의, 완전한 신생 디자인 설계사무소.
그리고 이때만 하더라도, 석현은 이 투자에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제이든이 석현의 소울 메이트(?)인 것과 별개로, 또 그의 디자인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과 별개로.
제멋대로인 그가 스튜디오를 잘 운영해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J&S 디자인 스튜디오는, 꽤 근사하게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건축설계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이 전까지 인테리어나 전시설계는 꽤 많이 성공적으로 해낸 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석현은 이렇게 생각했었다.
‘어쩌면 제이든이 동업자를 잘 만난 덕인지도 모르겠네.’
제이든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동기인 선빈.
J&S 디자인 스튜디오를 제이든과 함께 설립한 선빈이라는 존재의 역량이, 제이든의 부족한 부분을 훌륭히 채워주었다고 말이다.
어찌 됐든 그래서 우진의 투자는 성공적인 것이 되었다.
제이든과 선빈은 루키 디자이너로서 훌륭히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었으며.
WJ 스튜디오의 관계사로써 협업도 문제없이 해내고 있었으니까.
‘J&S 디자인 스튜디오’는 어느새, 과거의 WJ 스튜디오처럼 미래가 촉망받는 디자인 설계사무소가 된 것이다.
비록 이곳 스튜디오의 첫 번째 건축 의뢰.
오늘 준공된 이 건물의 건축 의뢰를 맡긴 사람이, 제이든의 어머니였을지라도 말이다.
부릉-
주차장에 내려온 석현이 차에 시동을 걸자, 그의 애마는 여느 때처럼 우렁찬 배기음을 내뿜었다.
텅-!
핸들을 잡은 석현은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하였다.
성수동에서 한남동까지가 지도상으로는 꽤 가까운 편이었지만, 차가 좀 밀릴 것은 각오해야 하리라.
“선물이라도 하나 사 가야 하나?”
전후 사정이 어찌 됐든, 오늘은 석현의 오랜 친구 제이든이 디자이너로서 처음 데뷔하는 날.
그런데 무슨 선물을 사야 할까 고민하던 사이, 어느새 차는 한남동에 도착해 버렸다.
그래서 석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쩔 수 없지 뭐.”
원래 진짜 친한 친구끼리는, 딱히 선물 같은 게 필요 없는 법이다.
* * *
한편, 석현이 그렇게 한남동에 도착했을 즈음.
우진은 그보다 조금 더 먼저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우진의 옆에는 당연히 제이든이 붙어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드는 제이든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물론 우진과 티격태격하는 것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말이다.
“여기 좀 봐, Boss.”
“보고 있어 제이든.”
“내가 디자인했지만, 정말 멋지지 않아?”
“뭔가 말이 이상한데…….”
“또 괜히 내 Korean language 가지고 트집 잡지 말고. 본질을 파악해 줬으면 해, 우진.”
“본질……? 무슨 본질.”
“그야 당연히 이 멋진 공간과 디자인이지.”
“…….”
제이든의 말대로 그가 디자인한 공간은 멋졌다.
하지만 원래 자화자찬에는 순순히 동의해 주기 싫은 법.
“다시 생각해 봐, 제이든.”
“다시 생각하라니! 이건 내 생각이 아니야, 우진.”
“그건 또 무슨 말인데?”
“내 Client도 이미 상당히 만족했거든.”
클라이언트라는 말에는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 건물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제이든의 어머니였으니까.
“대부분의 어머니께선……. 자식이 하는 일에 만족하는 척하시곤 해, 제이든.”
“Holy! 그런 게 아니야! 적어도 오늘만큼은, 엄마와 철저히 비즈니스 관계였다고.”
“정말?”
“Bloody Hell!”
제이든과의 대화는 항상 유쾌했다.
그래서 우진은 웃음을 머금은 채, 제이든의 작품을 다시 응시하였다.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신생 스튜디오의 첫 프로젝트치고는 결코 작지 않은 5층짜리 건물.
사실 웃고 떠드는 겉과 다르게, 이 건물을 보는 우진의 속마음은 조금 복잡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우진의 눈앞에 있는 이 건물은, 그의 전생에선 없던 건물이었으니까.
같은 자리에 같은 디자이너의 손에서 비슷한 규모로 지어지긴 했었지만, 디자인만큼은 완전히 달랐으니까.
‘제이든의 첫 작품이, 나 때문에 완전히 달라졌네.’
우진은 전생에서 제이든의 첫 작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의 우진에게 제이든 테일러라는 디자이너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니, 기억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리고 그 기억 속의 건물과 지금 눈앞에 있는 건물 사이에는, 누가 봐도 완벽한 괴리가 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같은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했지만 지어진 시기도 몇 년이나 차이 났으며.
그 디자이너인 제이든도 우진의 전생에서 살아가던 제이든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한 가지 더.
전생에 이 자리에 지어졌던 건물이 제이든 혼자서 디자인 디렉팅을 했던 건물이라면.
이번에는 디렉터가 한 사람 더 추가되었으니까.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마침 다른 손님에게 디자인을 소개하던 선빈이 반가운 표정으로 우진에게 다가왔다.
우진은 아직도 미스테리였다.
성향상 완전히 상극이나 다름없는 이 두 사람이, 어떻게 동업을 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잘해나가고 있는지가 말이다.
“형! 왔어?”
“그래, 이제 봤냐?”
“하하. 아버지 손님들께서 오셔서, 설명드린다고 시간이 좀 걸렸네.”
그렇게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우진이 문득 선빈에게 물어보았다.
“아버지께서는 뭐라셔? 마음에 들어 하시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을 우진이 한 이유는, 일전에 선빈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반대하시네.]
[그래? 왜 그러시지?]
[굳이 왜 힘든 길을 가려고 하냐는 입장이셔.]
[음…….]
[아버지께선 내가 본인 사업을 물려받았으면 하시나 봐. 어차피 업종이 같기도 하니, 굳이 새로 차리려는 마음을 이해 못 하셔.]
[충분히 그러실 수도 있겠네.]
[휴우.]
[하지만 넌 그럴 생각이 없겠지?]
[맞아 형. 난 아버지 일이 아닌 내 일을 하고 싶어.]
[그럼 보여 드려. 네가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지.]
[……!]
[나도 했는데. 너라고 못 하겠어?]
[형은…….]
[원래 허락을 받는 것보단, 용서받는 게 좀 더 쉬운 법이지.]
선빈의 아버지는 처음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으려는 아들을 말렸다고 했다.
건축업계에서 하나의 사업체를 일궈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바로 선빈의 아버지였고.
때문에 자신이 걸었던 그 길을 아들이 똑같이 걷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자식은 새로이 길을 개척하기보다, 당신이 닦아놓은 길 위로 편히 걸어왔으면 하는 생각이었던 것.
그래서 오늘 선빈은 어쩌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께 자신의 첫 건축을 보이는 것이 가장 떨렸을지도 몰랐다.
그런 그의 내심을 이해하기에, 우진이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선빈은, 다행히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뭐, 우리 아버지야 당연히 대견스럽다 하시지. 이제 와서 뭐라고 하시겠어. 하하하.”
“잘 됐네.”
“맞아, 잘 됐지.”
선빈이 활짝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다 형 덕분이야.”
우진의 시선이 다시 한번 건물을 향했다.
완전히 다른 개성을 가진 두 건축디자이너가 합심하여 완성해 낸, 단 하나뿐인 독특한 건물.
우진의 마음은 여전히 복잡했다.
자신의 개입 없이도 분명히 훌륭했을 두 건축가가, 어쨌든 우진의 영향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니까.
하지만 복잡한 마음과 별개로 우진이 지금 웃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진의 눈앞에 있는 이 건축디자인이.
제이든을 스타 건축가로 만들어줬던 전생의 그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해 보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멋지다는 사실이었다.
* * *
201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맞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18세기부터 이어진 오랜 전통의 축제인 ‘피라 데 산타루치아(Fira de Santa Lucia)’가 열리고 있었다.
아름답게 저물어가는 노을과 거리를 밝게 수놓는 반짝이는 조명들.
축제이자 크리스마스 마켓이기도 한 이 ‘피라 데 산타루치아’가 열리는 바르셀로나 거리는, 무척이나 흥겹고도 낭만적인 거리였다.
그리고 스페인의 유학생인 소연은, 크리스마스인 오늘 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얼마 전 함께 대학원을 졸업한, 친한 동기 카밀라(Camila)와 함께였으니까.
또각- 또각-
한껏 흥겨운 이 크리스마스 분위기 속에서, 소연 또한 더 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스페인에 머물게 된 지 이제 5년이 넘었지만, 열정적이고 여유로운 이곳 문화는 지금까지도 그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앞으로도 이곳에서 일을 좀 더 해볼 생각이었다.
물론 항상 한국이 그립고 또 언젠가 돌아갈 생각이긴 했지만.
브루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스페인 건축업계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이런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소연이 이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때, 카밀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거리가 아름답잖아.”
“새삼? 바르셀로나에 하루 이틀 오는 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이 축제는 처음이야.”
“아하! 그렇구나. 네가 산타루치아 축제에 처음 와보는 줄은 몰랐어.”
카밀라는 밝은 주황빛이 나는 붉은 머리의 예쁘장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소연이 스페인 생활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의 역할이 꽤 컸다.
“그럼, 소연.”
“응?”
“처음 온 기념으로, 내가 선물 하나 사줄까?”
“선물……? 갑자기?”
소연을 향해 해맑게 웃어 보인 카밀라는, 문득 거리의 가게 한 곳으로 들어가 뭔가를 집어 들었다.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5유로에 팔고 있단다.”
“여기, 조금 더 큰 녀석은요?”
“그건 7유로쯤 받아야겠군.”
소연은 카밀라가 손에 집은 물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게 뭐야, 카밀라? 통나무 인형……?”
조금 큰 맥주 캔 크기로 절단된 통나무의 단면에 눈 코 입을 붙여넣고, 빨간 모자를 씌워 놓은 특이한 모습의 인형.
카밀라가 그것을 갑자기 왜 사준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잠깐, 기다려 봐.”
하지만 카밀라는 대답 대신 웃으며 인형을 사서 나왔고, 그것을 소연에게 건네었다.
“이건, ‘까까띠오’라는 거야 소연.”
“까까띠오……?”
이어서 더욱 해맑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걸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면,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선물을 얻을 수 있다는 전통이 있어.”
“아하……?”
카밀라가 통나무 옆면을 톡톡 두들기며, 소연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소연은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었던 선물이 있어?”
“선물?”
“아니면 바라는 소원이 있다던가?”
“음…….”
카밀라의 말을 듣던 소연은, 저도 모르게 통나무를 톡톡 두들겨 보았다.
그리고 흥겨운 산타루치아 축제를 다시 한번 둘러보며,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공간을 설계하는, 멋진 건축 디자이너가 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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