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SGBC
“SH쪽에서 매각하려는 지분이, 시가로 총 얼마인지는 아시는 거지요?”
송주빈의 질문에, 우진이 간결하게 대답하였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WJ 스튜디오에서 부담 가능한 액수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어서 우진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또박또박 얘기하였다.
“2437억. 정확히 절반 부담할 의향이 있습니다.”
우진의 입에서 구체적인 액수까지 흘러나오자, 장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2437억.
이건 우진의 말마따나 정확히 절반의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액수였고, 그래서 주빈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진 것이다.
“으음……. 이런 중요한 얘기를 허투루 하실 분은 아니실 테고…….”
“당연합니다.”
한번 떠보는 수준의 이야기를 하러 오늘 온 것이었다면, 이렇게 구체적인 금액을 먼저 얘기할 리는 없었으니까.
“잠시만.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주빈에게 지금 우진의 이 이야기는,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믿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WJ 스튜디오가, 2400억을 부담할 수 있을 만한 자금력이 된다고?’
기업가이기에 앞서 전문 투자자인 주빈은, WJ 스튜디오라는 회사에 대해 모를 수가 없다.
주식시장에 첫 상장 이후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 미친 듯이 상한가를 치며 기업 가치를 수 배 증가시킨 회사가 바로 WJ 스튜디오였으니 말이다.
특히나 주가의 등락폭이나 기업의 성장 폭이 큰 편이 아닌 건설업계에서는, 전무후무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
하지만 아무리 WJ 스튜디오라는 기업이 그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 할지라도.
이제 갓 상장한 건축‧설계사무소가 2천억이라는 거액을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어디 공사하다가 유전이라도 발견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아마 우진 말고도 움켜쥘 수 있는 다른 동아줄이 있었더라면, 송주빈은 우진을 정중히 돌려보냈을지도 모른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제안이었으니까.
우진도 그러한 부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였고, 그래서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며 주빈의 생각이 정리되기까지 기다렸다.
우진이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사업을 키워왔는지 모르는 이상.
아니, 우진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상.
주빈의 반응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한참 생각을 정리한 주빈이,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금액을 동원하시는데, 기한은 얼마 정도 필요하십니까?”
“그 절반 정도는 이미 준비해 뒀고…….”
“……!”
“11월 정도까지만 시간 주신다면, 스케줄링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칼같이 명료하고 정확한 답변.
그래서 당장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주빈은, 우진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바로 이사회 열어 보겠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일 조금 늦게라도 곧장 전화를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열두 시 전에만 전화 주시죠. 하하.”
“그렇게까지 늦진 않을 겁니다.”
* * *
2016년 현재, 국내 건설사의 시가총액은, 다음과 같은 수준이었다.
SH물산 – 16조 8250억
제운건설 – 13조 1179억
명성건설 – 7조 9912억
태진건설 – 7조 3549억
칠성건설 – 6조 6788억
천웅건설 – 6조 5592억
……중략……
GA앤지니어링 3조 2915억
WJ 스튜디오 2조 9811억
하지만 도급순위표를 보면,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나열한 순위표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같은 건설업계라 하더라도, 사업적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자본이 분산되어있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다른 순위권 건설사들의 배 이상인 압도적인 시가총액을 보여주는 SH물산이나 제운건설만 봐도, 시공능력평가액으로 따지면 하위 건설사들과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나지는 않는것.
그리고 이 차트에서 가장 기형적인 순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WJ 스튜디오였다.
시가총액으로는 이미 천웅건설의 절반 수준까지 따라온 WJ 스튜디오였지만, 시공능력평가액은 10배 가까이 차이나니까.
이렇게 WJ 스튜디오의 순위가 기형적인 이유는 간단했다.
박경완을 영입한 이후 WJ 스튜디오는 분명 건설 쪽에서도 큰 성장을 이뤘지만, 이렇게 가파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부분의 영향이 더 컸으니 말이다.
“아니……. 어떻게 건설업종 업체의 영업이익률이 이렇게 높을 수 있는 거죠?”
“그게 무슨 말이야, 김 상무?”
“이거, 데이터가 말도 안 됩니다.”
“왜?”
“재무제표 뜯어보는 중인데, 여긴 건설회사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건설회사는, 매출 규모에 비해 영업이익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건설이라는 업종 자체가 원가 비율이 워낙 큰 분야였으니,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WJ 스튜디오는 달랐다.
WJ 스튜디오의 주 수입원은, 건설이 아니라 디자인 설계와 부동산 투자‧임대수익이었으니까.
지난 몇 년 동안 우진은 사내 유보금이 쌓일 때마다 쉬지 않고 부동산에 투자했고.
그 결과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수준이었다.
전문 투자사인 KCA인베스트먼트 임원들이 보기에도, 불가능에 가까운 수익률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 0하나 잘못 센 줄 알았어요.”
“…….”
“서우진 대표, 디자이너가 아니라 부동산 전문 투자자 아닐까요?”
“글쎄. 전문 투자자라고 해도 이 정도 수익을 낼 수 있을까?”
“음…….”
“김 상무 넌, 할 수 있어?”
“아뇨. 못합니다. 이 정도면 그냥 기적의 투자네요.”
그래서 우진에게 전화를 넣기 전 WJ 스튜디오라는 기업을 분석해 본 KCA인베스트먼트의 이사진은 만장일치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사회를 열었던 것 자체가 WJ 스튜디오에서 2천억이라는 거액을 감당할 수 있는 회사인지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는데.
데이터로 확인하니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이사진들은, 재무제표 대비 WJ 스튜디오의 기업 가치가 아직도 한참 저평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정말,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온다더니…….”
“서우진 대표 덕에 기사회생 가능하겠습니다.”
“조건은 뭐라고 합니까? 서 대표도 자선 사업가는 아닐 테니, 분명 단서조항을 이야기할 텐데요.”
“우리 쪽 데이터 정리되는 대로, 제가 미팅을 다시 한번 잡겠습니다.”
“좋습니다.”
“아마 WJ 스튜디오에 설계권과 시공권을 넘겨주는 조건일 확률이 높겠지요.”
“설계는 몰라도 시공을 WJ 스튜디오에서 감당하긴 힘들 겁니다. 시공능력은 한참 미달이더라고요.”
“그럼 일부 시공권이라도 요구하겠죠.”
이사회가 끝난 뒤, KCA인베스트먼트에서 한 것은 자신들의 자금동원력 검증이었다.
WJ 스튜디오에서 2500억 상당의 지분을 감당할 시, 나머지 금액을 확실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내부 재무상황을 검증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
“좋습니다, 서우진 대표님.”
“그럼 이제 전부 정리된 겁니까?”
“물론입니다. 11월 내로 사업계약서 픽스 내고, 도장 찍으시지요.”
우진은 처음 계획했던 대로, SGBC 사업장이라는 대형 사업장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설계사무소의 포지션에서 입찰에 성공한 것이 아닌.
시행사나 건설사와 동등한 입장에서 프로젝트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단일 건축부지로서 사업 규모는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들 정도의 초대형 사업장인 삼성 글로벌 비즈니스센터 프로젝트.
우진의 손으로 직접, 이런 거대한 사업장을 핸들링할 수 있게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디자인과 설계만큼은 오롯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겠지. 눈치 볼 필요 없이 말이야.’
그와 동시에, 천웅건설에 선물도 하나 줄 수 있게 되었다.
“천 회장님. 전 약속 지켰습니다.”
“으하하핫. 약속이라……. 설마 그 약속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는데 말이지.”
KCA인베스트먼트와 계약 과정에서, SGBC의 시공사로 천웅건설을 선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섭섭한 말씀이십니다. 전 진심으로 약속했던 거였는데요.”
“후후. 박경완이 하나 넘겨주고 이 정도 시공권을 받았으면, 아무래도 내 쪽에서 남는 장사였던 것 같구만 그래.”
“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오호.”
“박경완 이사가 아니었다면, 저희 WJ 스튜디오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테니까요.”
“하하하. 박경완이가 아주 새 주인을 제대로 잘 만났구만. 이 얘길 들었으면 눈물이라도 한 바가지 쏟았겠어.”
그리고 이것은, 박경완을 천웅건설에서 데려오면서 천종걸과 했던 약속.
[대신 제가 수년 내로, 조 단위 공사 하나 물어다가 천웅에 드리겠습니다.]
그 약속을 지킨 것이기도 하였다.
“계약서 전부 문제 없습니다.”
“그럼 진행해도 되겠지요?”
그리하여 2016년 11월 어느 날.
“잘 부탁드립니다, 송주빈 이사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 대표님.”
우진은 결국 SGBC 프로젝트의 지분 양도 양수와 더불어,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
“기본설계는 내년 초까지 마무리해서 검수받겠습니다.”
“하하, 조항에야 ‘모든 사업주체의 동의하에 설계권을 양도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상 이미 정해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일은 확실히 해야지요.”
“후후, 물론입니다.”
“서울에 가장 아름다운 랜드마크를 지어 보이겠습니다.”
“저희도 서 대표님의 작품, 진심으로 기대 중입니다. 하하핫.”
WJ 스튜디오와 KCA인베스트먼트의 이 계약 내용은, 순식간에 업계에 알려졌다.
워낙 SGBC 사업 자체가 초대형 프로젝트였다보니, 조용히 진행할래야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항상 뜨거운 감자였던 WJ 스튜디오의 관련 기사들은 일파만파 퍼져나가며 인터넷을 또다시 달구었고.
초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감 덕분인지 WJ 스튜디오의 주가도 다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017년 새해가 왔을 때.
WJ 스튜디오의 관련 기사 중 가장 이슈가 됐던 것은, 다름 아닌 서우진의 인터뷰였다.
* * *
[Question – 최근 SGBC 사업장의 지분을 일부 인수하셨습니다.]
[Answer – 네, 그랬지요.]
[Question – 이 부분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Answer – 물론입니다. 어떤 게 궁금하실까요?]
[Question – 사실 수천억의 비용을 태우는 것은, WJ 스튜디오의 회사 규모를 봤을 때 초강수였습니다. 그렇지요?]
[Answer – 인정합니다. 무리를 좀 했지요.]
[Question – 대표님께서는 SGBC에 참여하신 이유를 이전 인터뷰에서 건축가‧디자이너로서의 꿈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그 꿈을 이루시는 것은 설계 입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Answer – 하하,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Question – 그래서 만약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까지 무리하신 이유에 대해 조금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Answer –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Question – 음……. 비슷합니다.]
[Answer –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이상의 어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Question – 그…… 런가요?]
[Answer – 다만 더 온전히 저만의 디자인. ‘저만의 건축’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Question – 그 말씀은……?]
[Answer – 제 모든 것을 쏟아 만들 디자인과 설계에, 최소한의 간섭을 받고 싶었을 뿐이라는 이야깁니다.]
[Question – 정말, 대단하시군요.]
[Answer – 제 모든 의사결정에 최우선시하는 것은, 항상 디자인과 건축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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