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88화 (288/315)

288화

경연

블랙테일즈(BlackTales)의 설계팀장 제이콥은,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뒤숭숭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실장님.”

[무슨 말 이기는요. 말 그대롭니다, 제이콥. 우리의 설계가 최종 공모작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는 메일이 아침 일찍 왔다니까요?]

“……!”

[아, 한국 시간으로 치면 어제저녁이겠군요.]

“으음…….”

[그러고 보니 지금 한국은 아침인가요? 아니면 새벽? 음……. 제가 제이콥의 단잠을 깨운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죄송합니다.]

최종 공모작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는 말은, 1차 심사를 통과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해당 공모의 설계를 총괄했던 제이콥으로서는, 기뻐해야 할 소식이 맞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전화를 통해 받은 제이콥은, 어째서 기분 좋은 표정이 아닌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니까…… 당선이 아니라 최종 후보들 중 하나가 됐다는 얘기인 거잖습니까?”

[그렇지요.]

“크흠……. 이런 결과는 생각지 못했는데…….”

[하하, 천하의 제이콥이 지금 설마 걱정을 하는 겁니까?]

제이콥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1차 심사통과 결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비공개 설계 공모의 경우, 내부 심사에서 아예 최종결과까지 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공모 요강에는 2차 심사까지 명시되어 있다 하더라도, 편의상 모든 과정을 원스텝으로 진행해버리는 게 보통이었던 것.

애초에 공모 참가 사 자체가 LTK금융그룹에서 컨텍한 10개사 이내의 회사들이었으니.

굳이 1, 2차 나눌 필요 없이 내부적으로 가장 적합하고 뛰어나다 판단되는 설계를 선정하여 그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럼 이렇게 2차 심사가 들어가게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그것은 1차 심사에서 도저히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황일 때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그 말인즉, 블랙테일즈의 설계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의 뛰어난 공모작이 존재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였다.

“걱정은 아닙니다, 실장님. 저희 팀의 설계는 완벽했으니까요.”

[하핫, 그런가요?]

“단지 예상 못 했던 상황에 조금 당황했을 뿐입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결과가 달라질 일은 없겠지만 말이지요.”

물론 그것과 별개로, 제이콥의 이런 생각은 오만한 것이 맞았다.

LTK금융그룹은 세계적인 회사였고, 그런 회사에서 선정한 공모사들은 전부 실력 있는 디자인 회사들일 게 분명했는데.

제이콥은 그중에서도 당연 자신이 지휘하는 블랙테일즈 팀의 설계가 압도적으로 뛰어났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자신감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블랙테일즈 설계팀은 이보다 더 큰 설계도 공모에 여러번 참가했었고, 그때마다 번번이 단독입찰에 성공했었으니까.

게다가 이번 공모에, 제이콥이 아는 메이저급 디자인 설계사무소들은 한 군데도 입찰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제이콥의 자존심에는, 조금 금이 간 상태였다.

‘어쩐지 결과 발표가 생각보다 늦어진다 싶더라니…….’

만약 다른 설계들이 고만고만했고 블랙테일즈의 설계가 압도적이었다면, 공모 결과는 금세 발표됐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발표 예정일보다 한 달도 더 지난 오늘에서야 나왔고, 이것은 그만큼 LTK에서 고민을 오래 했다는 뜻.

‘아니, LTK에서 고민한 건 아니겠지. 디자인 설계 감리를 대행해줄 외주업체를 분명 섭외했을 테니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던 제이콥은, 갑자기 생긴 궁금증에 전화통에 대고 물어보았다.

“혹시, 실장님.”

[네, 팀장님.]

“이번 공모, 디렉팅 외주를 맡은 회사가 어딘지 알고 계십니까?”

[왜요, 로비라도 하시려고요?]

“아니, 실장님. 대체 이 제이콥을 뭐로 보시고…….”

[하하. 농담입니다, 제이콥. 제이콥이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은 제가 가장 잘 알지요. 어디 보자……. 이번 공모를 주관한 회사는, ALuna라고 명시되어 있군요.]

“……!”

실장의 이야기를 들은 제이콥은, 두 눈이 조금 확대되었다.

‘역시 금융회사라 그런지……. 돈을 정말 아낌없이 발랐군.’

ALuna는 블랙테일즈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꿀릴 것 없는, 제이콥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디자인회사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얘기 중인 블랙테일즈의 실장 또한 흥미로운 목소리였다.

공모 과정에서의 부정행위 방지를 위해 공모 심사를 대행하는 회사에 대한 정보는 극비로 취급되었었고.

때문에 실장 또한 방금 온 메일 안에서 ALuna라는 이름을 처음 확인했으니까.

그렇다면 극비로 취급됐던 담당사의 상호가 이번 메일에서는 왜 공개되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비록 1차 공모 결과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참가사는 탈락 통보를 받아야 했는데, 이때 공모를 심사한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정도는 알려야 참가사에서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ALuna라는 회사의 이름은 업계에서 그만큼 공신력이 있었다.

“다행이군요.”

제이콥의 나지막한 대답에, 전화 넘어 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하, 뭐가 다행입니까?]

“적어도 실력 없는 놈들에게 평가당할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확실히 ALuna라면 인정할 만한 회사지요.]

“어쨌든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장님.”

[별말씀을요.]

“2차 심사 일정은 메일에 있을까요?”

[제가 mms로 보내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실장과의 전화를 끊은 제이콥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열어 실장의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10월 마지막 주라…….’

의외의 결과에 처음은 당황했지만, 지금 제이콥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ALuna에서 심사를 진행했다면 블랙테일즈와 함께 최종 공모작으로 선출된 설계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 설계일 확률이 높았고.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오히려 승부욕으로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진행 방식은 최종 프레젠테이션 이후 현장 발표. 장소는 LTK금융그룹 서울 신사옥……. 프레젠테이션은 최대 한 시간…….’

공고 내용을 찬찬히 정독한 제이콥은, 꿀꿀했던 기분을 털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제 씻고 강남에 있는 블랙테일즈의 임시사무실로 출근해, 이 결과를 팀원들과 공유해야 할 차례였다.

* * *

우진은 오늘, 꽤 오랜만에 민선을 만났다.

공모 마감 날 이후로 식사를 한 번 함께하긴 했지만, 그 뒤로는 서로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공모 결과가 나왔고 최종 경연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 되니, 이번 프로젝트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들 중 한 명인 민선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종 경연과 관련하여 조언을 들을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1차 심사통과를 축하하고 고생해준 민선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는 의미가 더 컸다.

“소식은 들었어요, 대표님.”

“하하. 빠르시네요.”

“저 개인적으로도 애정이 많이 가는 프로젝트니까요. 결과도 마음에 들고…….”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고맙네요. 일단 밥부터 들죠.”

“좋아요. 그렇잖아도 뱃가죽이 등에 붙어있어요 지금.”

처음 민선을 만났던 중식 레스토랑에 온 두 사람은,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누며 기분 좋게 식사를 하였다.

하지만 식사를 다 하고 후식이 나올 쯤이 되자, 주제는 다시 마곡 컨벤션센터 프로젝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일 얘기이기 때문이라기보단, 디자인과 관련된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이야기가 흘러온 것이다.

“최종 심사가 프레젠테이션이라고 했죠?”

“네. 공고 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당선은 문제없겠네.”

“왜요?”

“제가 업계에서 이제 10년이 넘었는데, 대표님만큼 말 잘하는 사람 별로 못 봤거든요.”

“……. 과찬이십니다.”

우진이 멋쩍은 표정을 짓자, 민선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뇨, 진짜예요.”

“제가 민선 씨 앞에서 그렇게 막 혀에 기름칠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민선이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런 의미가 아니고……. 예전에 대표님 피티하시는 영상을 봤거든요.”

“아……?”

“제가 처음 서 대표님 팬이 된 게, 프레젠테이션 영상 때문이었는걸요?”

“갑자기 얼굴이 좀 뜨거워지네요. 기분 탓이겠죠……?”

“아뇨, 얼굴이 빨갛게 익으신 게, 따끈따끈해 보이시네요.”

“…….”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오는 민선의 이야기에 우진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런 그를 보며 민선은 마냥 재밌을 뿐이었다.

이럴 때를 제외하면, 우진의 순수한(?) 모습을 보기도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그 공고 뜬 것 좀 보여줘 봐요, 대표님.”

“2차 심사 공고요?”

“네. 디자인팀장님께 대충 듣긴 했는데, 요강이 좀 특이한 것 같더라고요. 궁금해서.”

“아, 잠시만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민선의 이야기대로, LTK로부터 날아온 2차 심사의 공고요강은 꽤 특이했다.

1차 심사 때 제안했던 설계를 변경할 수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소스가 더 첨가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바로 모터 쇼.

이 마곡 컨벤션센터에서 가장 처음 열릴 1호 전시인 ‘서울 모터쇼’라는 소스가, 공모 위에 얹힌 것이다.

[마곡 컨벤션센터의 첫 번째 전시는 서울 모터쇼가 될 것입니다.]

[해당 전시를 상정한 전시기획을 설계 위에 가미하여, 최종 발표를 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건축설계 공모에서, 이런 식의 주제가 나오는 일은 잘 없다.

이것은 마치 지어질 건물에 입점하게 될 업종을 공모 주체에서 가상으로 정해주고, 공모 참가사들에게 해당 업종의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뽑아오라는 말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설계에 대한 디자인 피까지 LTK에서 지급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참가사 입장인 우진도 불만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의아할 뿐이었다.

‘주제가 있으면 프레젠테이션하기 좀 더 편하긴 하겠네.’

이번 공모 심사를 맡았던 ALuna가 어떤 고민 끝에 이런 주제를 내어놓았는지는, 우진으로서 알 리 없는 게 당연하였다.

[도저히 하나의 설계를 채택할 수가 없습니다, 마스터.]

[그 정돕니까?]

[워낙 장단점이 뚜렷하고, 훌륭한 설계들입니다.]

[크흐음…….]

[아무래도 2차 심사를 해야겠네요.]

[2차 심사 때는 결론이 나겠지요?]

[이대로 프레젠테이션만 시킨다면,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조금 더 주제를 심화해 보도록 하죠.]

[심화라…….]

대외적으로 아직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최종 심사에 채택된 회사는 블랙테일즈와 WJ스튜디오 두 곳뿐이었다.

그리고 ALuna가 2차 심사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두 설계사가 ‘전시디자인’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냐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어쩌면, 블랙테일즈 보다는 WJ 스튜디오에 대한 최종검증인지도 몰랐다.

이미 전시 디자인을 주력으로 하고 있는 블랙테일즈와 달리 WJ 스튜디오는 대외적으로 전시 포트폴리오가 없는 상황이었고.

그럼에도 우진의 설계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ALuna에서, 전시 디자인에 대한 WJ 스튜디오의 역량을 검증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우진은 이러한 의도를 캐치하지 못했지만, 공모 요강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민선은 어느 정도 그 의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우진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부 다 읽은 그녀는, 테이블 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어쩌면 이번 심사에서는……. 제가 조금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우진이 디자인하고 민선이 검수했던 마곡 컨벤션센터의 최종설계.

그 위에 가상의 전시를 기획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신이 나는 민선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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