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영입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우진 또한 매년 한 해가 지날 때면, 새로운 한 해의 목표 하나쯤은 생각하며 새해를 맞이한다.
2010년을 시작하던 우진의 목표가 학교에 적응하고 그토록 갈망하던 ‘건축디자인’이라는 공부를 원 없이 해보는 것이었다면.
2011년의 목표는 WJ 스튜디오라는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2012년의 목표는 한 사람의 건축디자이너로서 그 자신만의 디자인을 해내는 것이었으며.
2013년의 목표는 WJ 스튜디오의 건축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론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진이 이러한 목표를 거창하게 정해놓은 채, 그것을 어떻게든 이루기 위해 달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진의 목표는 언제나 목표를 세우던 그 시점에 하고 있던 일들의 연장선이었으며.
다만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한 나침반의 역할을 하던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2014년을 시작하는 지금 이 순간, 우진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했을까?
어떤 포괄적인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그것은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덕에 믿기힘들 만큼 많은 것들을 이뤄낸 우진이었지만.
이제는 지금까지 이뤄낸 것들을 돌아보면서 더욱 내실을 다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WJ 스튜디오라는 회사와 디자이너 서우진이라는 브랜드의 덩치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우진이라 해도 이제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직접 컨트롤하는 것에 대해 버거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이대로 계속 앞만 보고 달리다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시점에 도달하리라는 생각이 든 것.
이것은 잠시 숨을 고르는 일임과 동시에, 오히려 WJ 스튜디오라는 회사를 더 크게 성장시키기 위한 발판을 다지는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진이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가기 위해서, 어깨 위에 지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내려놓는 것 말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중, 대체가 불가능한 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던 박경완의 영입을 새해가 밝자마자 추진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건설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우진 이상으로 현장에 대한 이해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믿을 수 있고 그릇이 좁지 않은 사람.
[대표님이랑 방금 면담 끝났다.]
“하하. 그럼 결정하신 겁니까?”
[그래, 인마. 후우…….]
“왜요. 뭔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신데…….”
[불만?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가 있긴 있단 소리네요?”
[지금 기분이 애매해서 그래.]
“애매하다고요?”
[짜고 치는 고스톱 안에 끼어서 당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짜다뇨. 누가요. 제가요?”
[말을 말자, 말을 마.]
경완은 우진이 하던 역할 중 많은 부분을 대체해줄 수 있는, 우진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검증된 인재였던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나오실 수 있는 건데요?”
[이직이야 대표님 허락까지 떨어졌으니 당장 해도 상관없는데, 그래도 인수인계 깔끔하게 다 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지?]
“어차피 저희, 올해 인사이동 5월이에요.”
[오, 그래?]
“그전에만 오시면 됩니다.”
[오냐. 그 전엔 충분하지.]
“인수인계 빨리 끝내고, 한두 달 정돈 좀 푹 쉬다 오세요.”
[뭐냐, 불안하게 왜 이렇게 친절해?]
“오시면 이제 저희 회사에서, 아주 ‘특별한’ 프로젝트를 하셔야 하니까요.”
[젠장. 내가 지금 뭔가 실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진이 직접 영입한 사람은 경완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마곡 컨벤션센터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민선 또한, 우진의 우선적인 영입 대상이었던 것이다.
경완만큼 우진이 하던 일들의 많은 부분을 대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우진에게 부족한 부분을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무궁무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오늘, 갑자기 저녁 약속은 왜 잡은 거예요?”
“음, 그러니까……. 용건이 있으니까요?”
“데이트 신청. 뭐, 그런 건가요?”
“그, 그런 건 아니고…….”
“에이, 좋다 말았네. 그럼 용건이 뭔데요?”
“민선 씨 언제까지 프리랜서 하실 생각이세요?”
“음……?”
“이번에 저희 전시 디자인 사업부 하나 신설할 생각인데, 그쪽 디자인 실장이 필요해서요.”
“좋아요.”
“네? 뭐가요?”
“저, 영입제안 하신 것 아녜요?”
“맞죠.”
“그러니까, 좋다고요. 고용계약서는 들고 오셨어요?”
“그야…….”
“계약서 갖고 와요. 사인할게요.”
“아니 조건도 안 들어보고 사인해요?”
“서 대표님이 알아서 잘 맞춰주셨겠죠.”
“…….”
“전시 디자인 실장이라면서요?”
“네. 그쵸.”
“WJ 스튜디오 연봉 어느 정돈지는 이미 알고 있어요. 실장급이면 꽤 받겠네.”
“그건 어떻게 알아요?”
“이미 예전에 입사 지원하려고 찾아봤으니까요.”
“…….”
“언제 부르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단 조금 오래 걸렸네요.”
“…….”
그리고 우진이 직접 영입제안을 한 마지막 한 명의 인재.
그는 다름 아닌 조만간 우진과 같은 날 학사모를 쓰게 될, 미래의 스타 디자이너 제이든 테일러였다.
영입이라기에는 다소 특이한 상황이긴 했지만 말이다.
“제이든.”
“와썹 브로?”
“너 솔직히 말해봐. 영국인 아니지? 한국인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우진.”
“이제 한국식 영어를 더 잘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오, 한국씩 영어라니. Holy……. 우진. 설마 지금 내 영어를 우진의 그 저급한 영어 발음과 비교한 거야?”
사실 우진은 이 부분에 대해 꽤 많은 고민을 했었다.
제이든이 갖고 있는 디자인적 감각이나 잠재력은 신입생 때부터 대단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상당한 리스크(?)를 가진 사람이 제이든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마 제이든을 평범한 신입사원처럼 채용해서 천천히 회사에 적응시키려 한다면, 두 달도 채 되지 않아서 회사를 뛰쳐나갈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우진이 아는 제이든이란 인물은, 조직의 어떤 틀이나 규칙 안에 자신을 맞출 수 없도록 생겨 먹은 사람이었으니까.
‘브루노의 스튜디오에서 인턴을 하던 때만 봐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진은, 제이든이라는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우진이 갖지 못한 창의적인 사고방식과 그를 스타 디자이너로 만들어줄 뛰어난 디자인 포텐셜은, 그러한 제이든의 자유분방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제이든, 넌 그럼 졸업하고 뭘 할 거야?”
“졸업하고? 당연히 디자인을 해야지.”
“영국으로 돌아갈 거야?”
“무슨 소리야, Boss. 이 제이든 님은 우진을 배신하지 않아.”
“뭐?”
“WJ 스튜디오의 창립 멤버가, 영국으로 돌아가 버릴 순 없지.”
“…….”
“그럼 Boss가 너무 슬퍼할 테니까.”
그래서 우진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제이든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제이든의 자유분방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WJ 스튜디오라는 그릇에 담을 수 있도록.
그에 맞는 자리를 만들어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럼 제이든.”
“Yes sir.”
“내일부터 설계팀에 출근해서 도면부터 치기 시작하는 건 어때?”
“What? 도면?”
“건축디자인의 시작은 도면이라며.”
“무슨 소리야, 제이든은 그런 말 한 적 없어.”
“네 졸업 작품 판넬에 그렇게 쓰여 있던데?”
“…….”
“어디 보자……. 졸전 도록에 찾아보면 있을 텐데…….”
“젠장. 우진. 날 괴롭히는 이유가 뭐야?”
WJ 스튜디오라는 회사.
그 조직이 가지고 있는 규칙과 형평성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제이든이라는 디자이너를 품을 수 있는 방법.
“그럼 네가 하고 싶은 디자인은 뭔데?”
“도면이 싫은 게 아니야, 우진.”
“그럼?”
“남이 디자인한 도면을 그대로 베끼는 게 싫을 뿐이야.”
“그 말은, Director가 되고 싶다는 거야?”
그건 바로, 제이든을 고용하는 것이 아닌, 그에게 ‘투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도 너무 비현실적인 얘기라는 것 알아.”
“그래?”
“한국이 아니라 세계 어딜 가도, 학부 졸업생이 Director가 되는 경우는 없겠지.”
“잘 아네.”
“그래서 사실 졸업하고 나면, 프리랜서로 좀 일해 볼 생각이었어.”
“프리랜서?”
“그동안 작업해 둔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교수님께 부탁해서 일거리를 좀 받아볼까 했지.”
“오, 조운찬 교수님 프로젝트지?”
“맞아, 우진.”
정말 오랜만에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제이든을 보며, 우진은 웃을 수 있었다.
제이든이 생각했던 것만큼 현실감각이 없진 않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긴, 그랬으니까 성공했겠지.’
그래서 우진은 좀 더 마음 편히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럼 제이든.”
“말해, 우진.”
“프로젝트 몇 개 진행한 다음에, 내 투자를 한 번 받아보는 건 어때?”
“음……? 투자?”
“프리랜서로 일하더라도 점점 더 큰 일을 받으려면, 너 혼자가 아니라 팀이 있어야 하잖아?”
“디자인 팀을 말하는 거지?”
“그렇지.”
“조운찬 교수님 프로젝트 끝나면, 내가 너한테 투자해 볼게.”
“……!”
“그 돈으로 사람을 모으고 팀을 꾸려 봐.”
“그게 정말이야, 우진?”
“팀 잘 꾸리면, WJ 스튜디오에 들어온 일들을 조금씩 넘겨줄 수도 있겠지.”
WJ 스튜디오는 이제 국내 어떤 설계사무소보다도 인지도가 높고 덩치가 큰 회사가 됐다.
그런 만큼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쉼 없이 의뢰가 들어오는데, 아무리 WJ 스튜디오라 해도 그 모든 프로젝트들을 전부 진행할 수는 없다.
특히 회사 규모가 규모인 만큼 자잘한 프로젝트는 맡기 어려운 상황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
제이든이 디자인 팀을 꾸려서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다면, 그런 일거리들을 던져주며 제이든을 키워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Bloody Hell!”
“뭐야, 싫어?”
“그럴 리가! 우진은 미쳤어! 미쳤다고!”
“징그럽게 왜 이래?”
“아무래도 우진은 우리 아빠보다 날 더 잘 아는 것 같아.”
“……?”
“사실 어제 아빠랑 싸웠어.”
“왜?”
“내가 스튜디오를 차리면 안 되냐고 했더니, 아빠가 그랬거든.”
“뭐라고?”
“헛소리하지 말고 WJ 스튜디오 인턴으로 들어가서, 우진에게 열심히 일이나 배우라던데?”
“…….”
우진은 제이든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푼 게 아니다.
제이든이 조운찬 교수의 프로젝트에 프리랜서로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충분한 경험과 역량이 생겼다고 판단돼야 투자할 생각이었으니까.
조운찬 교수의 프로젝트도 최소 2년 이상은 걸릴 프로젝트였으니, 그 정도 지나면 제이든이 디자인 팀을 꾸릴 만한 역량이 생길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니까 다짜고짜 제이든이 스튜디오를 지금 차리겠다고 한다면, 욕부터 튀어나올 것은 우진이라고 해도 콜튼과 다를 바 없단 소리.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제이든은 신났고, 그런 그를 보며 우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이든이 빨리 성장했으면 좋겠네. 그래야 스타 디자이너 제이든이라는 말 앞에, WJ 스튜디오의 수석디자이너라는 수식어를 붙여줄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시간은 또 빠르게 흘러갔다.
제이든에게 영입, 혹은 투자(?)제안을 한 다음 주가 바로 2월이었고, 2월은 우진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졸업이라는 행사에 별다른 의미부여를 하진 않았다.
사실 졸업을 한다고 해도 다른 학부생들처럼, 크게 일상이 바뀔 일은 없는 우진이었으니 말이다.
졸업식이 끝난 뒤에는 민선이 드디어 WJ 스튜디오에 합류했다.
WJ 스튜디오의 인사이동은 5월이었지만, 어차피 WJ 스튜디오 내에 전시 디자인 파트는 새로 신설하는 부서였으니 그 시기에 민선이 꼭 맞춰서 입사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대대적인 조직구조의 개편. 그리고 새로운 실력자들의 영입과, 체질 개선.
연초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우진은, 계획했던 일들을 착착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바삐 시간을 보내다 보니, 새해도 어느새 5월이 훌쩍 다가왔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