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또 한해가 지나
2013년 가을.
WJ 스튜디오는 또 한 번 새로운 도약에 성공하였다.
[마곡 MICE 단지 컨벤션센터 설계 공모, 서우진의 WJ 스튜디오에서 최종 입찰!]
최종 프레젠테이션이 있던 그 날 곧바로 심사위원의 투표가 있었고, 총 열 명의 심사위원 중 여섯 명이 WJ 스튜디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디자인 그룹 ALuna, “최고의 디자인과 최고의 설계가 선정되었다.”]
[“마곡 컨벤션센터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컨벤션센터 중 한 곳이 될 것.”]
해외 자본이 주관하는 이런 초대형 사업장에서 국내 설계사무소의 작품이 입찰에 성공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이는 업계에서 큰 이슈가 되어 번져나갔으며, 대중에게도 꽤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워낙 프로젝트가 큰 건이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WJ 스튜디오의 대표가 ‘우진’이라는 인지도 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었던 이유였으니까.
[LTK 금융그룹 이사진. “마곡 MICE 단지를, 세계적으로 손에 꼽히는 최고의 업무지구로 성장시킬 것.”]
그래서 WJ 스튜디오의 마케팅팀은, 이슈가 번지기 시작한 순간 발 빠르게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LTK그룹으로부터 허용받은 범위 내에서, 일부 디자인 랜더컷까지 기사에 실어 올리며 퍼다 나른 것이다.
[WJ 스튜디오, 세계 최고의 공간디자인 그룹 <블랙테일즈> 누르고, 마곡 컨벤션센터 설계자로 선정.]
[WJ 스튜디오 대표이사 서우진, 사업 영역을 점차 글로벌로 확장해 갈 것 암시.]
사실 마케팅팀에서 이슈를 퍼다 나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서우진과 WJ 스튜디오는 어차피 근 몇 년 동안 한 번도 식었던 적 없는 뜨거운 감자였고.
그러다 보니 대충 땔감만 던져 놓으면 불이 활활 타올랐던 것이다.
우진과 관련된 기사 자체가 트래픽이 일정 수준 이상 보장되는 이슈였으니, 기자들 입장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게 당연했다.
[사업비 최소 1조. 설계비용만 최소 수백억? 마곡 컨벤션센터의 설계권을 따낸 WJ 스튜디오는 어떤 회사?]
출근해서 그런 기사들을 확인하던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인터넷을 종료했다.
“설계비용이 수백억이라고……? 그랬으면 좋겠네, 진짜.”
기분 좋은 기사들 사이에서 말도 안 되는 과장 기사를 발견하니 헛웃음이 새어 나온 것이다.
툭-
컵에 조금 남아있던 모닝커피까지 입안에 털어 넣은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실장님, 준비되셨죠?”
[예, 대표님. 지금 출발하십니까?]
“네. 이제 슬슬 출발하면, 시간 맞춰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외투를 걸쳐 입은 우진은, 스마트 패드가 담긴 작은 클러치 백을 들고 대표실을 나섰다.
그가 지금 향하는 곳은 청담동.
우진은 오늘, 청담동에서 하루 종일 일정이 있었다.
띵-
우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기다렸던 비서실장이 차를 가지고 1층 정문으로 나왔다.
부우웅-
대로를 따라 금세 성수동을 빠져나온 우진의 차는, 곧 영동대교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 * *
소정은 오늘, 오랜만에 출근을 하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천년의 그대>와 관련된 각종 비즈니스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오늘은 꽤 특별한 행사에 초대받았으니 말이다.
단순히 행사라기보단 파티에 가까운 일정이었지만, 회사에는 이렇게 알려놓았다.
“오늘 임수하 배우님 광고주 미팅 있어서 회사 못 들어가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실장님.”
[광고주…… 미팅이요?]
“청담 아르코 있잖아요.”
[아……!]
“오늘 관련 행사 있어서 수하 씨랑 같이 청담동 가니까, 결재받으실 거 있으면 책상 위에 올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뭐, 틀린 얘기도 아니고 말이지.’
오늘 소정이 초대받은 행사는, 말 그대로 VVIP 행사였다.
WJ 스튜디오에서 이번에 론칭한 <청담 아르코>를 계약한 고객들을 포함하여, 각 분야에서 저명한 위치에 있는 다양한 VIP들을 초청한 행사였으니 말이다.
행사 장소는 청담에 있는 WJ 스튜디오의 아르코 갤러리.
청담 아르코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모델하우스부터 시작해서 모든 내부 공간이 최고의 자재들로 세팅된 이 아르코 갤러리가, 오늘 VIP 행사의 장소였던 것이다.
우진의 말에 의하면 초대 인원은 정확히 100명이었고, 초대장을 보낸 사람들 중 80퍼센트 이상이 참석 의사를 밝혔다고 하였다.
그래서 소정은 오늘 행사를 여러모로 기대하고 있었다.
사업가인 그녀에게, 이 정도로 많은 VIP를 만날 수 있는 행사는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끼익-
사옥 앞에 커다란 SUV 한 대가 멈춰 서자, 소정은 곧바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런데 운전석에 앉은 얼굴이 뜻밖의 인물이었는지, 그녀는 순간 멈칫하였다.
“대표님, 어서 타. 안 타고 뭐해?”
“뭐야, 네가 직접 운전해서 온 거야?”
“매니저 오빠 그냥 쉬라고 했어.”
“대배우님이 너무 프리하게 움직이는 거 아냐?”
“어차피 소속사 대표님도 같이 가시는데 뭐. 흐흐.”
운전대를 잡고 있는 수하를 향해, 소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매니저가 소정을 태우고 수하의 집 앞으로 가서, 그녀까지 합류해서 청담동으로 이동하는 게 정해진 일정이었으니까.
몇 배는 비싸진 본인 몸값(?)은 생각 않고 아직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수하를 보며, 소속사 대표님은 한숨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 오늘 이거 말고 다른 일정 있는 것도 아니니까.”
“끝나고 우진이네 놀러 가기로 된 거 아냐?”
“뭐야, 난 몰랐던 일정인데……?”
“앗, 내가 말실수 한 건가?”
“……. 서 대표 너무하네.”
절친한 친구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인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청담동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출발한 지 삼십 분 정도가 지났을 즈음.
텅-!
청담동 아르코 갤러리에 도착한 두 사람이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재엽이었다.
“어, 수하! 안녕하세요, 강 대표님!”
“재엽 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하하, 저야 별일 없죠.”
소정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재엽을 향해, 수하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오, 뭐야. 재엽 오빠! 오빠도 오늘 오는 거였어?”
그에 재엽이 수하를 째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난 여기 초대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오빠 계약 안 했다며.”
“야, 난 청담 클리오도 아직 입주 못 해봤는데, 집을 왜 또 사.”
“그거 팔고 사면되지. 나도 이번에 클리오 팔고 계약한 거야.”
“우리 집은 펜트잖아……. 나도 펜트 한 번 살아보자.”
“음……. 펜트하우스는 인정.”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잠시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소정은, 먼저 갤러리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외관부터 시작해서 싹 다 최고급 자재와 디자인으로 리모델링했다는 우진의 얘기가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은, 갤러리에 시선이 닿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와, 진짜 고급스럽네.’
소위 말하는 재벌가에서 나고 자란 소정의 눈에도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 아쉬운 부분이 없을 만큼, 깔끔하지만 럭셔리한 마감재로 덮여 있는 갤러리의 내부 인테리어.
소정이 안쪽으로 들어서자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나와 작은 팸플릿을 건네었다.
“오늘 행사 일정이 담긴 팸플릿입니다.”
“고마워요.”
“내부 공간은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하시며, 세미나는 20분 뒤에 시작될 예정입니다.”
“세미나는 몇 층이죠?”
“3층 라운지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팸플릿을 쭉 훑던 소정의 두 눈이 살짝 빛났다.
이 아르코 갤러리의 행사는, 그녀가 봤던 어떤 행사보다도 특이한 면이 많았으니 말이다.
‘건축디자인 세미나에 투자 세미나, 거기에 브랜드 소개에 디너파티까지…….’
뭔가 언밸런스한 주제들이 모여있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그것들이 어우러지는 특이한 행사가 바로 오늘 아르코 갤러리의 행사였던 것이다.
로비 중앙을 따라 원형으로 이어진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소정은 갤러리의 내부 공간들을 감상하였다.
분명 모던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이 베이스가 되어 있는 인테리어 디자인이었건만.
그 어떤 호화로운 보석과 장식들을 발라놓은 인테리어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의 인테리어였다.
‘이것도 다 서 대표가 디자인한 거겠지……?’
디자인 하나하나를 훑어보는 소정의 두 눈은, 어느새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VIP로서 이 행사에 초대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이 <청담 아르코>를 계약한 고객이기도 했으니까.
본인이 이년 뒤에 입주하게 될 이 주거공간을 이렇게 미리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설레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내부 공간을 한 바퀴 돌고 3층에 도착할 즈음.
타이밍 맞게 세미나가 시작되고 있었다.
단상에 선 사람은 당연히 우진.
“안녕하십니까, 서우진입니다. 오늘 저희 아르코 갤러리 행사에 와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진과 눈이 마주친 소정은 한쪽 눈을 찡긋하였고, 그에 우진도 웃으며 가볍게 눈인사를 하였다.
이어서 자리에 앉기 위해 걸어 들어가던 소정은,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미나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대부분 낯설지 않았으니 말이다.
‘……!’
소정과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물론 친분이 있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엇, 강 대표님!”
“진명 씨도 여기…… 초대받았어요?”
“하하, 전 계약했죠.”
“정말요?”
“설마 강 대표님 이웃 된 건가요?”
대부분은 실제로 소정과 친분이 있어서 낯익은 것이 아닌, 매체에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기업인도 있었고 정치인도 있었으며, 이렇게 연예인도 있었다.
“사실 호기심에 상담받았었는데, 그냥 그날 바로 도장 찍었어요.”
“후훗, 저도 그랬죠. 그 마음 이해해요.”
“강남. 것도 청담에……. 이런 퀄리티의 타운하우스가 언제 들어오겠어요?”
“맞아요. 저도 처음 본 순간,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그리고 저기 저 서우진 대표님이……. 말을 어찌나 잘하시던지…….”
윤진명은 수하만큼 인지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름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중견 배우였다.
그리고 오늘 이 아르코 갤러리 행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이상으로 인지도 있는 VIP들.
그런 이들의 면면을 본 소정은, 새삼 우진의 인지도에 놀랐다.
정확히는 WJ 스튜디오라는 기업과 서우진이라는 사람의 인지도가, 이만한 VIP들을 움직이게 할 만큼 대단해졌다는 의미였으니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청산유수처럼 세미나를 진행하는 우진을 보며, 소정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대단하단 말이지.’
WJ 스튜디오 기획실의 노력과 준비 덕분인지, 아르코 갤러리의 행사는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세미나가 이어지면서 초대받은 거의 모든 인원이 아르코 갤러리에 도착하였고.
철저히 프라이빗한 환경 속에서 모든 행사는 깔끔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프라이빗하게 진행된 VVIP 행사라 하여도, 이와 관련된 소스가 완전히 차단될 수는 없는 노릇.
행사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아르코> 브랜드와 관련된 기사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