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안식년(安息年)
배신감으로 가득한 경완의 분노(?)를 달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서우진.”
“네, 이사님.”
“분명히 네가 그랬지?”
“뭐라고요?”
“아주 ‘특별한’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며?”
“…….”
“젠장.”
“그 특별한 프로젝트를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해 주심 안 되겠습니까?”
“후…….”
겉으로 티 내진 않았지만, 경완은 사실 WJ 스튜디오에 적응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천웅과 WJ 스튜디오는 분명 같은 업계의 기업이었지만 사내문화나 업무 방식은 완전히 천차만별이었으니 말이다.
다소 경직되어 있던 천웅에 비해 훨씬 자유분방하고 유연한 WJ 스튜디오의 방식은 천웅에서 십 년이 넘게 일한 경완에게 어색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지난 몇 달간 일 자체는 잘 해냈을지 몰라도, 업무 프로세스에 적응한다고 애를 좀 먹었던 것.
그래서 경완이 WJ 스튜디오의 업무에 완벽히 적응한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제야 슬슬 일에 재미를 붙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우진이 안식년을 갖겠다고 하니, 맥이 빠지는 건 너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저도 처음부터 이러려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개소리.”
“맞아요. 사실 그래서 이사님이 필요했어요.”
“…….”
“딱 1년만 좀 부탁드릴게요. 저 좀 도와줘요…….”
그리고 그런 경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우진은, 최대한 열심히 그를 설득하였다.
그 설득의 요지는 하나였다.
지금 우진이 일 년 동안 세상을 돌아보고 오는 것이, WJ 스튜디오의 미래를 위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하여 우진의 이야기를 전부 다 들은 경완은, 이렇게 얘기하였다.
“서우진, 내가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뭔지 알아?”
“음…….”
“네가 없는 일 년 동안의 일이 걱정되는 게 아냐.”
“그럼 뭔데요?”
“내가 걱정되는 건, 1년 뒤야.”
“네?”
“사람은 참 간사해서, 한번 나태해지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거든.”
“음…….”
“지금이야 1년 재충전하면 더 열심히 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참, 쉽지 않아.”
그리고 경완의 이야기를 듣던 우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은퇴해버릴까 봐 걱정하시는 거예요, 지금?”
“뭐, 비슷하지. 사실 넌, 지금부터 일 안 하고 놀고먹어도 평생 먹고 살 만큼 벌어 뒀잖아?”
“그래서요?”
“지금 상황에서 1년쯤 쉬다 보면,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거야.”
경완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이었지만, 우진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왜 웃냐?”
어찌 보면 충분히 일리 있는 걱정이긴 했지만, 우진의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걱정이었으니까.
“아니, 이사님.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너무하긴 니가 너무하지, 내가 뭘 너무해.”
“이사님은 제 나이가 몇 살로 보이십니까?”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예상 못 했던 우진의 질문에 경완은 움찔하였고,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저 이제 스물여섯이에요. 89년생한테 은퇴라니요.”
“음…….”
“일 년 쉬고 와 봐야 스물일곱이고요.”
“…….”
“이사님은 스물일곱에, 은퇴 생각하는 사람 보셨어요?”
“흠, 크흠.”
오랜 시간 우진과 함께 일하면서, 사실 경완은 그의 나이에 대해 생각해본 지 오래였다.
워낙 하는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경완의 동년배(?) 같았으니, 자연스레 자신의 관점에 맞춰 우진의 상황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서우진이……. 아직도 20대였지.’
그러면서 새삼 드는 생각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이십 대의 위대함(?)이었다.
대체 어떤 재능을 타고나야 이십 대에 이만큼을 이룰 수 있는 건지.
원래도 알고 있던 사실이 새삼 더 피부에 와 닿은 것이다.
‘난 스물일곱에 뭘 했더라……. 신입사원이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던 경완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어서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래, 알겠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흐흐,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이사님.”
“대신, 일 년 지날 때까지 안 오면, 나도 사표 낸다. 알지?”
“걱정 마시죠. 1년 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경완에게 안식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후로, 우진은 하나둘 다른 직원들에게도 통보하였다.
다른 직원들 또한 다들 당황했지만, 당연히 경완만큼 격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대표님 좀 쉬실 때도 되셨지. 진짜 고생 많이 하셨는데.”
“그러니까요. 이번 기회에 푹 쉬고 오셨으면 좋겠네요.”
“와, 대표님 부럽네요. 1년 안식년이라니. 1년 동안 아예 쉬시는 거죠?”
“너도 1년 쉴래?”
“넵?”
“사표 내면 1년이 아니라 몇 년 더 쉴 수 있는데.”
“헤헤, 팀장님. 그건 아니고요…….”
경완은 9월 초로 잡겠다던 <평창동 아르코>의 시행사 미팅을, 결국 8월 마지막 주로 당겨 잡았다.
우진은 최선을 다해 미팅을 준비했고 결국 <평창동 아르코>의 사업 시행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아르코>의 운영팀은 두 번째 <아르코 하우스>의 확정을 고객들에게 알렸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총 100세대 정도로 구성된 규모의 숲세권 프리미엄 타운 하우스는, 청담 아르코 못지않은 매력을 VVIP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창동 아르코> 프로젝트 세팅을 마지막으로, 우진은 2014년 모든 업무를 마무리 지었다.
* * *
8월이 지나고 9월이 왔다.
그리고 더위도 제대로 가시지 않은 9월 초의 어느 날, 우진은 집을 나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아들, 늦은 거 아니야?”
“안 늦었어요, 걱정 마세요.”
“몇 시 비행긴데?”
“가면 대충 맞을 시간이에요, 걱정 마시라니까요?”
“그래도 넉넉히 다녀야지, 넉넉히. 비행기가 버스도 아니고, 한번 놓치면 끝 아니야?”
“알겠어요, 빨리 준비할게요.”
“짐은 다 싼 거 맞아?”
“네, 맞는데요?”
“세계여행한다면서, 이렇게 작은 배낭 하나로 돼?”
“필요한 건 사서 쓰죠 뭐.”
“우진이 너……. 여행 가는 건 맞지?”
“그렇다니까요.”
어머니의 잔소리를 뒤로 한 채, 운전대를 잡은 우진은 곧바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은 어머니의 잔소리에 오전 내내 귀가 따가웠지만, 우진의 표정은 밝기 그지없었다.
‘역시 이번 안식년은, 정말 잘한 선택이었어.’
사실 조금 급한 감도 있었다.
우진이 쥐고 있던 모든 업무를 반년 만에 분배하고 인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우진이 결심을 밀어붙인 이유는,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굵직굵직한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회사가 전반적으로 개편되는 이런 시점은, 회사가 커질수록 다시 오긴 힘들 터였다.
부우웅-!
고속도로를 탄 우진이 가속페달을 밟자, 차가 시원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평일 업무시간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적하기 그지없었고, 더위가 살짝 가신 날씨는 무척이나 화창하였다.
한두 시간 운전 끝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우진은, 차를 대고 곧바로 게이트로 향했다.
우진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이 몇 신지, 비행기가 뜨기까지 몇 분이 남았는지.
그런 것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엇……! 혹시, 서우진 씨……?”
“아, 하하. 맞습니다.”
“우왓! 팬이에요!”
“감사합니다.”
“혹시,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그야 뭐, 어렵지 않죠.”
우진은 아직, 항공권 발권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혹시, 승무원님. 지금 발권 가능한 국제선 중에, 가장 빠른 시간대에 어떤 비행기가 있을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예요. 가장 빠르게 출국할 수 있는 비행기를 찾고 있거든요.”
“잠…… 시만요. 검색 한 번 해볼게요.”
세계여행을 나선 우진에게는, 단 한 가지 계획만이 있을 뿐이었다.
가보지 못한 나라에 도착해서, 가보지 못한 건축과 공간을 경험해보겠다는 것.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었다.
아니, 조금은 상관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가장 빠른 건 3시 13분 비행기네요.”
“어디로 가는 비행기죠?”
“볼레 국제공항이요.”
“볼레……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국제공항이에요. 지금 인천에서 아프리카로 갈 수 있는 하나뿐인 직항 티켓이죠.”
“으, 으흠…….”
어디든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아프리카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했던 우진.
“그럼 그 다음으로 빠른 티켓은요?”
“홍콩 국제공항이네요.”
“오……!”
“시간은 3시 42분…….”
“그 비행기로 할게요.”
그렇게 우진의 첫 번째 행선지는, 홍콩으로 정해졌다.
“퍼스트 클래스밖에 자리가 없는데,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럼 지금 바로 발권을 진행하시려면…….”
홍콩행 항공권을 발권받은 우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마트폰을 열었다.
‘홍콩이라면 첫 번째 여행지로 아주 괜찮지. 아프리카는……. 그래, 내년 즈음해서 가봐야겠어.’
행선지가 정해지자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를 예약하였고, 그제야 행선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우진이 스마트폰을 두들기는 사이, 출국 게이트가 오픈되었다.
‘이거, 은근히 떨리는데?’
설레는 마음을 안고 걸음을 옮긴 우진은,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난생 처음 타보는 퍼스트 클래스의 전경은, 우진의 설레는 마음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보니까 비행시간 네 시간도 채 안 되는 것 같던데……. 퍼스트 클래스 좀 아쉽긴 하네.’
좌석에 몸을 누이고 주변을 둘러보던 우진은, 우측에 꽂혀 있는 잡지들을 발견하였다.
홍콩 항공사의 비행기여서인지, 현지 문화나 관광 상품과 관련된 잡지들이 꽤 많이 꽂혀 있었다.
곧 도착할 도시에서 경험하게 될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시답잖은 부분들까지도 무척이나 흥미롭게 느껴졌고, 그 사이 비행기는 천천히 이륙하기 시작하였다.
부우우웅-!
이어서 커다란 엔진소리와 함께, 이륙을 알리는 안내음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Ladies, and Gentlemen.]
[The captain has turned off the seatbelt sign……]
[…… you must keep your belt fastened while seated. Thank you.]
기장의 목소리에 이제 실감이 나는 것인지, 우진의 심장박동은 더욱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지금 우진이 느끼는 설렘은, 처음 K대학교의 오리엔테이션으로 향하던 지하철에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할 정도였다.
창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인천국제공항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우진은 한 가지 다짐을 하였다.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돌아와야지.’
정확히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이 여행의 끝에서는, 서우진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건축을 그려내리라고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