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공간의 미학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스케치에 집중하고 있었던 데다, 금빛 기운이 워낙 희미했기 때문이었다.
“야, 우진아. 커피라도 한 잔 사다 줄까?”
“이 근처에 카페가 있어?”
“한 5분 정도 차 몰고 나가면 있더라.”
“귀찮게 무슨…….”
“어차피 난 지금 할 것도 없잖아.”
“뭐, 그럼 다녀오든가.”
“오케이.”
하지만 우진의 스케치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희미했던 금빛 기운도 점점 더 진해졌고.
그렇게 시간이 좀 더 지나 석현이 커피를 사러 갔을 즈음, 쉼 없이 펜대를 놀리던 우진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응……? 이건…….’
펜대의 근처에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황금빛 기운을 발견한 것이다.
“……!”
두 눈을 깜빡인 우진은 좀 더 확실히 그 금빛 기운을 확인하기 위해, 노트를 살짝 멀리 들어보았다.
그러자 희미하게 퍼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황금빛 기류가, 우진의 눈에 명확히 포착되었다.
‘골든 프린트……!’
정말 오랜만에, 우진의 눈앞에 나타난 골든 프린트.
그것을 발견한 우진은, 순간적으로 복잡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연하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반가움.
하지만 마냥 반갑고 기쁠 수만은 없는 이유는, 아직도 우진이 이 골든 프린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다시 나타난 걸까?’
이 비과학적이고 초월적인 현상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를 알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본인 말고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우진이 알고 싶은 것은.
적어도 이 골든 프린트가 어떤 때 생기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우진의 곁에 있을 건지.
이 골든 프린트를 이렇게 계속 이용해도 되는 건지.
이런 부분들에 대한 의문이었다.
‘사옥을 마지막으로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우진은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봤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할 동안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골든 프린트.
그것이 갑자기 왜 이번 프로젝트에서 나타났을지에 대해 말이다.
‘이번 프로젝트가 지금까지와 다른 게 뭘까?’
그리고 고민 결과.
우진은 두 가지 가정을 세워볼 수 있었다.
첫째.
골든 프린트는, 우진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발생한다.
‘이런 가정이라면 확실히 갈수록 골든 프린트가 나타나는 빈도는 줄어들겠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접하지 못한 종류의 프로젝트 범위가 줄어들 테니까.’
둘째.
골든 프린트는 우진의 역량이 부족할 때 발생한다.
‘생각해 보면, 내가 뭔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골든 프린트가 나타났던 것 같기도 하고…….’
두 가지 가정 모두 나름 그럴싸했지만, 반대로 애매하기도 했다.
명확하게 와 닿는 가정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뭔가 나사가 하나씩 빠진 느낌이야.’
예전보다는 여유가 생겨서인지, 오랜만에 만난 골든 프린트에 대해 꽤 오랫동안 고민하는 우진.
그런데 그때.
스스슥-
노트에 일렁이던 골든 프린트가,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아, 잠깐……!”
사라지려는 골든 프린트에 우진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였다.
우진은 반사적으로 펜대를 잡고 그리던 것을 그려나갔고, 그러자 흩어져 내리던 골든 프린트가 다시 노트 위에 선명해졌다.
그것을 확인한 우진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우.”
물론 이 금빛 선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 전혀 감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일단 이번 골든 프린트가 뭘 의미하는 건지부터 알아내고 나서……. 다른 생각들은 그다음에 해야겠어.’
지금 우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골든 프린트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 * *
일반적으로 사모펀드는, 민간에 그렇게 인식이 좋지 않다.
대부분의 사모펀드는 빚을 이용하여 매입한 회사의 가치를 단기적으로 끌어올려 되파는, 차입매수(Leveraged Buyout) 방식의 투자를 선호하는데.
이러한 방식의 투자는 자칫 잘못하면 회사를 구조조정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를 사고팔아 차익을 남기는 게 목적이다 보니, 매입한 회사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운영하지 않는 것.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사모펀드가 이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사모펀드인 LTK그룹은 대형 M&A를 많이 하기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회사였는데.
이들은 국제 금융위기였던 2천년대 초, 국내 대형 기업 몇 곳을 인수하여 기사회생시켰던 회사였으니 말이다.
사모펀드의 가장 큰 장점인 자금 유동성을 활용해, 망해가던 회사를 살려낸 대표적인 모범사례를 가지고 있는 회사였던 것.
그래서 LTK그룹은 해외 사모펀드임에도 불구하고, 마곡 MICE 단지의 사업권을 인수할 수 있었다.
물론 땅값만 1조 원에 달하는 마곡의 MICE 복합단지를 소화할 수 있는 민간사업자가 국내에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말이다.
똑- 똑-
그래서 최근 LTK그룹의 한국지사 직원들은, 무척이나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본사에서 오랜만에 국내에 초고액의 자금을 투입했다 보니, 한국지사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실적을 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특히 MICE 사업은, 자본만 있다면 일반 관광산업보다 훨씬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 대상의 B2B(Business-to-Business) 관광산업.
능력과 실적에 따라 연봉이 책정되는 금융권 인재들에게는, 자신들의 몸값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실장님, 여기 보고서 가져왔습니다.”
“좋아요. 고생했어요. 호텔 쪽은 이제 얼추 마무리된 거죠?”
“네, 실장님. 시공사 선정까지 다 끝났으니, 내달 말에는 어느 정도 사업계획 윤곽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컨벤션 센터뿐입니다.”
“제일 중요한 게 남았네요.”
MICE란, Meeting, Incentives, Convention, Exhibition의 네 분야를 통틀어 말하는 서비스 산업이다.
기업회의, 포상관광, 행사, 그리고 전시.
그래서 MICE 산업단지는 항상 이러한 기능들을 동시에 갖춰야 하는데, 그래서 마곡 MICE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시설들을 필수적으로 건설해야만 했다.
일단 500실 이상을 서비스할 수 있는 4성급 이상의 호텔과 2만 제곱미터 이상의 문화 집회 시설.
그리고 5천 제곱미터 이상의 원스톱 비즈니스 센터.
마지막으로 지금 우진이 설계 공모에 뛰어든, 전용면적 4만 제곱미터 이상의 컨벤션센터까지.
산업단지마다 분야별 비중은 제각각이었지만, 마곡 MICE 단지에서 가장 큰 규모로 계획되어 있는 것은 컨벤션센터였고.
그래서 LTK그룹에서는 컨벤션센터의 사업 진행에 가장 큰 공을 들이고 있었다.
LTK 한국지사의 기획실 인원 절반이, 컨벤션센터 사업 진행 쪽에 투입되어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실장님.”
“말해요.”
“본사에서는 대체 왜, 이번 설계 건을 통합설계로 공모하지 않은 걸까요?”
“단지 전체를 하나의 디자인으로 묶는 게 더 좋지 않았겠냐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더 모양새가 더 좋았을 것 같아서요.”
호텔 사업 쪽을 담당하던 이 팀장의 질문에, 기획실장 송민아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것은 본인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이었고, 그래서 사업 초기에 본사에 문의했던 부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저라고 해서 본사의 의중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유로 설계 가이드가 이미 제시됐다고 알고 있어요.”
“설계…… 가이드요?”
이 팀장은 고개를 갸웃했고, 송민아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본사에서 가장 처음에 컨택했던 디자인회사 있잖아요?”
“네. ‘ALuna’라는 곳이었죠……?”
“맞아요. 세계적인 건축디자인 스튜디오죠.”
“그렇게 들은 것 같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 ALuna에게 전체 설계를 전부 다 맡기려고 했었대요.”
“엇, 그렇습니까?”
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정조율에 실패했죠. 설계 규모는 큰데, 일정은 빡빡했으니까요. 그래서 ALuna에서는 설계 가이드만 제시하기로 한 거예요.”
LTK는 금융그룹이다.
때문에 아무리 매머드급 회사라고 해도, 디자인 설계 방면으로는 전문인력을 보유하기 힘들다.
직접 설계는 당연히 불가능했고, 설계회사의 역량이나 디자인 퀄리티를 판단하는 것도 자체적으로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해서 LTK에서 선택한 것은 건축디자인 방면에서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ALuna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는데, 쉽게 말해 건축 설계의 디렉팅을 외주로 돌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전체 건축의 컨셉과 디자인을 대략적으로 ALuna에서 세팅한 뒤.
공모 자체에 직접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여, 디자인 방향성을 통일시킨 것.
이러한 설명을 들은 이 팀장은 대략적으로 이해가 됐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공모 가이드가 그렇게 복잡했던 거군요?”
“맞아요.”
“그럼 다음 주에 오픈될 컨벤션센터 설계 공모도, ALuna에서 직접 가이드를 제시하겠네요?”
“그렇죠.”
하지만 이 팀장은 아직까지도 의문이 전부 풀리지 않았다.
디자인을 잘 모르는 그였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음, 이건 제 사견이긴 한데…….”
“말씀하세요.”
“그런 식으로 가이드를 제시한다 해서, 통일성 있는 디자인이 나올까요?”
이 팀장의 질문에, 송민아는 또 한 번 웃음 지었다.
이 또한 그녀가 가졌던 의문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송민아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각 섹터 별로 디자인 설계가 전부 나온 뒤에, ALuna에서 그 디자인 변경 및 설계조율을 한 번 더 봐주기로 했다고 해요.”
“아하.”
“최종적으로 통일성을 다시 맞추려는 모양이더라고요.”
그제야 이해가 전부 되었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 팀장.
“그럼, 고생하십쇼, 실장님.”
“팀장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이 팀장이 보고를 마치고 나간 뒤, 책상 위에 어질러진 서류들을 정리한 송민아는 꺼져있던 모니터를 다시 켰다.
그의 보고서류는 이미 다 확인했지만,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은 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어디 한 번…… 열어볼까?”
그녀가 확인하려는 것은, 사내 메일로 송부되어있는 호텔 건물의 컨셉 설계도와 조감도.
물론 디자인과 관련된 업무가 그녀의 소관은 아니었지만, 프로젝트의 주요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순수한 궁금증이 생긴 것이다.
하여 압축되어있던 PDF 파일을 열어 랜더링 컷을 확인했을 때.
“오.”
그녀는 짧게 감탄하였다.
건축에는 문외한인 그녀였지만,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멋들어진 외관이었으니 말이다.
‘업무동 건물도 예쁘게 나왔던데. 컨벤션센터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호텔 건물의 설계와 업무동 건물의 설계는 해외 설계사무소에서 진행했다고 알고 있었다.
비공개 공모이긴 했지만 국내 설계사무소도 참가했는데, 전부 해외 스튜디오가 선정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내심 컨벤션 센터는, 국내 스튜디오에서 공모에 당선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LTK금융그룹이 국제 회사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MICE 산업단지의 사업장은 서울이었으니까.
‘어디 보자……. 컨벤션센터 공모는 마감이 7월이었지?’
멋들어진 호텔 건물의 조감도를 확인하고 나자, 마지막 남은 컨벤션센터의 외관이 더욱 기대되는 송민아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