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90화 (290/315)

290화

경연

LTK금융그룹의 한국지사는, 오늘 아침부터 무척이나 분주하였다.

언제나 같은 일상만이 반복되던 회사에, 오랜만에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특별한 이벤트라고 해서 사원 모두가 설레거나 기분 좋은 것은 아니다.

회사에 새로운 일이 있다는 건 결국, 직원들 중 누군가에게 일거리가 생겼음을 의미하니까.

“하, 이제 진짜 끝이 보이네.”

“그러게요, 팀장님.”

“여기 세팅만 다 하면 더 할 거 없는 거죠?”

“아으 허리야.”

기획부서 팀장들끼리 한 내기에서 진 3팀장 손유정은, 한숨을 푹푹 쉬며 의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팀원들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곳은 바로 사옥에서 가장 큰 대회의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이 회의실에서 오늘 아주 중요한 행사가 있을 예정이었고.

그래서 먼지가 쌓여 있던 회의실을 정돈하고 세팅하느라 기획3팀의 직원들이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땀을 뻘뻘 흘려야 했던 것이다.

“근데 팀장님,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그냥 청소만 대충 했어도 되는 거 아닌가.”

“내 말이. 갑자기 탁자에 프로젝터까지 싹 다 새 거로 바꾸는 이유가 뭐에요?”

팀원들의 투덜거림에, 손유정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높으신 분 온다잖아.”

“높으신…… 분이요?”

“본사에서 임원급도 두 분 온다고 들었어.”

“커헉.”

“그러니까 다들 잔말 말고 해……. 괜히 트집잡히면 아주 지옥을 맛보게 될걸?”

손유정의 한 마디에, 팀원들의 표정은 전부 창백해졌다.

본사 임원급이라면 한국지사로 따졌을 때 거의 사장급 이상의 파워를 가진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온다는 얘기는 말단사원의 입장에서 아주 소름 돋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음…… 이렇게 할 만했네요.”

“그러게. 요란 떨 만했네…….”

“자, 이제 한 시간밖에 안 남았다고. 빨리 마무리하고 정리합니다!”

“네, 팀장님.”

덕분에 강제로 의욕을 주입당한(?) 팀원들은 열심히 회의실을 세팅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30분 뒤에 모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후우, 됐다!”

“정리하고 나갑시다!”

그런데 회의실 세팅을 마무리하고 나가려던 그때.

팀원들 몇몇이 회의실 가장 뒷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팀장님,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저희는 그냥 여기 앉아있을게요.”

유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였다.

“응? 진호 씨. 앉아……있는다고?”

“어차피 10분 뒤에 다시 와야 할 텐데, 그냥 앉아서 쉬고 있으려고요.”

“다시 와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팀원 진호의 이야기에 유정은 고개를 갸웃하였고, 그런 그녀를 향해 진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팀장님 다시 안 오려고 했어요?”

그 물음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시 반문하는 유정.

“당연하지. 그렇잖아도 오전부터 여기 때문에 시간 다 날려 먹었는데……. 굳이 행사를 다시 보러 왜 와? 할 일도 많은데.”

“음…….”

“자기 혹시 착각하는 거 아냐? 오늘 행사 참석은 필수 아니야.”

하지만 그런 그녀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진호는 오히려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였다.

“뭐 야근이야 좀 해야겠지만, 그래도 전 서우진 보고 갈래요.”

옆에 있던 여직원 하나도 한 마디 덧붙였다.

“저도요, 팀장님. 서우진 피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횐데, 야근 좀 하죠 뭐.”

두 사람의 말이 끝나자, 유정은 어벙한 표정이 되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서우진? 그 디자이너 서우진 말하는 거야?”

유정의 물음에, 진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헐, 설마 팀장님 모르셨어요?”

“뭘?”

“오늘 마곡 컨벤션센터 최종심사 대상 중에 WJ 스튜디오 있잖아요.”

“응?”

“물론 발표자가 누군지는 저도 모르지만, 아마 서우진이 직접 하지 않겠어요?”

“……!”

유정은 <우리 집에 왜 왔니>가 방영될 때부터 서우진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서 팀원 진호의 말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진호?”

“팀장님이 공문 정독 안 하신 것 같은데……. 거기 쓰여 있어요.”

“……!”

“아마 다른 부서 사람들도 지금 벼르고 있을 걸요?”

“맞아. 김 주임도 나한테 한 자리 맡아달라고 하던데…….”

팀원들의 이야기를 듣던 유정은, 다급히 스마트폰을 열어 공문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이어서 참가사 명단에 떡 하니 박혀있는 WJ 스튜디오의 이름을 확인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런 중요한 일이 있으면 보고들을 해줘야죠!”

* * *

지난 일주일 동안, 우진은 모든 업무를 미뤄두고 다시 마곡 M-Tec 프로젝트에 집중하였다.

아직 청담 아르코가 완판된 것은 아니었지만 분양물량이 이제 한두 채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여유가 많이 생기기도 했으며.

러프 스케치와 러프 디자인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서울 모터쇼’를 상정하여 전시 디자인까지 새로 해야 했으니, 다른 업무를 볼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우진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당연히 민선.

그녀는 디자인을 뽑아내는 일주일 동안, WJ 타워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다.

아마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번 프로젝트는 결코 쉽지 않았을 터였다.

‘후유. 그러고 보면, 이 프로젝트에 거의 반년을 쏟아부었네.’

우진이 처음 마곡 컨벤션센터 프로젝트의 이야기를 들었던 날은 입학식 날이었다.

그로부터 7개월이 넘게 지난 오늘에서야 이렇게 최종 발표를 하게 되었으니.

실시설계도 아니고 설계 공모만으로 반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물론 그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가치 있고 거대한 규모의 프로젝트였지만, 그래도 진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표님, 검수 다 했고, 문제없는 것 같아요.”

민선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민선 씨. 덕분에 여기까지 왔네요.”

“정말 제 덕이라 생각하시면, 보답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민선이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파악하지 못한 우진은 고개를 갸웃하였고.

“음……?”

그에 민선은 싱긋 웃으며 우진에게 프로젝트 문서가 담긴 USB를 건네었다.

“오늘 피티에서, 무조건 프로젝트 따오시는 거요.”

여러모로 진심이 담긴 민선의 말에, 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누구보다 이번 프로젝트를 따내고 싶은 사람이 우진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경연에서 떨어진다면, 지금까지 함께 고생한 많은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 하하. 너무 부담 팍팍 주시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민선은 대부분의 대화에서, 우진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얘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대표님은 부담 드릴수록 잘하시는 것 같아서요.”

“…….”

“할 수 있죠?”

뭔가 단단한 뼈가 느껴지는 민선의 마지막 물음에, 우진은 피식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해내야죠.”

아침 일찍 출근하여 설계팀과 함께 모든 마무리 작업을 마친 우진은, 파일을 꼼꼼히 정리하여 가방에 담고 출발 준비를 하였다.

이제 우진이 향할 곳은 강남.

LTK금융그룹의 한국지사는 강남 테헤란로에 위치해 있었고, 오늘 프레젠테이션은 바로 그 사옥의 대회의실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띵-

우진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사람은, 진태와 민선.

우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민선에게 물어보았다.

“민선 씨 1층 안 눌러요?”

“1층을 왜요?”

“퇴근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우진의 물음에, 민선이 손가락을 까딱하며 대답하였다.

“그럴 리가요. 발표장 따라가야죠.”

“……?”

“이럴 때 아니면 대표님 피티를 언제 라이브로 구경해요?”

“꼭 구경하셔야 됩니까……?”

“저 열심히 일했는데, 그 정도 자격은 있지 않나요?”

“자격이야 물론…….”

“얼른 가요. 대표님 피티, 현장에서 보는 게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어요.”

“그, 그렇게 까지요?”

결국 민선까지 차에 태운 우진은, 그대로 강남 LTK사옥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진의 차가 LTK사옥에 도착할 즈음, 먼저 도착한 제이콥은 팀원들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 * *

ALuna의 수석 디자이너 루카스(Lucas)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번에 처음 와봤다.

글로벌 사업장에서 수많은 프로젝트를 경험해 본 그의 지인들 중에는 한국인 디자이너도 몇몇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한국의 프로젝트에는 참여해 볼 기회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번 마곡 M-tec 프로젝트에 대한 제안이 ALuna에 들어왔을 때, 누구보다 프로젝트를 맡아보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루카스였다.

그는 자신의 영감이 성장하기 위해서 다양한 경험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때문에 한국이라는 경험해보지 못한 국가의 MICE 단지라는 대형 프로젝트는, 그에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이미 너무 포화상태였던 ALuna는 결국 직접 메인 설계사로 참여할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의 디렉팅이자 검수 외주를 총괄하게 된 사람이 바로 루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직접 와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루카스 경.”

“하하, 별말씀을요, 당연히 프로젝트 총괄을 맡은 제가 직접 와서 심사해야지요.”

루카스는 영국 출신의 디자이너로, 뛰어난 건축가이기도 했다.

건축이라는 분야에서의 국위 선양을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을 정도.

그래서 LTK본사의 임원들도 그가 직접 한국으로 날아온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ALuna에서 그만큼 이번 프로젝트를 신경 쓰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니까.

사실 루카스가 한국에 직접 온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다.

‘오늘 정말 기대되는군. 어떤 프레젠테이션을 볼 수 있을지…….’

루카스가 바쁜 일들을 제쳐두고 직접 한국까지 날아온 가장 큰 이유.

그것은 사실 순수한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기대였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이 마곡 컨벤션센터 공모에 들어온 설계들을 검토하던 루카스는, 적잖은 충격에 빠졌었다.

워낙 거대한 프로젝트이다 보니 공모에 들어온 설계들이 하나같이 뛰어난 퀄리티를 갖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컨벤션센터라는 건축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파격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과 설계.

[크으, 역시 블랙테일즈의 설계였군. 블랙테일즈라면 이 정도 작품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지.]

그것을 검토한 루카스는, 사실상 공모 결과가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뭐 그래도 남은 설계들을 전부 검토하기는 해야겠지. 이보다 멋진 작품이 나와 주긴 힘들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루카스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마지막 설계를 펼쳐봤을 때였다.

그것은 공모에 입찰한 설계사무소 중, 유일하게 한국 회사였던 WJ 스튜디오의 작품.

[흠, 사업장이 한국이라더니……. 자국 회사를 한 곳 정도는 넣어 준 건가?]

큰 기대 없이 검토를 시작한 그 설계는, 금세 루카스의 두 눈을 휘둥그레지도록 만들었고…….

[미쳤군. 한국에 이런 건축 디자인 회사가 있었다고?]

모든 검토를 마쳤을 땐,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블랙테일즈의 설계와 비교해도, WJ 스튜디오의 설계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훌륭했으니 말이다.

[대체 이걸 어떻게 선택하지?]

그래서 루카스를 비롯한 ALuna의 프로젝트 팀은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었다.

과연 지금까지 디자인이 확정된 MICE 단지의 다른 건축물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작품을 채택하는 게 더 아름다운 건축을 완성 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의 고민에도 결론은 나지 않았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오늘의 최종 프레젠테이션 경연.

그래서 루카스는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렇게 아름다운 설계를 보여준 블랙테일즈와 WJ 스튜디오에서, 이 이상 어떤 것을 그에게 보여줄 수 있을지 말이다.

‘상상조차 쉽지 않군. 내가 오늘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지 말이야.’

프레젠테이션이 열릴 대회의실.

그 가장 앞자리에 앉은 루카스는, 설레는 마음으로 프레젠테이션을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규모 있고 멋지게 세팅되어있는 프레젠테이션 장소는, 그의 기대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었다.

하여 잠시 후, 갈증을 느낀 루카스는 탁자 위에 올려있던 캔 커피를 한 캔 따서 집어 들었다.

톡-

그리고 그 순간.

저벅- 저벅-

오늘 경연에 참가한 첫 번째 발표자가, 단상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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