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공간의 미학
우진은 석현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다시 그의 차에 올랐다.
“다리아파 죽겠어.”
“그러게 차에 가서 앉아있으라니까.”
“아니, 허허벌판에서 두 시간동안 스케치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그래서 맛있는 거 사줬잖아.”
“기름도 넣어 줘…….”
“흠. 그래, 공무집행이니까. 기름정돈 넣어 주지 뭐.”
“고급유 아니면 안 되는 거 알지?”
“젠장. 알겠어.”
석현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우진은 진짜 현장에서 노트를 든 채, 정확히 두 시간동안이나 스케치를 한 것이다.
아무리 현장에서 영감을 받았다 해도, 석현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긴 시간.
물론 우진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지만 말이다.
‘결국 못 찾았네…….’
아무리 우진이라 해도 두 시간 동안 현장에서 스케치를 하는 일은 잘 없다.
다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갑자기 나타난 골든 프린트 때문.
한번 떠오른 골든 프린트들이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알 수 없었으니, 이 금빛 선들이 전하는 메시지들을 확인하기 전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던 것이다.
“흠…….”
하지만 우진은 끝까지 이 골든 프린트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그 모든 이미지를 노트에 담아 왔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노트를 보며 다시 이미지화시킬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그림을 그려온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였다.
‘어렵네. 역시 쉽게 알려줄 리 없지.’
그래서 우진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도, 자신이 그려 온 그림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자 또 다시 기분이 좋아진 석현이 흥얼거리고 있었지만, 그런 소리조차 귀에 들리지 않는 우진이었다.
‘역시 이번에도 내가 스케치하는 그림에 따라서, 골든프린트의 형태는 계속해서 바뀌었어. 근데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도통 짐작이 안 된단 말이지.’
2시간 안에 우진이 그린 그림은 수십 장.
거의 노트를 꽉 채울 정도였다.
우진은 볼펜 자국이 빼곡한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어떤 스케치에는 골든 프린트가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어떤 스케치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우진이 이번 골든 프린트를 뜯어보던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던 부분은 불규칙성이었다.
항상 골든 프린트는 우진의 설계에 따라 규칙적인 변화를 보여줬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그림을 그려내다가도 어느 순간 푹 하고 사라져버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우진의 그림 퀄리티에 따라 좌우되는 것도 아닌 듯 했다.
어떤 경우에는 대충 휘갈긴 러프 스케치 위에도 골든 프린트가 아른거렸고, 어떨 때는 우진 본인이 만족할 정도로 멋진 스케치가 나와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으니까.
스케치들을 한 번 쭉 훑어본 우진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골든 프린트 덕에, 숙제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었다.
‘쉽지 않겠어.’
하도 집중해서 노트를 들여다본 탓인지, 아니면 석현의 운전미숙(?) 때문인지.
멀미를 느낀 우진이 노트를 덮고 의자에 기대었다.
그러자 조용히 운전에 집중하던 석현이 우진에게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우진아.”
“응?”
“이거 공모 요강은 언제 뜨는 거야?”
갑작스런 석현의 물음에, 우진이 고개를 갸웃 하며 대답했다.
“글쎄. 내일이나 모레?”
“아하.”
“근데 그건 왜?”
“그게 떠야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될 것 아냐?”
“그치.”
“그럼 모형파트도 준비시켜 놔야하니까.”
“모형?”
우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석현이 대답했다.
“디자인팀장님께 들은 건데, 해외공모는 대부분 모형이 필수로 들어간다던데?”
“아, 맞네. 그럴지도 모르겠어.”
석현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곡 MICE 사업장은 서울이지만 어쨌든 공모의 주체는 해외 사모펀드.
게다가 아무나 참가하는 공모가 아닌 소수정예의 비공개 공모이기 때문에, 우진이 생각하기에도 건축모형이 출품목록에 들어갈 확률이 매우 높았다.
‘공모가 뜨기 전에 골든 프린트의 메시지를 풀어야 하는데…….’
일단 공모 요강이 뜨고 나면, 본격적인 설계에 곧바로 착수해야만 한다.
설계일정 자체가, 상당히 빠듯하게 잡혀있었으니 말이다.
해서 우진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고, 그런 가운데 석현의 차는 무사히 사옥에 돌아왔다.
텅-
차에서 내린 우진이 석현을 보며 말했다.
“살아남았네.”
“살아남긴 뭘 살아남아. 어디 전쟁터라도 갔다 왔냐?”
“다음부턴 차 뒷 유리에 초보운전 스티커라도 붙이고 다녀.”
“홀리……. 초보운전이라니. 그럴 순 없어.”
“왜?”
“이건 포르쉐 오너의 자존심 같은 거라고.”
“자존심은 개뿔…….”
석현과 티격태격하며 사무실로 올라온 우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또 다시 노트를 뒤적였다.
아무래도 골든 프린트의 메시지를 해석해 내기 전까지는, 잠도 제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으, 머리야…….’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그 이틀 동안, 우진의 눈 밑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그 사이 혼자서 현장을 한 번 더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대체 뭐지? 도저히 모르겠는데…….’
공모요강이 뜨기 전까지 골든 프린트를 해석해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단 작업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래서 지금 모니터 앞에 앉은 우진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골든 프린트의 도움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이제 곧 그의 회사 메일로, 공모 요강이 날아올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띠링-
컴퓨터 앞에 앉아 메일을 기다리고 있던 우진은, 알림음이 들리자마자 재빨리 마우스를 클릭하였다.
딸깍-
[2013 마곡 MICE M-Tec 설계공모 요강 ]
공모 참가사 자체가 많지 않은 비공개 공모여서 그런지, 메일 제목에 친절히 WJ스튜디오의 사명까지 명시되어 있는 공모요강 메일.
곧바로 그 내용물을 다운받은 우진은 듀얼모니터에 화면을 띄워 올렸고.
공모요강을 처음부터 하나씩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흠…….”
그리고 이 내용을 한 페이지쯤 읽었을 때, 우진은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디테일하잖아?’
디자인 전문회사가 아닌 금융회사에서 나온 설계공모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디자인에 대한 가이드가 디테일하고 섬세했으니 말이다.
하여 우진은 흥미롭게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한 상태였지만, 어느새 우진의 눈은 다시 반짝이고 있었다.
‘호텔건물에 업무 동 디자인까지 전부 다 가이드가 제시되어 있네. 이러면 컨셉 잡기 확실히 편하지.’
자세하게 나온 가이드를 보며, 우진은 속으로 억울하기까지 했다.
워낙 자세히 가이드가 나온 덕에, 현장에서 고민했던 부분들의 절반 정도가 무의미해졌으니 말이다.
찌이익-
책상 한 쪽에 놓여있던 옐로페이퍼를 쭉 뜯은 우진은, 공모요강을 보면서 그 위에 슥슥 그림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공모요강 안에는 이미 디자인이 픽스된 다른 두 건물의 외관이 러프하게 들어와 있었으니, 그것을 보며 컨벤션센터의 실루엣에 대한 영감이 떠오른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디자인을 하는 것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당장에 떠오른 영감과 느낌 그대로를 메모처럼 남기고 싶었던 것.
그런데 그렇게 우진이 펜대를 놀리던 바로 그 때.
스르륵-
우진은 적잖이 당황해야만 했다.
“……!”
어지간히 그려서는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골든 프린트가, 옐로페이퍼 위에 대충 휘갈긴 러프 스케치 위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옐로페이퍼 위에 떠오른 골든 프린트의 윤곽은, 무척이나 또렷하였다.
현장에서 그렸던 스케치보다도 더욱 선명했던 것이다.
* * *
우진은 고민했다.
“대체 왜……?”
현장에서 돌아온 뒤로는, 여기저기 끄적여도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던 골든 프린트였다.
그런데 3분 만에 휘갈긴 이 컨셉 스케치 위에, 지금까지 중 가장 선명한 골든 프린트가 떠올랐다.
그 말인 즉, 뭔가 이 스케치 안에 단서가 있다는 이야기.
‘이유가 뭘까?’
우진의 머릿속에 간질간질한 기분이 맴돌았다.
조금만 더 고민하면, 결정적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그렸던 스케치들과 이 스케치의 다른 점…….’
당연히 디자인이야 달랐다.
우진이 그렸던 스케치 중, 디자인이 같은 스케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우진이 해야 할 것은, 방금 그려낸 스케치에는 없으면서 이전까지의 스케치들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
우진은 후다닥 노트를 꺼내어 스캐치들을 펼쳐 놓았고, 이어서 방금 그려 낸 스캐치와 비교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한 가지 가정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혹시……?’
우진은 얼른 옐로페이퍼를 몇 장 더 찢어 보았고, 그 위에 빠르게 스케치들을 그려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장.
그리고 두 장.
마지막으로 세 장.
“……!”
책상 위에 올려진 스케치 세 장을 확인한 우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이거였어!’
이제까지 없었던 골든 프린트의 불규칙성에 대한 단서를, 이 세 장의 스케치에서 찾은 것이다.
첫 번째 스케치는 좀 밋밋하긴 해도, 공모 가이드에 명확하게 맞춘 디자인이었다.
두 번째 스케치는 일부러 가이드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디자인한 스케치였다.
세 번째 스케치는 첫 번째 스케치와 다른 디자인이지만, 공모 가이드에는 맞는 디자인을 다시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우우웅-!
첫 번째 스케치와 세 번째 스케치에만, 선명한 골든 프린트가 떠올라 있었다.
‘아무리 스케치를 바꿔가며 해봐도 골든 프린트가 불규칙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네.’
우진이 현장에서 골머리를 가장 썩었던 가장 큰 이유는, 스케치를 진행하다보면 생겨났던 골든 프린트도 자꾸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보통 골든프린트는 스케치가 구체화되고 퀄리티가 높아질수록 더 선명하고 명확하게 떠오르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스케치가 정교해지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금빛 환영이 사라져 버렸으니.
기준이 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방금의 실험을 통해, 우진은 이 이유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현장에서 그릴 땐 공모 가이드를 모르는 상태였고……. 그러니 스케치가 구체화될수록 가이드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겠지. 그게 골든 프린트가 성립하지 않는 이유였어.’
우진의 얼굴에 의욕적인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 알아낸 이 사실이 디자인 자체에 도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고민에도 불구하고 골든 프린트의 비밀을 풀 수 없었던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하여 우진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실장님.”
[네, 대표님. 말씀하세요.]
“오후에 디자인 회의 잡겠습니다.”
[마곡 M-Tec 프로젝트 관련이지요?]
“물론입니다.”
[몇 시 정도로 잡을까요?]
“가능한 빠르게 일정 조율해서 전달 주세요.”
[예, 대표님. 그럼 3시 정도로 잡아보겠습니다.]
비서실에 연락해 회의 일정을 잡은 우진은, 지난 며칠간 떠올렸던 아이디어들을 공모가이드에 맞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골든프린트의 비밀을 푸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스케치들이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디자인 리소스가 되었으니까.
하여 그 날 디자인 컨셉 회의에서, 우진은 컨벤션센터 프로젝트를 향해 또 한 걸음 크게 다가설 수 있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