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301화 (301/315)

301화

안식년(安息年)

세상에는 수많은 건축이 있다.

그 건축을 디자인한 수많은 건축가가 있으며, 그 건물들이 지어진 다양한 공간들이 있다.

그리고 우진이 경험하고 싶은 것은, 그 모든 것들이었다.

꼭 멋진 건축과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공간을 설계한 사람의 생각과 의도, 혹은 그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사회‧문화적 환경.

그런 것들이 녹아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경험하고 공감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홍콩의 구룡성채(Kowloon Walled City)였다.

20세기의 마지막 무법지대라고 불렸던 구룡성채.

정확히는 그 구룡성채가 과거에 자리했던 구룡성채공원(까우룽짜이씽공원, Kowloon Walled City Park)이, 우진의 첫 번째 행선지가 된 것이다.

‘여기 이 자리에, 그 낡고 빼곡한 건물의 숲이 존재했었다는 거지.’

구룡성채는 수많은 대중문화에 영향을 줬을 정도로, 특이하고 기형적인 시대상과 문화를 반영한 건축공간이었다.

본래 청나라가 홍콩의 영국군을 감시하고 막기 위해 사용하던 요새였지만, 2차 아편전쟁 이후 구룡반도까지 영국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유일하게 중국의 소유로 고립돼버렸던 지역.

고립된 탓에 청나라에서도 결국 관리를 포기했던 지역이 구룡성채였고, 덕분에 치안권이 붕 떠버린 이곳은 치외법권이 됐었다.

법과 공권력의 힘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가 된 것이다.

과거 구룡성채의 이미지가 떠올라있는 스마트폰을 보며, 우진은 현재의 아름다운 조경이 꾸며져 있는 구룡성채공원에 들어섰다.

이어서 우진의 입에서, 자연스레 탄성이 새어 나왔다.

‘여기가 한때 홍콩의 마굴이라고 불렸던 곳이라니.’

구룡성채 공원은 마치 중화권의 호화 저택 정원을 연상케 하는 장소였다.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질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원이었던 것이다.

우진은 이 녹빛의 공간도 마음에 들었지만 이보다는 과거 구룡성채의 흔적에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공원 안쪽에 있는 박물관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과거 구룡성채라는 특이한 공간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았다니…….’

20세기 중국은 혼란했다.

중일전쟁부터 시작하여 세계 2차대전,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등.

혼란스런 사회 정세로 인해, 수많은 난민들이 양산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갈 곳 잃은 수많은 난민들은 치외법권인 이 구룡성채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고작 잠실야구장 정도 넓이밖에 되지 않는 이 공간에는 거의 5만여 명의 주민이 생활했다고 한다.

공간은 좁은데 사람은 많아지고 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다 보니, 무분별한 증축과 개축이 끝없이 이뤄졌다.

일조권 같은 개념은 당연히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으며, 건물이 무너져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어떤 제약이나 규율도 없이.

오로지 ‘필요’에 의해서만 지어졌던 기형적인 건축공간이 바로 구룡성채였던 것이다.

우진이 이곳을 간접적으로라도 꼭 경험해 보고 싶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과거 수십 년에 걸쳐 마치 생물처럼 진화했던 이 기형적이고 특이한 공간은, 이곳 홍콩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완전한 무계획도시.

우진은 어쩌면 구룡성채야말로, 자연의 건축에 가장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였다.

박물관 안에 재현되어있는 과거 구룡성채의 축소 모형을 살피며, 우진은 가방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었다.

그리고 하얀 백지 위에, 펜대를 놀리기 시작하였다.

‘이 완전한 불규칙 안에도 분명히 어떤 조형성이 담겨 있어. 정해진 규칙은 없었겠지만, 이곳에 몰려든 사람들에게는 전부 공통점이 있었고……. 때문에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필요와 공통적인 제약이 존재했을 테니까.’

모형 앞에 선 우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펜대를 놀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스케치에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을 때.

우우웅-

우진도 모르는 사이, 펜대를 따라 희미한 금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사람의 역량은 능력과 경험에 비례하여 확장된다.

같은 경험을 해도 능력치에 따라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의 범위는 천차만별이며, 반대로 같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경험의 크기에 따라 비교 불가능할 정도의 역량 차이가 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귀 후 우진의 역량은, 전생의 우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게 당연했다.

분명 전생의 우진과 지금의 우진은 같은 능력치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경험의 깊이와 폭이 달랐기에 이만큼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으니까.

가진바 경험에 전생의 세월이 녹아있는 깊이가 있었기에 같은 상황에서 더 많은 것들을 얻어나갈 수 있었고.

그렇게 우진은 지난 4년 동안 성장하고 성장하여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지금 국내에서 ‘서우진’이라는 이름 앞에는, 다음과 같은 수식어가 당연하게 붙을 정도였으니까.

[국내 최고의 스타 디자이너]

[21세기 가장 성공한 20대 청년 사업가]

하지만 우진이 빠르게 성장하는 만큼, 그가 전생을 통해 쌓은 경험이라는 소스는 빠르게 소진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진의 이 안식년은, 다 떨어져 가는 경험이라는 소스를 다시 가득 채워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특히 사업적인 측면보다는,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여기가 바로 HSBC 홍콩 본점 건물입니다, 서우진 대표님.”

“와우. 그러니까 이게, 70년대에 디자인된 건축물이라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아마 저보다 훨씬 잘 아시겠지만……. 영국 최고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의 작품이지요.”

“내부가 완전히 뻥 뚫려 있군요?”

“하하, 저는 건축 전문가는 아니라서, 공간이 멋있다는 표현밖에는 하지 못하겠네요.”

“내부에 하중 지지를 위해 설치된 구조물이 거의 없네요. 조명도 거의 자연채광을 이용했고…….”

“이거, 제가 가이드 비용을 받는 게 민망해지는군요.”

“아트리움 바닥을 거대한 거울로 만들어서, 건물 전체에 자연채광이 가능하도록 했군요.”

가이드를 비롯해 현지에서 만나게 된 한국인들은 대부분 우진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친절했다.

그래서 여행은 우진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편했다.

“오……! 이 건물은 외관이 진짜 특이하군요?”

“리포센터(Lippo Center)라는 건물입니다. 외관이 마치 코알라가 매달려있는 것 같다고 해서 코알라 건물로 불리기도 하죠.”

“말씀 듣고 보니, 정말 코알라가 다닥다닥 매달려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예일대 건축학과장까지 지내신 건축가 폴 마빈 루돌프(Paul Marvin Rudolph)의 디자인이라고 합니다.”

홍콩에서 시작된 우진의 여행은, 정말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가며 이어졌다.

홍콩 다음의 행선지는 중국.

중국은 영토 자체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광활한 나라 중에 한 곳이었으며, 그만큼 다양한 건축과 공간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번쩍거리는 마천루가 즐비한 상하이 같은 도시도 있었으며, 자금성처럼 과거의 아름다운 유산이 보존되어있는 북경 같은 도시도 존재했으니까.

‘크……! 여긴 그야말로 별천지네. 서울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마천루가 솟아있군.’

중국에 거의 한 달 넘게 머물었던 우진은, 이번엔 대륙을 훌쩍 건너 유럽으로 향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대륙, 유럽.

우진은 수많은 나라들을 방문하며 그곳의 민족과 문화를 경험하였고, 그 나라의 감성과 시대상에 맞는 건축과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건축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삶과 그 어떤 요소보다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기에.

공간을 경험하고 건축을 공부하면서, 우진은 자연스레 많은 지식들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대체 어떻게 이런 규모의 건축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당시 기술력으로 이런 수준의 건축이 가능했다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진이 건축물만 보러 다닌 것은 또 아니었다.

유럽에는 우진도 인맥이 제법 있었으니 말이다.

브루노와 마테오 등의 스페인 건축가 인맥들을 비롯하여, 건축 컨퍼런스에서 알게 됐던 다양한 유럽의 건축가들까지.

“오, 우진! 스페인에서 우진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하하, 마테오. 잘 지내셨지요?”

“나야 잘 지냈지. 무척이나 바쁘다고 들었는데, 스페인에는 어쩐 일로 온 거야?”

“하던 일들 일부 좀 정리하고, 일 년 안식년을 갖게 됐어요.”

“와우, 안식년이라니. 멋지군.”

그런 인맥들과의 만남은, 우진의 경험을 더욱 깊이 있게 가득 채워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마테오, 혹시 오늘은 <올라스 페로시스(Olas feroces)>를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일세. 그렇지 않아도 내가 먼저 이야기하려 했어.”

“하하, 감사합니다.”

“사실 올라스 페로시스가 완공되면, 누구보다도 자네를 가장 먼저 부르고 싶었다네.”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 자네가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던 건축물 아니겠는가.”

스페인에서는 11년 말 우진이 디자인에 참여했었던, 신축 산 마메스 구장 ‘올라스 페로시스’의 현장에도 가볼 수 있었다.

아직 완공상태는 아니었지만, 윤곽이 거의 완성되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멋들어진 경기장의 모습.

현장을 둘러보며 우진은 벅찬 감정을 또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올라스 페로시스를 대부분 디자인한 것은 마테오였지만, 우진의 지분이 적지 않은 건축물이 지구 반대편 스페인의 땅에 이렇게 멋지게 들어서게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멋지게 지어지고 있다니. 역시 마테오는 대단해.’

영국에 갔을 때는, 컨퍼런스 장소였던 AA스쿨에도 들렀다.

무려 2011년 당시에는 우진과 날을 세웠던 건축가 에단의 초대를 받아서 말이다.

에단의 요청으로 세계 최고의 건축학교 AA스쿨의 학생들 앞에서 짧게 강연도 하였다.

강연이라기보단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즐겁고 보람찬 시간이 되었다.

‘벌써 유럽에 온 지도 몇 달이 지났네.’

이렇게 다양한 경험들을 하며 우진이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사이, 시간은 훌쩍훌쩍 지나갔고 해는 또다시 바뀌었다.

2014년을 맞이한 게 엊그제 같았건만 어느새 2015년이 되었고, 우진의 안식년도 절반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것이다.

봄에는 어머니를 모셔와서 한 달 정도 함께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최대한 많은 건축과 공간을 경험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동하던 여행 초기와 달리, 이제는 우진에게도 여유가 좀 더 생겼으니 말이다.

“아들 덕에 이렇게 유럽도 다 와 보고……. 고맙다, 내 아들.”

“별말씀을요, 진즉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한국에는 언제 다시 돌아올 거니?”

“이제 금방 돌아갈게요, 엄마.”

“그래. 항상 조심하고……!”

어머니께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신 뒤에는, 남쪽으로 건너가 아프리카에도 가보았다.

이제 어떤 건축을 꼭 봐야겠다는 강박 같은 것은 없었다.

하루하루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우진이었으니까.

치안이 위험하다는 남미에도 이삼 주 정도를 머물렀다.

우유니사막과 같은 경이로운 자연경관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건축이 아니었음에도 우진에게 새로운 영감을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 우진의 마지막 행선지는 미국.

우진은 2015년의 초여름, 미국에 도착하였다.

‘어쩌다 보니 미국을 마지막에 왔네. 남은 시간은 여기서 여유롭게 보내다 돌아가야겠어.’

2015년 8월의 어느 날.

뉴욕의 존 F 케네디국제공항에 도착한 우진은, 게이트에서 1년 전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안녕하세요, 승무원님.”

“반갑습니다.”

“혹시 지금 발권 가능한 국제선 중에, 가장 빠른 시간대에 어떤 비행기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그랬던 것처럼…….

“가장 빠른 비행은, 5시 25분 비행이네요.”

“어디로 가는 비행기죠?”

“한국의 인천 국제공항이요.”

우진은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을 수 있었다.

“그 비행기로 할게요.”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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