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91화 (291/315)

291화

Exhibition Design

우진은 단상에 올라온 인물을 응시하였다.

까만 수트를 차려입은, 포마드 헤어 스타일의 세련된 남자.

현장에 도착한 우진은 오늘 자신의 경연 상대가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상대가 바로 이 남자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오늘 최종경연의 참가사는 단 두 곳뿐이었으니까.

‘제이콥 페레즈라…….’

디자인 그룹 ‘블랙테일즈’의 수석디자이너이자, 최고의 전시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제이콥 페레즈(Jacob Perez).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본 우진은 더욱 긴장하였다.

프로젝트 규모가 규모인 만큼 어쭙잖은 상대를 만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어려운 상대를 만났음을 직감했으니 말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라스베이거스에 코드리트 브릿지를 설계했던 인물이었지.’

제이콥 페레즈는 분명 2013년인 지금 시점에도 유명한 전시디자이너가 맞다.

하지만 우진의 전생에 그는 앞으로 더욱 유명해질 인물이었고, 그래서 우진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2025년쯤 지어질, 제이콥 페레즈의 작품.

라스베이거스의 코드리트 브릿지는, 세계적으로 손에 꼽힐만한 랜드마크가 됐었으니까.

물론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고, 분명 2025년의 제이콥보다 지금의 제이콥은 경험이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쉽지 않은 상대일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진이 주눅이 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떤 피티를 보여줄지 기대되네.’

제이콥을 보는 우진의 두 눈이 반짝인다.

그의 눈빛에 담겨 있는 것은 호기심과 기대감, 그리고 승부욕이었다.

“반갑습니다, LTK금융그룹 여러분. 그리고 M-Tec 프로젝트 관계자 여러분. 블랙테일즈의 수석 디자이너 제이콥 페레즈입니다.”

제이콥의 단단하고 명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LTK에서 미리 준비해 둔 통역사를 통해 한국어로 동시에 통역되었다.

본사의 임원들이나 ALuna 관계자들은 당연히 전부 영어에 능했지만, 그래도 이곳은 한국이었으니까.

“발표에 앞서 이 중요한 프로젝트의 최종 공모작으로 저희 블랙테일즈의 설계를 선정해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제이콥의 목소리에는 점점 더 힘이 실리기 시작하였다.

“그 기대를 져버리지 않기 위해 저희 블랙테일즈는 전력을 다해 이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왔습니다.”

제이콥이 레이저 포인트를 움직이자, 스크린에 빛이 들어왔으며.

지이잉-

“마곡 MICE 단지의 마지막 한 조각을 완성할 컨벤션센터.”

그 스크린 위에는, 모두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할 만큼 아름다운 조감도가 떠올라 있었다.

“저희 블랙테일즈가 이 설계에 담고자 했던 모든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금부터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창하게 말을 이어가는 제이콥을 한 차례 응시한 우진의 시선은, 곧이어 스크린 위에 떠 오른 블랙테일즈의 설계 조감도에 고정되었다.

이어서 다른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가장 먼저 우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마디.

‘멋지네.’

같은 장소, 같은 환경을 놓고 수백 가지가 넘는 설계와 디자인을 고민했던 우진이었기에 제이콥의 건축에 담겨 있는 노고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우진은 제이콥의 디자인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아름다운 그릇 안에 담겨 있는 내실.

우진은 이 멋진 건물이 담고 있을 철학과 가치가,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우진의 그 궁금증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제이콥은 자신의 건축에 담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창의성은 실수를 허락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실수가 아닌 부분들을 선택하는 것이, 디자인의 과정이라 하였습니다.”

만화가이자 공학자, 그리고 예술가였던 스캇 에덤스.

그의 명언을 인용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이콥의 본격적인 피티가 시작되었다.

* * *

첫 번째 발표를 지켜보던 루카스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본질……. 그것에 더 없이 충실한 설계이자 건축이로군.’

제이콥이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여준 것은, 더 없이 이성주의(理性主義)적인 건축이었다.

철저한 경험과 분석. 그리고 기능과 용도에 입각하여, 모든 설계를 시작하고 마무리한 이성주의적 건축.

제이콥은 전시 디자인이라는 장르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그가 가진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전시기획을 하고 싶은 최고의 컨벤션센터를 디자인한 것이다.

‘군더더기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야.’

조닝(Zoning)을 비롯한 공간구성을 넘어 외관디자인에 까지도 파생된 것이, 제이콥의 가진 이성적인 디자인에 대한 가치관이었다.

이미 디자인된 MICE 단지 내 다른 건축물들과의 조형적 조화.

그리고 MICE 단지 건축물들 간의 긴밀한 연관성과 기능적 간섭.

이런 것들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공간구조가 완성되기 시작하였고, 그 공간구조들을 다듬는 것으로 디자인과 조형적 아름다움을 완성 시켰다.

이것은 확실히 제이콥만의 개성 있는 건축 프로세스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도 건축이지만, 이미 존재하는 소스(Source)를 바탕으로 그 재료를 가장 아름다운 결과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건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제이콥의 발표를 무척이나 집중하여 듣고 있었고, 우진과 같은 현역 디자이너들은 더욱 흥미롭게 그 내용을 곱씹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마곡 MICE 단지라는 사업장에는, 제 손이 닿기 전에 이미 완성된 재료들이 아주 풍부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정해진 제약 안에서 필연적으로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건축가들의 숙명.

“이 재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조형성과 기능성. 그리고 관계성.”

제이콥은 이미 설계와 디자인이 확정된 MICE 단지의 다른 건축물들을, 자신의 디자인에 가미될 ‘재료’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저는 이번 컨벤션센터의 프로젝트가, 이미 절반 정도 완성된 요리를 더욱 아름답고 완벽한 진미(珍味)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자의식이 단단하고 견고할수록, 자신만의 색깔이 담긴 디자인을 확고하게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저희 블랙테일즈는, 그에 가장 충실한 디자인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단한 자의식을 가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그 자의식을 다시 내려놓을 줄 아는 디자인이다.

루카스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제이콥의 디자인에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루카스의 눈에 비친 제이콥의 디자인은, 더 없이 이성적이면서도 충분히 조화롭고, 디자이너가 가진 작가적 욕심마저 기분 좋게 내려놓은 희생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흐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려나……. 성숙한 디자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루카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것으로 저희 블랙테일즈의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거의 한 시간에 걸친 제이콥의 프레젠테이션이 마무리되었고, 그를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짝- 짝짝짝!

하여 루카스는 그 박수갈채 위에, 자신의 진심이 담긴 박수를 더하였다.

* * *

제이콥을 향해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 것은, 우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짝- 짝- 짝-

제이콥은 이번 경연의 경쟁자이기에 앞서 우진과 같은 건축디자이너였고.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우진 또한 얻은 것이 있었으니, 진심을 담은 박수 정도는 아깝지 않은 것이다.

‘디자인 프로세스를 구성해 가는 참신하고 새로운 방식을 배웠군.’

그리고 재밌는 것은, 제이콥의 이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을 보면서 우진의 긴장이 오히려 풀렸다는 점이었다.

이번 최종 프레젠테이션에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강박관념이, 오히려 뛰어난 발표를 듣자 사라진 것이다.

‘이런 경연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프로젝트를 준비했던 시간이 아깝지 않겠어.’

만약 제이콥이 실망스러운 발표를 보여줬다면, 오히려 우진은 지금 힘을 더 바짝 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만약 경연에 패배한다면, 그것은 제이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우진의 실수 때문일 테니.

그런 상황은 용납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이콥의 발표는 우진의 상상보다도 더 훌륭했고, 그래서 우진은 진심으로 홀가분했다.

이 경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을 기꺼이 인정할 준비가 된 것이다.

‘물론 그게, 이 경연에서 져도 된단 얘긴 아니지만…….’

인정할 만한 뛰어난 상대일수록, 패배했을 때의 아픔은 적고 승리했을 때의 성취감은 더욱 높은 법.

그래서 훌륭한 발표를 들은 우진의 의욕은 더욱 불타올랐고, 발표 내용을 정리해 둔 그의 머릿속은 더욱 맑아졌다.

“자, 지금까지 블랙테일즈의 ‘제이콥’디자이너님의 프레젠테이션을 들었습니다. 이에 곧바로 이어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우진과 눈이 마주친 사회자가, 손을 뻗어 그를 가리키며 힘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WJ 스튜디오의 서우진 대표님의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장내에 가득 울려 퍼진다.

이것은 제이콥이 처음 단상 위에 오를 때보다 훨씬 더 요란한 것이었지만, 이곳 발표장을 채운 대부분의 사람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민망하네.’

저벅- 저벅-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단상 위로 올라간 우진이 마이크를 잡아 앞에 놓았다.

“반감습니다, LTK의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심사위원 여러분.”

이번에는 제이콥의 발표 때와 반대로 우진의 입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왔고, 통역가는 영어로 우진의 이야기를 통역하였다.

“이 멋진 프로젝트에 저희 WJ 스튜디오를 초대해 주시고, 또 이렇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좌중을 둘러보던 우진의 시선이,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있는 루카스와 마주쳤다.

우진은 그가 누군지 정확히 몰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이 발표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럼, 지금부터……. 저와 WJ 스튜디오 디자인팀이 준비한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진은 군더더기 없는 예의 그 담담한 목소리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였고, 그 순간 스크린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지이잉-

우진과 WJ 스튜디오.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에서 최고의 조력자였던 민선의 지난 반년이 담긴 마곡 컨벤션센터의 디자인 조감도.

“와……!”

“크으……!”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어 나왔지만, 이 정도는 제이콥의 조감도가 공개되었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우진은 결코 들뜨지 않았다.

‘좋아.’

마른침을 한 차례 집어삼킨 우진이 좌중을 향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고.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혹시 마곡의 옛 이름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우진의 이 첫 마디가 울려 퍼진 순간, 조금은 소란스럽던 좌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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