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영입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경완과 잠시 눈이 마주쳤던 우진은, 말없이 다시 불판 위의 고기를 한 점씩 집어 먹었다.
딸깍- 딸깍-
우진은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경완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우진의 영입 제안은, 결코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경완은 지난 몇 년 동안, 우진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것은 천웅 안에서 협업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가능했고, 그에 더해 계속 임원으로서 승승장구 중이었으니.
언젠가 WJ 스튜디오에서 일하게 될 날이 온다 하더라도, 거의 10년은 지난 뒤의 일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막 전무승진을 앞둔 이 시점.
우진이 이런 제안을 직접적으로 해 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경완은 혼란에 빠진 것이었다.
딸깍-
말없이 계속 고기를 집어 먹는 우진을 보며, 경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이직이라고 한 거지?”
“네, 상무님.”
“이직하면 난 거기서 뭘 하는데?”
경완의 물음에, 우진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저랑 같이 경영하셔야죠.”
“경영?”
“저희, 올해 목표 매출액이 천억이 넘거든요?”
“그런데?”
“이제 상장 준비도 해야 하고…….”
“…….”
“설계 디자인 쪽이야 제가 시스템 다 만들어 뒀지만, 솔직히 시공 파트는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요.”
“음…….”
“상무님이 저희 시공 파트 좀 키워주셨으면 좋겠어요. 권한은 충분히 드릴 겁니다.”
연봉에 대한 이야기는 두 사람 모두 굳이 꺼내지도 않았다.
어차피 연봉은 천웅의 전무급 연봉 이상으로 맞춰줄 터였고, 현시점 경완에게 WJ 스튜디오의 매력은 월급이 아니었으니까.
경완의 입장에서 WJ 스튜디오의 가장 큰 매력은, 업계의 그 어떤 회사와도 비교되지 않는 성장 가능성.
당장에 덩치만 놓고 본다면 천웅건설의 2할도 채 되지 않는 게 WJ 스튜디오의 규모였지만, 천웅은 이제 성장이 끝난 회사였다.
이 이상 성장을 하려면 더 큰 혁신과 도전이 필요한데, 그런 수준의 격변은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우진은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경완의 귀에 가장 매력적으로 들릴 만한 이야기를 하였다.
권한을 충분히 주겠다.
천웅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민에 빠져있는 경완을 향해, 우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상무님도 아시다시피, 천웅은 결국 천씨 집안의 회삽니다. 그러니까……. 천 씨 핏줄이 아니라면, 이 이상은 상당히 힘드실 겁니다.”
우진의 얘기에 경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천종걸이 연배에 비해 깨어있는 경영자라고는 해도, 결국 경완이 전무이사 이상으로 승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으니까.
조만간 천종걸이 회장 자리로 올라가면 그의 사촌 동생이 천웅건설의 사장 자리에 내정되어 있었고.
이어서 수년 내에 종걸의 친아들이 부사장 자리를 꿰찰 테니 말이다.
천종걸이 30대의 나이에 천웅건설의 부사장이 됐던 것처럼 말이다.
‘사장님 아드님이, 모난 인물도 아니고 말이지.’
경완이 부사장 자리까지 올라갈 방법은 딱 하나.
2년 뒤에 또다시 곧바로 승진하는 것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종걸의 아들이 사장 자리에 올라간 뒤에나 부사장이 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최소 10년. 아니, 15년은 뒤의 일이니까.
그리고 그때까지도 경완이 천웅에서 버티고 있을 확률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경완은 쓴웃음을 지었고, 그런 그를 향해 우진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시기엔, 상무님 나이가 너무 젊지 않습니까?”
이 한 마디가 사실, 우진이 하고 싶었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였다.
“야, 너한테 젊단 얘기 들으니까 뭔가 기분이 묘하다.”
“뭐 저에 비교하면 아재지만…….”
“짜식이……!”
“어쨌든 저도 꽤 생각 많이 하고 드리는 제안이에요.”
“알아, 인마. 네가 생각 없이 이런 얘길 할 놈은 아니지.”
“흐흐, 잘 아시네요.”
경완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맥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제안을 들었음에도, 벌써 절반은 마음이 동해버린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젠장.”
대화하는 동안 불판 위에서 반쯤 타버린 고기를 집어 먹은 경완이, 우진을 다시 응시하였다.
우진을 누구보다 잘 알고 WJ 스튜디오의 성장 과정을 전부 지켜본 경완의 입장에서, 결코 거절하기 어려운 매력적인 제안.
그렇다고 이대로 넙죽 수락할 수는 없는 건, 천웅건설의 전무라는 타이틀도 못지않게 매력적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경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서 대표.”
“네?”
“왜 하필 지금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딱 2년만 기다려 주면 안 되냐?”
“왜요?”
“모르는 척할래? 전무 임기 2년 말하는 거잖아.”
“흠.”
“2년 뒤에 깔끔하게 퇴사하고 넘어오면 그림이 예쁘잖아.”
“그림이라는 게 원래,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죠.”
“뭐?”
“그건 상무님 시점에서 예쁜 그림이잖아요.”
“…….”
“너무 다 가지려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하.”
경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제안이라 생각했는데, 우진이 단칼에 거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튀어나온 그 입술을 본 것인지, 우진이 다시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상무님.”
“뭘?”
“지금 저희 회사, 창립한 지 몇 년 됐습니까?”
“음……?”
조금 맥락에서 벗어나는 듯 보이는 우진의 질문에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인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가 2010년 여름? 그쯤에 창업했으니까…….”
“올해가 2014년이죠?”
“4년 됐네.”
“4년 차죠. 만으로는 이제 3년 좀 넘은 거나 다름없고요.”
이제 4년 된 회사다.
그 4년 만에 디자인‧설계 방면에서는 업계 최고의 회사로 성장한 곳이 바로 WJ 스튜디오다.
우진은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고, 나아가 경완이 언급한 2년이라는 시간의 가치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이제 전무발령이 난 경완의 시점이 아닌, 고작 4년 만에 이렇게 성장한 WJ 스튜디오라는 회사의 시점에서 말이다.
“그러면 2년 뒤에, 저희 회사가 어떻게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
“2년 후까지 WJ 스튜디오를, 저 혼자서 경영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한층 진지해진 우진의 어조에, 경완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진의 말에 반박할 만한 이야기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은 탓이다.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미친 회사였군.’
지금 WJ 스튜디오에도 물론 이사진은 있다.
석현이 이사였고 진태가 이사였으며, 재무이사(CFO)와 행정이사(CAO)도 따로 있었으니까.
이 네 사람 모두 천웅건설로 치자면, 전무이사와 같은 직급을 가진 사람들.
하지만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대표이사(CEO)의 역할과 운영이사(COO)의 역할은, 전부 우진의 손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매출 규모가 수백억 단위를 넘어가는 회사에서 지금까지 우진이 이만한 업무를 소화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경완에게 이렇게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2년 뒤까지 WJ 스튜디오라는 회사에, 경완의 자리가 남아있을 수 있겠냐고 말이다.
경완은 우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말없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소주잔이었다.
“술이나 채워 봐.”
“그러죠, 뭐.”
또로로록-
서로의 술잔을 채워 넣은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친 뒤 동시에 술잔을 비웠다.
“크으…….”
“후우!”
아직 경완이 결론을 얘기하진 않았지만, 굳이 더 말하고 싶지는 않은 우진이었다.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전부 전달했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중요한 결정을 당장 내어놓으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얘기였으니까.
물론 이미 우진은,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오실 거면서 튕기시기는…….’
금세 벌겋게 달아오른 경완의 얼굴을 본 우진은 피식 웃었다.
그러자 경완이 심통 맞은 얼굴로 물었다.
“왜 웃냐?”
“재밌잖아요.”
“뭐가?”
“수서역 공사판에서 상무님한테 일당 받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제가 상무님 월급 드리게 생겼으니…….”
우진의 대답에 경완이 버럭 하였다.
“야, 나 아직 결정 안 했다?”
“누가 뭐래요?”
“으……. 이 자식은 갈수록 더 능구렁이가 되는 것 같냐, 어째.”
“흐흐. 원래 끼리끼리 노는 법이죠.”
“뭐?”
“제가 상무님이랑 왜 친하겠습니까.”
“어후. 이놈은 진짜…….”
두 사람의 술잔이 다시 부딪쳤다.
그리고 언제 경완의 이직에 대한 이야기를 했냐는 듯, 두 사람은 평소처럼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
오늘 우진의 제안에 대한 경완의 대답이 어떻게 돌아오든 두 사람의 관계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테니까.
“야, 근데 오늘 내가 계산해야 해?”
“쪼잔하게 왜 이러십니까.”
“헤드헌팅 하러 왔으면, 밥은 네가 사야 하는 것 아냐?”
“제가 사면, 이직은 확정인 거죠?”
“젠장. 됐다, 됐어. 내가 산다, 사.”
고깃집에서 나온 두 사람은, 2차로 포차에 가서 밤늦게까지 대작을 하였다.
하여 그들이 술집에서 나온 시간은 거의 새벽 두 시가 넘었을 즈음.
“상무님, 괜찮아요? 택시 불러 드릴까요?”
“야, 뭐 얼마나 마셨다고. 괜찮아. 괜찮아.”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잡던 경완이, 문득 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야, 서우진.”
“예?”
“근데, 너. 이건 알고 있지?”
“뭐요?”
장난기 어린 표정이 된 경완이, 우진을 향해 씨익 웃었다.
“나 만약 이직하면, 대표님께는 니가 가서 쇼당 쳐야 한다?”
텅-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택시에 올라타는 경완을 보며, 우진은 어이없는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그리고 다음 순간, 우진의 입에서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경완이 지금,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천 대표님께 양해도 안 구하고 얘기 꺼낸 줄 아나.’
사실 우진은 작년 연말부터, 종걸과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모종의 딜(?)과 함께, 이미 경완을 데려가는 것에 대한 허락을 받아 둔 상태였다.
경완이라는 인재는 천웅에서도 분명 아쉬운 인재였지만 대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포지션은 아니었고.
양사 간의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생각하면 천웅의 입장에서도 경완의 이직이 나쁘지만은 않은 그림이었던 것.
‘그러고 보니 천 대표님……. 올해 일부러 아재 승진시킨 거 아냐?’
잠시 천종걸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떠올리던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택시를 잡았다.
끼익-
“성수동으로 가 주세요.”
택시 의자에 몸을 기댄 우진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밤 풍경을 감상하였다.
오랜만에 알콜이 꽤 많이 들어가서인지 몸은 피곤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생각만 하던 이야기를 꺼내 놓아서인지 마음만은 편한 우진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