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디자인과 선택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은 저녁 9시의 성수동.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새하얀 건물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기하학적인 외관을 따라 늘어선 창문들 사이로, 가지런히 하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아름다운 건물.
그것은 어느새 성수동의 랜드마크가 된, 서울 숲 WJ 타워였다.
“와, 건물 진짜 예쁘다. 밤에는 조명이 이렇게 들어오는구나.”
“오빠, 이게 WJ 타워지?”
“그럴걸? 그, 서우진이 지은 건물.”
서울 숲을 거닐던 연인들도, 야근 때문에 늦게 퇴근하던 직장인들도.
대로변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밀리는 차도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운전자들도.
인근을 지나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그렇게 환하게 빛나는 WJ 타워.
하지만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도 건물이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조금 씁쓸한 것이었다.
마곡 컨벤션센터의 공모 마감이 하루 남은 오늘.
WJ 스튜디오의 설계‧디자인 파트의 직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야근 중이었으니 말이다.
저층부의 상업 시설을 전부 제외하고라도 모든 오피스의 불이 전부 다 환하게 켜져 있었으니, 평소보다 더욱 밝게 빛날 수밖에 없던 것.
디자인이 끝나지 않아서 야근 중인 것은 아니다.
세부적인 설계들까지도, 이미 어제 회의에서 컨펌이 끝난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워낙 설계 규모가 크다 보니 세부설계는 팀별로 구획을 나누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래서 오늘은 이 모든 설계를 한 데 묶어 최종적으로 검토를 하는 중이었다.
개별적으로는 우진의 컨펌을 통과했을지 몰라도, 공간과 공간이 연계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불협화음들에 대해서는 아직 검토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모두가 바쁜 가운데.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은, 당연히 우진이었다.
이번 컨벤션센터 프로젝트가 중요한 만큼, 이 방대한 분량의 설계 전부가 우진의 손을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팀장님.”
“네 대표님.”
“문주 입면을 조금 수정해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수정할까요?”
“기존에 수직으로 높게 솟은 디자인이 스케일감도 더 있어 보이고 괜찮았던 것 같아서요. 지금 디자인도 나쁜 건 아닌데, 시선을 사로잡는 임펙트가 좀 부족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 디자인이 저도 괜찮기는 한데,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하단부가 좀 휑해 보일까 봐서요.”
“조경 위나 벽면에 일루미네이션 (illumination)을 좀 올리면 어느 정도 커버되지 않을까요?”
“아하.”
“어차피 공모입찰 이후에 마감이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하니까, 일단 랜더 컷에서는 일루미네이션*[전구나 네온관을 이용한 조명장식]으로 표현해 주세요.”
“조명 많이 들어간 야간 컷 뽑으려면 랜더가 꽤 오래 걸릴 텐데…….”
“포토샵 있잖습니까, 포토샵.”
“아.”
“랜더 뽑을 때는 조명 일단 최소화시키고, 포샵에서 찍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지난번에 보니까 선경 대리님이 포샵 전문가시던데.”
“하하. 선경이가 거의 포토샵 장인이기는 하죠.”
작업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인 만큼, 설계의 근간을 흔들 정도의 수정사항은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심한 설계조정이 도면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니, 우진은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살펴보았다.
“여기 뒷공간 창고를 차라리 측면으로 빼고, 매표소 부분을 공간 안쪽으로 더 밀어 넣죠.”
“아, 그럼 확실히 전체적인 쉐입(Shape)이 매끄러워지겠네요.”
“그럼 전시관 통로가 좀 좁아질 텐데, 괜찮을까요?”
“수정 시 폭이 얼마까지 줄어들죠?”
“3400(mm)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아예 3200 정도까지 줄이고……. 대신 층고를 위쪽으로 뚫어버리죠.”
“아, 아예 상방으로요?”
“어차피 2층 평면 보니까, 그쪽 공간이 좀 죽어 있더라고요.”
“조금 뜨는 느낌이 있긴 하죠.”
“그쪽을 뚫어서 아예 중정처럼 만들어버리면, 전반적으로 개방감도 살고 외관도 더 깔끔해질 것 같네요.”
“좋은 아이디어 같습니다, 대표님. 한번, 적용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일이 즐겁고 회사가 좋다 하더라도, 야근이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WJ 스튜디오의 직원들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열심인 이유는,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실들 때문이었다.
매년 한두 번씩 있는 이런 고생 뒤에는, 항상 달달한 보상이 따라온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우진은 공모 마감 이후에 설계팀과 디자인팀에 교대로 일주일간 특별휴가를 약속한 상태였고.
만약 공모에 당선이라도 된다면 고생한 것 이상의 빵빵한 인센티브가 나올 게 분명했다.
그래서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계를 보며 일하는 직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오늘 완성시켜야 할 이 프로젝트가,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자, 그럼 방금 이야기된 수정사항만 마무리해서, 정확히 30분 뒤에 메일로 보내주세요.”
“예, 대표님.”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제 끝이 보입니다. 그죠?”
“하하,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맞습니다. 아마 추가 수정 한두 번은 더 하실걸요?”
“후……. 아니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다들.”
팀장급 회의를 마치고 나온 우진은, 자판기에서 사이다를 한 캔 뽑아 들고 대표실로 돌아왔다.
톡-
사이다를 따서 한 모금 들이키자, 탄산으로 인한 청량감과 달콤함이 뜨겁던 머리를 조금 식혀주는 기분이었다.
지금 시간은 벌써 저녁 아홉 시.
자정 전에만 퇴근하자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지만, 아무래도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
우진이 대표실에 들어서자, 탁자에 앉아서 도면들을 검토하던 민선이 우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회의는 잘 끝났어요?”
민선의 물음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일단은요?”
민선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렇게 개운한 표정은 아닌데요?”
우진도 실소를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다 끝나야 개운하죠. 메일 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하.”
민선은 오늘도 WJ 타워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우진을 돕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돕는 것은 계약상 민선의 의무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발적으로 사무실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이 미안한 우진은 먼저 퇴근하라며 몇 번이나 권유했지만, 오히려 민선을 이렇게 대답했었다.
[제 역할이 프로젝트 검수라면서요, 그렇죠?]
[네, 그렇긴 한데…….]
[그럼 당연히 마침표 찍는 것까지 봐야죠. 맡은 일을 하는 거니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대표님.]
민선의 그 말이 떠오른 우진은 그녀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다시 들었다.
‘공모에서 당선이라도 되면, 정말 크게 한턱쏴야겠어.’
그리고 고마운 만큼, 더 좋은 디자인을 위해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도움이, 더 크게 빛을 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설계사항 바뀐 거 공유 좀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메신저로 보낼게요.”
“넵.”
우진은 회의 중에 나온 변경사항을 간결하게 정리하여 민선에게 보내주었고, 민선은 다시 노트북 마우스를 딸깍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수정안에 대한 피드백을 민선에게 받을 차례.
하지만 그녀가 수정안을 검토하는 동안에도, 우진이 쉬는 것은 아니었다.
우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황금빛 도면.
이렇게 설계가 한 번씩 바뀔 때면, 우진은 그것을 펼쳐봐야 했으니 말이다.
‘자, 이제 어떻게 됐으려나…….’
이것은 우진 본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작업.
딸깍- 딸깍-
도면 파일에 수정사항들을 빠르게 적용한 우진은, 그것을 커다란 종이에 인쇄하였다.
철컥- 지이잉-
처음처럼 전지 크기의 도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책상 절반이 가득 찰 정도로 널찍한 종이에 인쇄되는 도면.
그것을 프린트 기에서 꺼낸 우진은 자신의 책상 위에 펼쳐놓았고.
촤르륵-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황금빛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가늘고 복잡하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우진의 골든 프린트.
그것을 확인한 우진은, 꽤나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좋아. 확실히 나아졌어.’
한 시간 전만 해도 금빛 색채들이 가득했던 도면의 한쪽 부분이, 말끔하게 정돈되었으니 말이다.
오늘 우진의 목표는, 마곡 컨벤션센터 프로젝트의 모든 도면 위에 단 하나의 골든 프린트도 남기지 않고 전부 없애는 것이었다.
‘역시, 내가 생각하는 방향성이 맞았네. 결국 골든 프린트가 의미하는 건, 공간 사이의 불필요한 간섭이었어.’
방금 전 회의를 통해 가장 많이 바뀐 설계는, 유기적인 외관의 쉐입 일부가 매표소 구조로 인해 살짝 튀어나와 있던 부분이었다.
그것을 약간의 아이디어와 공간배치 수정을 통해 매끄럽게 개선한 것이었는데.
이 작업이 끝나니 덕지덕지 묻어있던 골든 프린트가 깔끔하게 정돈된 것이다.
이미 수많은 설계변경과 고민을 통해 어렴풋이 알던 부분이었지만, 최종 작업을 통해 이번 골든 프린트의 메시지를 완전히 확신할 수 있게 된 것.
스륵-
도면 위에 떠 있던 금빛 선들은 그대로 도면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설계 위에 남아있는 것은, 외곽선을 따라 은은하게 빛나는 골든 프린트의 잔상뿐이었다.
그래서 흡족한 표정이 된 우진은, 도면의 다른 곳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제 이 부분은 해결됐으니……. D 섹터를 다시 확인해 볼까?’
딸깍-
우진이 마우스를 클릭하자, 다시 한번 프린터가 요란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워낙 컨벤션센터의 면적이 넓다 보니, 한 장의 도면으로는 모든 평면을 확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보며, 노트북을 두들기던 민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
“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대표님은 왜 그렇게 매번 도면을 인쇄하세요?”
“음. 그건…….”
“그냥 모니터로 보고 실시간으로 작업하는 게 편하지 않아요?”
골든 프린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우진은 멋쩍은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그냥, 습관이에요.”
“습관이요?”
“종이로 봐야 느낌도 좋고, 좀 더 눈에 잘 들어온다고 해야 하나…….”
우진의 대답은 민선의 또 다른 오해를 낳았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하. 그냥 로봇인 줄 알았더니, 나름 아날로그적인 감성도 있는 분이셨네.”
“감성…… 이요?”
“나도 다음에 한 번 해봐야지.”
“흠, 크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인쇄는 다 됐고, 우진의 시선은 다시 도면으로 향했다.
민선이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것은 애써 외면하는 우진이었다.
‘이쪽 수정설계 부분은 골든 프린트가 어떻게 받아들였으려나…….’
프린트에서 도면을 집어 든 우진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것을 활짝 펼쳤다.
촤악-
지금 인쇄한 D 섹터 도면은, 가장 마음에 들게 변경된 도면.
지금 뽑은 도면만 깔끔하게 마무리되면 이제 추가적인 설계 수정 없이 마무리작업에 들어가도 될 것 같았으니, 골든 프린트가 이 도면에 어떤 평가를 내릴지 더욱 기대된 것이다.
하지만 책상 위에 도면이 펼쳐진 바로 그 순간.
‘……!?’
도면 위를 확인한 우진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말이 돼?’
회의를 통해 수정된 새로운 도면 위에는, 오히려 수정 전보다 더욱 복잡하고 어지러운 골든 프린트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으니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