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93화 (293/315)

293화

Exhibition Design

전시 디자인은 공간디자인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 안에 있는 하나의 디자인 영역이다.

하지만 다른 공간디자인의 영역들과 확실히 차별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디자인의 범위라고 할 수 있었다.

디자인의 범위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의 물리적인 범위?

당연히 그런 의미에서의 범위를 말함은 아니었다.

다만 그 ‘범위’라는 것은, 전시디자이너가 ‘디자인해야 할 것들’을 의미했다.

“일반적으로 공간을 디자인할 때, 우리는 해당 공간에 들어설 어떤 기능이나 컨텐츠를 위한 고민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전시디자이너는, 일부 컨텐츠까지도 직접 고민하고 기획해야 하지요.”

예를 들어 어떤 화장품매장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의뢰받았다고 생각해 보자.

디자이너는 이 매장의 공간을 디자인할 때, 클라이언트가 ‘가지고 있는 컨텐츠’를 돋보일 수 있도록 하는 디자인을 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 매장에서 판매하는 화장품이 소비자들의 시선을 더욱 사로잡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매장에 처음 방문하는 소비자들이 공간에서 좋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

그리고 이 공간을 의뢰한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일반적으로 이런 것들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전시디자이너에게는 좀 더 넓은 범위의 고민이 허락된다.

전시주제에 부합하고 이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전부 전시 디자인의 영역 안에 포함되어버리니 말이다.

방문자들이 전시장 내에서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미니게임부터 시작해서, SNS 인증 이벤트나 각종 체험이벤트 등.

그 모든 컨텐츠의 기획이 공간디자인과 결부되면서, 전부 전시 디자인 안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희 WJ 스튜디오가 전시장이라는 공간을 디자인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가치가 바로 ‘공간의 자유도’였습니다.”

우진의 말에, 전시 디자인 관계자 몇몇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적어도 전시 부스 안쪽에서만큼은, 제가 임의로 공간의 용도를 정의 내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요.”

전시공간을 설계하면서 우진이 떠올렸던 수많은 고민들.

그 고민들은 전부 우진에게 자양분이 되었고, 덕분에 우진의 프레젠테이션은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공간의 용도를 정의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그저 텅 빈 공간으로 남겨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진의 프레젠테이션은, 프로젝트를 준비한 지난 시간 동안 우진이 했던 고민과 사고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며 이어지고 있었다.

“완전한 백지를 남겨놓는다면, 그것은 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우진은 자신이 고민했던 부분들을 간접적으로 공유하면서, 그 고민으로 인해 도출된 결론들에 대한 공감을 얻어내는 방식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풀어갔다.

“그래서 저는 공간 일부에 제 디자인과 의도를 담는 대신, 이곳에서 전시 디자인을 진행할 디자이너를 위한 다양한 선택지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양한 선택지.

“그것은 바로, 다양한 구도로 연출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딸깍-

우진이 레이저 포인트를 누르자, 그가 디자인한 전시공간들이 A섹터부터 차례대로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그중에는 마치 거대한 콜로세움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거대한 공간이 있는가 하면…….

딸깍-

마치 고딕 양식의 예배당처럼 십 미터가 넘는 층고를 가진 상방으로 뻥 뚫린 공간도 있었으며.

딸깍-

지그재그로 이어진 복잡하고 기다란 터널 같은 공간도 존재하였다.

“자, 이쪽 존(Zone)에서 C섹터 전시관을 통해 반대편으로 가로지르면…….”

우진은 공간의 흐름에 따라 그 구조를 설명했으며.

그래서 우진의 프레젠테이션을 감상 중인 관객들은, 마치 본인들이 전시의 방문객이 된 것처럼 우진이 디자인한 공간을 천천히 거니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전시장 내부공간에 대한 설명이 십여 분 정도 이어졌을까?

“해서 이 모든 전시 부스의 흐름을 따라 이동했을 때, 사용자들이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공간은…….”

딸깍-

스크린에 마지막 화면이 떠오른 순간.

“음……?”

지금까지 흥미진진하게 그것을 지켜보던 루카스의 입에서 짧은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 * *

루카스는 심사위원석에 앉아, 우진의 프레젠테이션을 지그시 음미하고 있었다.

디자인 Motivation부터 시작하여 조형적 아름다움. 그리고 공간에 대한 이해도와 사용자에 대한 배려까지.

공간디자인과 건축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우진의 프레젠테이션은, 같은 디자이너인 루카스의 기분까지도 들뜨게 만들 정도였던 것이다.

디자이너로서 우진이 가졌던 그 모든 사고의 흐름을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디자이너로서의 대리만족을 우진을 통해 느끼고 있었던 루카스.

그는 오늘 무척이나 즐거웠다.

제이콥과 우진의 발표 모두, 그가 기대했던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올해 봤던 디자인프레젠테이션 중에서는 오늘을 최고로 꼽을 수 있겠군.’

하지만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우진의 피티를 지켜보던 루카스는, 어느 순간 갑자기 당황해야 했다.

‘이 공간은 용도가 뭐지? 광장인가?’

우진이 설계한 공간의 흐름을 따라가던 중, 이해할 수 없는 구조의 공간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우진이 설계한 평면 구조상, 모든 전시 섹터를 돌다 보면 결국 도달하게 되는 컨벤션센터 정 중앙의 커다란 광장.

위치상 팔방(八方) 어디로든 통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투명한 유리벽에 의해 통행을 완전히 막아버린 공간.

우진이 스크린 위에 띄워놓은 랜더컷을 통해 이 공간을 마주한 루카스는, 이해할 수 없는 평면설계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WJ 스튜디오로부터 전달받았던 평면도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걸 왜 못 봤지?’

랜더 컷에 떠올라 있는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단절되어 막혀있는 공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굳이 동선의 핵심이 돼야 할 이 공간을, 이렇게 단절시킨 이유가 있었을까?’

루카스는 혼란스러웠다.

워낙 뜬금없이 등장한 공간구조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무척이나 아름다운 공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섹터와 섹터 사이의 통로를 차단한 이 특이한 유리 구조물은, 공간의 흐름에 따라 둥그렇게 휘감기며 기하학적인 조형을 연출하고 있었고.

뻥 뚫린 천정을 통해 중정(中庭)에 떨어져내리는 햇살은, 그 투명한 조형물을 타고 광장 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이런 공간설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동선의 흐름을 읽지 못해서 이곳을 단절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랬기에 루카스는 우진의 다음 발표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으며.

우진은 그러한 기색들을 이미 읽고 있었다.

“제가 오늘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면서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만.”

우진은 레이저 포인트로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결국 제가 디자인한 컨벤션센터를 가장 Minimal한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부드러움(柔)과 강함(强). 극과 극의 조화일 것입니다.”

우진은 이번 컨벤션센터 디자인을 관통하는 이 하나의 컨셉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였고.

그와 동시에 루카스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이 궁금해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이 중정은, 디자이너로서 제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미를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그 말에 심사위원들의 눈이 살짝 확대되었고, 우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극과 극이 통하는 연결점. 그러니까 그 어떤 공간보다도 디자인적으로 중도(中道)를 지켜야 했던 이 공간에서, 역설적이게도 저는 부드러움과 강함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조형적 언어를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제 공간을 경험하는 모든 방문객들의 뇌리에, 이 공간에 담긴 두 가지 조형성을 확실하게 심어주고 싶었던 겁니다.”

목이 타는지, 우진은 한 차례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장내는 그야말로 쥐 죽은 듯 조용하였다.

모두가 우진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께 제 디자인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지어지게 될 이 컨벤션센터의 방문객들 대부분에게는, 이렇게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겁니다.”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심사위원들의 시선은, 어느새 우진이 아닌 스크린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당연히 루카스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서 저는 이 컨벤션센터를 방문할 미래의 사용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루카스는 비로소 우진의 의도가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모든 사용자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공간에 부조화를 보여줌으로서……. 역설적으로 나머지 공간들의 조화로움을 강조한다는 건가.’

그러한 우진의 의도를 이해한 뒤에 다시 공간을 살펴보자, 루카스는 온몸에 전율이 일기 시작하였다.

무의식 속에서 봤을 때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공간의 조형성들이.

이 단절된 광장과 대비되면서 확연히 살아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허……. 이걸 이기적인 디자인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천재적인 공간의 언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우진의 컨벤션센터는 양극에서 가장 뚜렷한 디자인적 특징을 보이지만, 그 두 가지 디자인 색깔이 만나는 중간지점에서 필연적으로 중화될 수밖에 없었다.

조화라는 이름 아래 중화된 디자인 색깔은 조형적으로 심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우진은 그가 그린 이 컨벤션센터라는 그림의 정 중앙에, 포인트 컬러를 한 점 찍어 올렸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이상 시선을 둘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리에 말이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편리를 추구해야 하며, 수행해야 하는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우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모두의 시선이 다시 우진의 입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의도적인 괴리를 통해 공간의 아름다움을 더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공간의 목적에 충실한 디자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여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모였을 때, 우진은 오늘 가장 하고 싶었던 한 마디를 얘기하였다.

“컨벤션센터를 찾는 사용자들의 목적 안에는,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 또한 포함될 테니까요.”

이 마지막 공간을 끝으로, 모든 전시 부스들을 이미지로 보여준 우진.

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다 해서인지 후련한 표정이 된 우진은, 다시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넘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화면들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전부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스크린에 보여지는 화면들은 지금까지 우진이 보여준 전시공간들을 다시 리바이벌하는 것이었는데.

처음 보여줄 때에는 없었던 모터 쇼의 전시 부스들이 그 안에 디자인되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오오……!”

“저 공간들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다니…….”

“진짜 모터쇼가 저런 느낌으로 열린다면, 엄청 멋지겠는데요?”

천천히 그 화면들을 넘기는 동안 우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불만인 사람은 장내에 아무도 없었다.

이미 한 차례 디자인 의도가 설명된 공간이어서 이기도 했지만, 그저 넘겨지는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까.

그래서 모든 화면이 지나가고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 페이지가 나타났을 때.

“오늘 제 프레젠테이션은 여기까집니다. 긴 시간 함께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LTK한국지사의 대회의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로 가득 차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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