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안식년(安息年)
안식년이란 본래, 7년으로 이루어진 주기의 일곱째 해를 의미한다.
농경사회에서 오랜 기간 경작으로 피로해진 땅을 1년 동안 쉬게 해주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땅을 사용하는 모든 행위'가 금지되는 해를 안식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그 의미가 다양하게 파생되었다.
대학이나 기관의 교수들, 혹은 고위관료들이 7년에 한 번 완전히 쉬는 해를 안식년이라고 칭하기도 하였으며.
스포츠 업계에서는 팀을 리빌딩하기 위해 해당 시즌의 성적을 내려놓는 것을 안식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니까.
그러니까 오랫동안 열심히 일한 어떤 집단이나 사람이 갑자기 모든 업무를 내려놓고 1년 동안 푹 쉬는 해를 안식년이라고 관용적으로 지칭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진의 이야기하는 ‘안식년’이라는 단어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식년? 안식년을 갖겠다고?”
WJ 타워의 최상층.
우진의 부름으로 대표실에 모인 진태와 석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 그대로야, 형. 딱 1년. 아니 1년까지는 안 걸릴지도 모르겠네.”
우진의 대답에, 이번에는 석현이 물었다.
“갑자기 안식년이라니, 대체 이유가 뭐야?”
우진이 대답하려는 찰나, 진태가 대신 말했다.
“이유야 당연히 쉬고 싶은 거겠지.”
“음…….”
“솔직히 우진이, 지난 몇 년 동안 쉬어 본 적이 없잖아?”
“그렇기는 한데…….”
말을 흐리는 석현을 잠시 응시한 진태가, 다시 우진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쉬겠다는 부분에 대해서, 난 찬성이야. 사람이 쉴 때도 있어야 또 일도 하니까.”
“그래?”
우진이 웃으며 반문하자, 진태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안식년은 너무 극단적이지 않아?”
“음…….”
“일단 일이 주. 아니, 한 달 정도만 쉬고 돌아오는 건 어때? 지금 당장 네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사이드 이펙트가 분명히 여기저기 생길 거야.”
진태가 말하는 사이드 이펙트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난 5개월 동안 WJ 스튜디오는 체질 개선을 했고, 그 덕에 우진이 맡고 있던 일들 중 많은 부분이 다른 경영진들에게 분배되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우진의 역할이 워낙 컸던 회사인 만큼, 우진이 아예 1년이라는 시간을 비운다고 생각하면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것이다.
“혹시……. 번아웃이라도 온 건 아니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 석현을 향해,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이어서 진태를 응시한 우진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형도, 좀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어.”
우진의 말이 의외였는지, 진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였다.
“내가 잘못…… 생각한 부분?”
“그래.”
“그게 뭔데?”
“난 단순히 쉬고 싶어서 안식년을 갖겠다는 게 아니거든.”
“음……?”
“물론 쉬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어. 하지만 나 알잖아. 그냥 쉬기만 해서는, 아마 한 달이면 좀이 쑤셔서 회사로 뛰어나올걸?”
우진의 이야기에,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던 진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1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우진이 자리를 비우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이었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일단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우진이 만큼 생각이 깊은 사람도 잘 없지.’
그것은 석현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장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여 잠시 후,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회사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대부분의 일들이 전부 잘 풀리고 있어. 그렇지?”
“그런데?”
“하지만 언제부턴지, 난 제자리걸음을 하는 기분이었어.”
우진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진태와 석현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우진은, 두 사람이 전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이야기를 계속 꺼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좀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 넉넉하게 1년 잡고, 여행을 다녀 볼 생각이야.”
진태와 석현은 ‘갑자기’라는 표현을 썼지만, 우진의 이러한 결정은 결코 갑작스레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쉬고 싶다거나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진이 이런 생각을 처음 떠올렸던 계기는 바로 우진의 꿈.
서울에 가장 높고 가장 아름다운 건축을 하겠다는 그의 오래된 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내 손에서 만들어진 디자인이, 건축이……. 정말 그렇게 아름다운 건축이 될 수 있을까?’
처음 우진이 이러한 꿈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은 막연히 가장 아름다운 건축을 해내야겠다는 꿈일 뿐이었다.
꿈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경험도 역량도, 전혀 갖지 못했을 때였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우진은 성장했고, 그 꿈에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여 꿈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진은 자연스레 이러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런 건축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나는 과연 꿈을 이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 의문은 한동안 우진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우진은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것이 우진이 안식년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었다.
매일 회사 일에 묻혀 하루하루를 보내다가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와야겠어. 세상의 모든 건축과 공간들을 경험하다 보면,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진이 정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을 지어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어떤 건축디자이너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오만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우진이 말하는 그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라는 말은, ‘우진 본인이 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진은 지금 본인이 가지고 있는 디자인 역량에, 아직 더 성장시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내일 떠나겠단 얘긴 당연히 아니야.”
우진의 말에, 석현과 진태가 동시에 되물었다.
“그럼?”
“그럼 언젠데?”
피식 웃은 우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이번 달 인사이동 다 끝나야 하고 부서별 인수인계도 전부 마무리돼야 하고…….”
이어서 탁자 위의 달력을 몇 장 넘겨 본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넉넉잡고 한 가을쯤 되지 않을까? 그쯤이면 충분히 정리될 것 같은데.”
우진의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우진의 결심이 생각보다 더 확고했기 때문에, 진태나 석현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석현이었다.
“그럼, 다른 직원들에게도 전부 얘기할 거야?”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냐. 일단 한동안은 비밀.”
“하긴. 괜히 얘기 다 해 두면, 인사이동 중에 회사 분위기만 어수선해지겠네.”
“맞아. 그러니까 꼭 두 사람만 알고 있어야 돼.”
진태가 대답했고.
“그래, 알겠다.”
우진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특히 오늘부터 출근하실 박 상무님. 아니, 박경완 이사님께는 절대 비밀이야.”
우진의 당부에, 석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분은 너랑도 엄청 가깝지 않아? 이사진 정도는 알고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 질문에, 우진은 아주 명료한 답을 내놓았다.
“기껏 꼬셔서 데려온 사람, 바로 도망가게 할 일 있어?”
“……?”
“내가 하던 일, 제일 많이 가져갈 사람이 아마 박경완 이사님일 텐데…….”
“아……!”
“그러니까 인계 다 끝나고 업무 정리될 때까지는, 절대로 비밀이야. 알겠지?”
우진의 당부에, 두 사람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할게.”
* * *
5월의 인사이동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금세 6월, 7월도 지나 무더운 여름이 되었다.
그리고 이 3개월 동안, 우진은 최대한 많은 일들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회사의 구조개편으로 인해 많은 부분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우진이었지만, 그래도 직접 진행 중이던 몇몇 프로젝트는 깔끔하게 봉합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우진이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했던 사업장은, <아르코>가 처음 지어질 청담동 사업장과 마곡 컨벤션센터 사업장이었다.
두 사업장 모두 이제 시작단계였기 때문에, 디자인을 총괄했던 우진의 손이 가장 많이 필요했으니까.
“실장님. 이번 주 내로 설계 변경 안 픽스 좀 해주세요.”
“기존 디자인이랑 꽤 많이 달라지게 될 텐데,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수는 없지 않겠어요?”
“LTK 사업부에서 양해를 구해 왔어요. 업무시설 입주 예정기업의 요청이라고…….”
“으음…….”
“들어보니 어느 정도 일리 있긴 하더라고요. 최대한 그쪽 요구에 맞춰서 변경 안 뽑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대신 D섹터 외에 다른 파트는 절대로 건드시면 안 됩니다.”
“그럴게요.”
특히 이번에 새로 영입하게 된 민선과 경완이 각 사업장의 헤드를 맡았기 때문에, 더 신경이 많이 간 것도 있었다.
“이사님, 공사 일정 잘 맞춰지고 있죠?”
“예, 대표님. 사실 청담 아르코가 그렇게 큰 사업장은 아니라, 변수가 많지는 않습니다.”
“둘이 있을 때는 말 편하게 해요, 이사님.”
“흐흐, 회사 안에선 그럴 수 없습니다, 대표님. 다른 직원들 보기에 별로 좋은 그림이 아니잖습니까?”
“쩝. 이사님 존대는 어떻게 아직도 어색하네.”
경완과 민선은, 우진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히 회사에 적응하고 있었다.
둘 모두 털털한 성격에 커리어나 능력이나 확실한 사람들이었으니, 기존 직원들과 큰 트러블 없이 금세 WJ 스튜디오에 동화된 것이다.
일도 당연히 잘했다.
민선의 경우는 맡은 일 자체가 처음 시작부터 본인이 참여했던 프로젝트였기에 업무 위화감조차 전혀 없었으며.
경완도 천웅에서 항상 해 왔던 현장 관리부터 업무를 시작하였으니 못할 턱이 없었다.
그래서 8월의 어느 날.
우진은 드디어 경완에게 폭탄선언을 하였다.
“대표님, <평창 아르코> 부지 매입 끝났답니다. 내일 제가 실사 다녀올 거고……. 다음 달 초쯤에 미팅 잡을까 하는데, 괜찮겠지요?”
“다음 달은 안 돼요, 이사님.”
“예? 이번 달은 이제 다음 주밖에 안 남았는데…….”
“저, 다음 달부터 일 년 쉬어요.”
“일 년 쉬시면……. 잠깐. 뭐……라고요?”
“저 일 년 동안 쉬고 올 거라고요.”
“그게 무슨…….”
“안식년 아시죠, 이사님?”
“…….”
“저 없는 동안, 잘 좀 부탁드립니다.”
별 것 아니라는 듯 툭 던지는 우진의 말에, 경완은 잠시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우진이 오랜만에 듣는 걸쭉한 목소리였다.
“야 이 씨, 대체 그게 무슨 개 뼉다구 같은 소리야?”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