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89화 (289/315)

289화

경연

마곡 컨벤션센터의 1차 공모 마감일로부터, 벌써 삼 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제이콥을 비롯한 블랙테일즈의 설계팀은 아직 한국에서 파견 근무 중이었는데, 그 이유는 컨벤션센터 건 말고도 추가적인 일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일 때문에, 제이콥은 오늘 강남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이콥 페레즈(Jacob Perez)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제이콥. 난 콜튼 테일러입니다.”

제이콥도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인상을 가진 호남(好男)이었지만, 그와 마주 서 악수를 나눈 인물은 일반적인 미남을 넘어 마치 모델 같은 외모를 가진 인물이었다.

쉰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일 만큼 깔끔하고 잘생긴 얼굴에, 까만 슈트가 마치 몸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로 늘씬하게 어울리는 남자.

콜튼은 환하게 웃으며 제이콥과 인사를 나누었고, 두 사람은 조용한 호텔 라운지에 마주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제이콥이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콜튼. 꼭 한번 만나고 싶던 디자이너를 뜻밖에 뵙게 돼서 무척 기쁘군요.”

콜튼은 자동차 디자이너고, 제이콥은 전시‧건축 디자이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업종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라 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업종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이기도 하였다.

제이콥은 건축 중에서도 전시 디자인에 특화된 디자이너였고, 그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모터쇼와 자동차 전시장을 디자인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었다.

콜튼과 제이콥은, 각각의 업계에서 손에 꼽을 만큼 유명한 디자이너였으니까.

“저 또한 제이콥과 이렇게 만날 기회가 생겨 기분이 좋습니다. 지난 킨텍스 전시에서 분명히 뵐 기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못 뵙고 지나가서 아쉬웠거든요. 하핫.”

“아, 그때. 정말 너무 바빴었지요. 저도 저지만 제운쪽 디자인 팀도 상당히 고생했던 전시로 기억합니다.”

“맞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꼬이는 바람에…….”

“여튼 제가 킨텍스 전시를 총괄했던 걸 기억해주신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사실 ‘디자이너’라는 직종 안에서의 인지도만 놓고 봤을 때.

굳이 따지자면 콜튼의 인지도가 제이콥보다는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업력으로 따져도 콜튼이 10년은 더 디자인업계에서 일했던 데다, ‘자동차’라는 카테고리가 아무래도 ‘전시’보다는 더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생기기 좋은 분야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콜튼은 그런 업계 인지도 같은 것을 따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제이콥은 그가 아는 디자이너들 중 배울 점이 있는 몇 안 되는 훌륭한 젊은 디자이너들 중 한 사람이었고.

때문에 오늘의 만남이 순수하게 기쁠 뿐이었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

그것이 오늘의 만남이 계약을 정리해야 하는 단순한 비즈니스 미팅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부사장인 콜튼이 직접 자리에 나온 이유였다.

“저희 쪽에서 발송 드린 제안서는 좀 검토해 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대부분 업계 표준이라 특이점은 없을 테고…….”

“깔끔한 계약서였습니다.”

“결국 조율해야 할 부분은 디자인 피와 관련된 부분일 텐데, 혹시 저희 쪽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이 조금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오해는 말아 주세요. 전반적인 계약조건에 저희 블랙테일즈는 상당히 만족하고 있고, 다만 부분적으로 조율했으면 하는 조항이 있을 뿐이니 말입니다.”

각각 서류를 탁자 위에 펼쳐 올린 두 사람은, 무척이나 능숙하게 협상을 하였다.

두 사람 모두 디자이너임과 동시에 어떤 집단을 이끌어 본 디렉터였고.

그래서 이런 종류의 계약을 수없이 치러봤기에, 서로의 이해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양쪽 모두 사내에서 직급과 권한이 높은 것도, 계약을 진행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콜튼과 제이콥은 거의 대부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즉석에서 계약 수정변경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일사천리로 비즈니스 용무를 마쳤을 때.

시간은 고작 한 시간밖에 지나있지 않았다.

“깔끔하군요.”

“좋습니다. 이대로 진행하시죠.”

그래서 충분한 시간이 생긴 두 사람은, 좀 더 여유로운 얼굴이 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다음 일정까지는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비즈니스와 별개로, 둘은 사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국에 들어오신 지는 얼마나 되신 겁니까?”

“흐음, 이제 거의 반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사무실은 서울에 있다고 하셨지요?”

“이 근첩니다.”

“오호, 강남이군요.”

“그나저나 콜튼 씨는, 한국을 되게 잘 아시나 봅니다?”

“한국 기업인 제운자동차에서 벌써 십 년은 일했으니까요.”

제이콥은 콜튼이라는 디자이너를 예전부터 동경했었고, 콜튼은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다.

“그나저나 이번 프랑크푸르트에서 제운자동차의 신형 모델이 공개된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오, 아직까지 나름 대외비인데,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대외비…… 맞습니까? 제 부하직원이 알고 있던데요?”

“이런. 저희 회사 보안이 엉망이로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서 둘은 디저트를 탁자에 올려놓은 채 끝없이 대화를 나누었고…….

“저희 회사 자동차를 좋아하시나 봐요?”

“제운의 자동차는 항상 중후한 멋을 가지고 있지요.”

“타보신 겁니까?”

“물론입니다. 제 친구가 제운자동차의 크로노스 오너거든요.”

“와우.”

“중형 세단의 내부공간이 그렇게 넓을 수 있다는 걸, 그 차를 타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 안에는 업계 이야기들도 담겨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제이콥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던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그…… 혹시 데미안을 아십니까?”

“디자이너 데미안 군터(Demian Gunth)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오, 맞아요. 그 친구가 그래도 제법 유명한 편이죠.”

“…….”

“어쨌든 얼마 전에 데미안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블랙테일즈에서 IAA의 입찰을 포기했다고 하더라고요.”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이번에 진행하시는 ‘마곡 컨벤션센터’ 설계 입찰 때문이었다고 들었는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콜튼을 보며, 제이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은 절반 정도 맞습니다. 마곡 컨벤션센터 설계 건이 워낙 커서, 저희로서는 두 프로젝트를 전부 감당할 여력이 없었으니까요.”

“절반이라면 다른 이유가 있기는 하다는 거군요?”

“그렇죠. 하지만 이 부분은 저희 회사 내부적인 이유 때문이라,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아, 그것까지 여쭈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마곡에 지어진다는 새 컨벤션센터에 제가 관심이 좀 많아서……. 그와 관련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아하, 그렇군요.”

다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짧게 홀짝인 콜튼이, 별생각 없이 물어보았다.

“7월에 공모했다고 들었으니, 이제 공모 결과는 나왔겠네요?”

“뭐, 그렇죠?”

“당연히 블랙테일즈에서 입찰했겠지요?”

하지만 콜튼의 말이 끝나자 물 흐르듯 이어지던 대화에 순간 정적이 찾아왔고.

“…….”

눈치 빠른 콜튼은, 뭔가 실수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제가 혹시 말실수를…….”

하지만 다행히 제이콥은 조금 당황했을 뿐, 그리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뭐, 저도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람 일이라는 게 항상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않더군요.”

“설마, 다른 회사의 설계가 채택된 겁니까?”

제이콥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럼……?”

“조만간 2차 심사 일정이 잡혔을 뿐이지요.”

“……!”

콜튼은 자동차 디자이너라는 직종의 특성상 어떤 설계 공모에 참가할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방식의 공모를 주최해본 적은 여러 번 있었고, 때문에 제이콥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2차 심사라……. 어지간해서는 잘 선택하지 않는 방법인데.’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는 시간이 돈이다.

그런데 그 귀중한 시간을 지연시켜가면서 굳이 2차 심사까지 공시했다는 말은, 정말 우열을 가리기 힘든 설계가 나왔다는 얘기.

그래서 콜튼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대단하군요.”

“뭐가 말입니까?”

“어떤 회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블랙테일즈와 2차 경연을 붙게 될 정도로 뛰어난 설계를 한 회사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콜튼의 말에 대답하는 제이콥은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그의 이야기의 베이스가 블랙테일즈와 제이콥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회사인지 정말 궁금하군요.”

“저희도 그랬습니다.”

제이콥의 대답에, 콜튼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말씀은…….”

그에 제이콥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너무 궁금해서 따로 알아봤지요. 어떤 업체들이 입찰에 들어왔는지 대부분 알고 있는데, 그중 어떤 설계가 저희 설계에 비견될 수준이었는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콜튼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제이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제이콥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걸 알아본 뒤에, 저희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째서요?”

“일주일 뒤에 저희와 경연을 붙게 될 회사가, 완전히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회사더군요.”

“오……! 그게 정말입니까?”

전시와 관련된 건축 분야에서, 블랙테일즈의 인지도는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수준이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러한 인지도는 고스톱으로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십수 년 이상 업계에서 구르며 쌓인 노하우와 경험.

그런 과정 속에서 모인 수많은 실력 있는 인재들.

그들 하나하나가 모여 지금의 블랙테일즈라는 회사를 만들어낸 것.

그렇기에 콜튼은 진심으로 놀랐다.

대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어떤 회사가, 블랙테일즈의 설계와 비견될 정도의 작품을 공모에 내놓았단 말인가?

“WJ 스튜디오……. 라고 하더군요.”

“음……?”

“그 이상은 저희도 알 수 없었습니다. 회사 상호도 겨우 알아냈을 뿐이니까요.”

제이콥의 말을 들은 콜튼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이상하다……. 분명히 처음 듣는 회사일 텐데…….’

아무리 고민해도 WJ 스튜디오라는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낯익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으니 말이다.

“무튼, 건승을 바랍니다, 제이콥.”

“감사합니다, 콜튼.”

“제이콥의 실력이라면, 결국 설계권은 블랙테일즈의 것이 되겠지요.”

“하하, 최선을 다해 봐야지요.”

제이콥과의 만남이 끝난 뒤, 콜튼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릉-

그가 공항에서부터 타고 온 이 차는, 제운자동차에서 그를 위해 특별히 내어 준 전용 세단.

원래대로라면 운전기사도 한 사람 딸려 와야 했지만, 직접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콜튼은 그것을 사양하였다.

“흠, 이제 우리 귀염둥이를 보러 가볼까……?”

자신이 직접 디자인을 총괄한 제운자동차의 신형 모델을 운전하며, 콜튼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직 퇴근 시간이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길이 크게 밀리지는 않았고.

콜튼은 능숙하게 한남동 골목으로 들어가 몇 년 전만 해도 자신이 살던 집의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삑-

이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그를 반겨주는 아주 반가운 얼굴.

“Bloody Hell! Daddy!!”

“오우, 제이든! 집에 있었던 거야?”

“아니, Daddy! 미리 말도 안 하고 이렇게 오는 게 어딨어요?”

“말을 안 하다니. 아빠는 분명 얘기했는걸?”

“뭐라고요?”

“조만간 한국에 들어갈 거라고.”

“Holy! 그 얘긴 오늘 아침에 했잖아요!”

“열 그만 내고 냉수나 한 잔 가져와 제이든.”

“냉장고는 Daddy가 더 가까워요.”

“젠장, 합리적인 거부로군.”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들과 요란하게 회포를 푼(?) 콜튼은, 겉옷을 대충 벗어놓고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이제 별다른 일정도 남지 않았으니, TV를 틀어 놓고 맥주나 한 캔 마시면서 치킨을 시켜 먹는다면 완벽한 하루.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콜튼은, 문득 제이든을 향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제이든.”

“왜요 Daddy?”

“혹시 너…….”

뒷머리를 긁적인 콜튼이, 다시 말을 이었다.

“WJ 스튜디오라는 디자인 회사를 알아? 한국 회사라던데.”

그리고 콜튼의 그 질문을 들은 제이든은 다시 날뛰기 시작하였다.

“Bloody Hell! Daddy!!”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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