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또 한해가 지나
새해가 밝았다.
그리고 우진은 새해 첫 주부터, 학기 중에는 잘 가지도 않던 학교에 찾아갔다.
수업은 당연히 아니다.
계절학기가 아니라면, 1월에 수업이 있는 대학교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우진이 오늘 학교에 온 이유는, 조운찬 교수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우진이 왔구나. 이쪽으로 앉거라.”
우진이 조운찬 교수를 찾아온 이유는, 사죄(?)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졸업 전시 불참에 대한 사죄.
우진은 2013년에 졸업반이었고 졸업 전공 수업으로 조운찬 교수의 수업을 들었는데, 졸업 전시 기간이 마곡 컨벤션센터 프로젝트 준비 기간과 겹치는 바람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워낙에 특수 케이스였고, 때문에 졸업 동기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우진의 졸업 동기들 대부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우진 오빠 졸전 못한대.]
[왜?]
[이번 마곡 프로젝트 때문에 너무 바쁜가 봐.]
[그럼 유급인가?]
[뭐, 어떻게 대체해서라도 졸업은 하지 않겠어? 그 오빠가 학교 일 년 더 다녀서 뭐해.]
[하긴……. 그나저나 진짜 다행이다.]
[다행? 뭐가?]
[우진 오빠 졸작 옆에 우리 작품 세워야 한다고 생각해봐.]
[음……. 다행이 맞네.]
하지만 그런 여론과 별개로.
졸업 전시조차 출품하지 않고 어물쩡 졸업하는 것을, 지도교수 입장에서 언급 한번 없이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운찬은 우진과 약속을 잡은 것이다.
2학기의 최종 성적이 나가기 전에 말이다.
“요즘 일은 어때. 잘 되고 있냐?”
“저야 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올해, 졸업해야지?”
“그, 그렇죠…….”
“하하. 졸작 없이 졸업한 우리 학과 첫 번째 학생이 되려나.”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거야 없지. 네가 마곡 프로젝트 딴 덕에, 작년에 우리 지도교수들 어깨에 힘 좀 들어갔으니까.”
학과 출신 졸업생이 사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도, 학과의 인지도는 크게 올라간다.
하물며 재학생인 우진이 만들어낸 성과가, 국내의 어지간한 스타 건축가도 해내기 어려운 성과임에야.
교수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었다.
운찬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래. 성적은 어떻게 매겨줄까.”
“네?”
“어찌 됐든 성적을 줘야 졸업할 거 아냐.”
“아, 제가 염치없이 어떻게 좋은 성적을 달라고 말씀드립니까.”
우진의 말에, 운찬은 실소를 흘리며 답했다.
“웃기는 놈일세. 선택지는 애초에 두 개뿐이야. D 아니면 F. 둘 중에 하나 골라.”
“하, 하하.”
운찬의 장난에 멋쩍은 표정이 된 우진은, 대답 대신 뒷머리를 긁적여야 했다.
운찬은 선택지가 두 개라고 했지만, 사실 하나인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운찬이 다시 말했다.
“D를 받아도, 올해 졸업은 하고 싶은 거지?”
“물론이죠, 교수님.”
“일 년 더 다니면 안 돼?”
“살려주세요…….”
“하하하.”
우진의 너스레에 웃음을 터뜨린 운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좋다. 그럼 내 재량으로, F는 면하게 해 줄게.”
그에 재빨리 고개를 꾸벅 숙이는 우진.
“감사합니다.”
하지만 운찬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예상치 못했던 운찬의 말에, 우진은 조금 당황한 목소리가 되었고…….
“네? 조건이요?”
그에 운찬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우진을 향해 파일을 하나 건네었다.
“이거, 읽어봐.”
툭-
“음…….”
파일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조형관 B동, 리모델링 사업 계획안>
“이게…… 뭡니까?”
우진의 질문에, 운찬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하였다.
“뭐긴 뭐냐. 보이는 그대로지.”
“음, 조형관 B동이면…….”
“매년 졸전 열리는 전시관 있잖아.”
“아, 거기를 리모델링해요?”
“그래. 건물이 좀 오래되긴 했으니까. 이번에 이사장님이 돈 좀 쓰시려는 모양이더라고.”
뭔가 불길한 낌새를 느낀 우진이, 조심스레 운찬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 사업계획안을 왜 제게……?”
이어서 우진과 눈이 마주친 운찬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파일을 톡톡 두들겼다.
“졸작도 안 했으면……. 학교에 뭐라도 남기고 떠나야지, 서 대표?”
“설마…….”
“졸업식 전까지 디자인 제안서 만들어 오도록.”
그리고 조운찬의 그 말에, 우진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개는, 정말 상상도 못 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으아니, 교수님! 이건 스케일이 다르잖아요! 졸작을 어떻게 전시장 리모델링으로 대체를…….”
“뭐가 달라? 학교 1년 더 다닐래?”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희 회사에 시공까지 줄게.”
“크흑…….”
“그러니까 해 와. 매출 올려준다니까?”
“…….”
결국 혹을 떼기 위해 연초부터 학교에 온 우진은, 더 큰 혹(?)을 붙여 돌아가게 되었다.
‘으……. 그래. 뭐, 학교에 내 디자인 하나 남겨놓고 졸업하는 것도 의미가 있긴 하니……. 기분 좋게 생각해야지.’
하여 예상치 못하게 일이 늘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운찬과 기분 좋게 점심을 함께한 우진.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교수님!”
“뭐, 네가 자주 올 거라고는 기대도 안 한다. 졸업식 때나 보겠지.”
“…….”
“제안서, 잊지 말고.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서우진이 설계로 진행한다고 하면, 이사장님께서 좋아하실 거야.”
“네엡…….”
학교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온 우진은, 다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는 전부 외근으로 잡아두었기에, 회사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바쁘고만, 바빠.’
지금 우진이 향하는 곳은, 최종 점검이 필요한 몇몇 현장들.
그리고 현장을 다 돌고 나면 저녁 약속까지 잡혀 있었는데, 그 위치는 바로 천웅건설의 사옥이 있는 종각역이었다.
* * *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시계를 보는 경완의 표정은 평소보다도 한결 더 밝았다.
‘이제 슬슬 정리해 볼까?’
사실 요즘 경완은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내부 인사명령으로 인해, 실적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천웅건설 최연소 상무를 달았던 그가, 실적과 공로를 인정받아 이번에 전무로 승진하게 된 것.
승진이 아니면 보통 실직(?)을 하게 되는 치열한 임원들의 인사경쟁 속에서, 경완은 이번에도 승리하게 된 것이다.
“읏차.”
물론 오피셜한 인사명령이 뜨는 것은 3월이다.
하지만 임원진의 경우 보통 그 전에 이미 내정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3월이면 경완은 ‘전무 보’가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경완은 오늘 누군가에게 한턱낼 예정이었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세요!”
“네, 상무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예, 상무님! 내일 뵙겠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탄 경완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1층에 내렸다.
차는 가져오지 않았다.
아내에게 며칠 전부터 미리 허락도 구해 뒀으니, 오늘은 오랜만에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도 마실 생각이었다.
오늘 약속은 경완이 누굴 만나 술 마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유일하게 호의적인 딱 한 사람과의 약속이었다.
[오늘, 좀 늦는 거 알지?]
[그, 서우진 대표님 만난다면서?]
[맞아.]
[너무 많이 마시진 말고. 해뜨기 전에만 들어오세요. 안부도 좀 전해주고.]
[자기 너무 사람 차별하는 거 아냐? 지난번에 경식이랑 술 마신다고 할 때는, 12시 넘으면 숨질 각오하라더니…….]
[당연하지.]
[응?]
[서 대표님 덕에 산 청담 클리오가 지금 얼만데.]
[…….]
[가서 대표님 극진히 모시고, 또 괜찮은 투자처는 없는지 꼭 물어보고.]
[…….]
[알겠죠? 왜 대답이 없어?]
[알겠어. 아주 극진하게 모시고 올게.]
아침에 와이프와의 대화를 떠올린 경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 웃었다.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그래도 우진을 거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아내의 말은 기분이 묘했으니 말이다.
‘쳇, 편하게 한잔할 수 있어서 좋긴 한데……. 뭔가 지는 느낌이란 말이지.’
어쨌든 아내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경완은 오늘 인근에서 가장 맛있고 비싼 소고기집을 예약해 뒀다.
남자 둘이서 마음 놓고 먹으면 수십만 원 이상 깨질 테지만, 우진에게 승진 턱으로 그 정도가 아까울 리는 없었다.
딸랑-
“어서오세요. 예약하셨나요?”
“네. 박경완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두 분이시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어 내린 경완은, 예약된 자리에 앉아 우진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상무님!”
반가운 얼굴이, 경완의 두 눈에 들어왔다.
* * *
경완은 오늘 아주 마음 편히 우진을 만나러 왔지만, 우진은 좀 달랐다.
‘흠……. 경완 아재가 벌써 전무라니……. 내 기억으로 이 아저씨, 전무 못 달고 퇴직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오늘 경완의 승진 턱이 되었지만, 사실 우진은 그것 외에 다른 할 이야기가 있어 약속을 잡았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야, 상무님 진짜 오랜만입니다. 벌써 또 승진이라니. 축하드려요.”
“벌써라니 짜샤. 우리 회사, 임원 승진 못 하면 짤리는 거 몰라?”
“뭐, 어디에나 예외케이스는 있는 법이죠.”
“깐족거리긴……. 오랜만에 봐도 여전하네, 서 대표.”
“원래 사람은 잘 안 바뀝니다. 갑자기 사람이 바뀌면 죽을 때가 된 거라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단 앉아. 고기부터 시키자.”
“넵.”
“뭐 시킬까?”
“일단 꽃등심부터 시작하시죠.”
“좋지.”
그리고 우진이 경완에게 하려 했던 그 이야기는, 꽤나 중요한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을 때까지, 우진도 꽤 오랜 시간 고민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치이익-
해서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 고기를 뒤집으면서도, 그 앞에 마주 앉아 경완과 실없는 잡담을 떨어 대면서도.
우진은 속으로 계속 고민했다.
오늘 하려던 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가장 좋을지 말이다.
“야, 고기 앞에 두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빨리 집어먹어, 짜샤.”
“먹고 있습니다. 소고기는 천천히 음미해야죠.”
“그런 놈이 지난번엔, 나 화장실 다녀올 동안 한 판을 싹 다 비웠냐?”
“음……. 제가 그랬던가요?”
“요놈 봐라. 못 본 새 더 능글맞아졌어.”
하여 어느 정도 고기를 집어 먹고 배가 좀 차기 시작했을 때, 우진은 경완에게 슬슬 운을 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상무님.”
“응?”
“요즘 회사 일은 좀 어때요. 할만해요?”
“나야 맨날 똑같지 뭐.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그리고 지금까지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경완을 향해 마치 별 것 아니라는 듯, 툭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혹시 상무님, 이직하실 생각 없나 해서요.”
“뭐……? 뭐라고?”
“저희 회사 어때요. 연봉은 맞춰 드릴게요.”
“…….”
“후우. 승진 못 하셨어야 싸게 주워오는 거였는데. 천웅에선 이 아저씨를 왜 이번에도 승진시킨 거람…….”
우진의 말을 듣던 경완은,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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