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76화 (276/315)

276화

공간의 미학

민선과 석호가 사옥에 다녀간 그 날 이후.

우진과 WJ 스튜디오의 프로젝트 준비는, 더욱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다.

신규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인원배정부터 시작해서 레퍼런스 체크. 그리고 디자인 컨셉에 대한 R&D까지.

일주일 안에 본격적인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고,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때문에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되었을 때.

우진은 곧바로 외근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컨셉 디자인과 기본설계에 들어가기 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현장답사를 무조건 한 번 이상은 가보는 것은 우진의 설계철학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늘 우진과 함께 현장답사에 나서는 사람은, 진태가 아닌 석현이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최근 석현은, 운전대를 잡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으니까.

“너, 기분 좋아 보인다?”

우진의 물음에, 석현이 콧노래까지 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지금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데 참는 중이야.”

“안 참는 것 같은데?”

“야, 흥얼흥얼하는 건 좀 봐줘라.”

“오케이.”

석현은 노래 부르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문제는 지옥 같은 박치이자 음치라는 점.

‘음치는 구제가 가능해도 박치는 답이 없다던데…….’

그래서 평소 같았으면 생각에 방해된다며 석현의 흥얼거림도 저지했을 우진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봐주기로 했다.

오늘은 석현이 기분 좋을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야, 근데 차 진짜 잘 나간다.”

우진의 말에, 석현이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치? 차 죽이지?”

“그러게, 그냥 밟으면 튀어 나가네.”

“내가 어. 예전부터 괜히 포르쉐 노래를 불렀던 게 아니라니까?”

석현은 지난해, 포르쉐를 주문했다.

그동안 WJ 스튜디오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우진이 연봉을 올려 준 기념으로 말이다.

하지만 인디 오더 방식인 포르쉐는 주문자가 직접 옵션을 전부 선택해 개별로 주문을 넣어야 하는 자동차였고.

그래서 석현이 차를 받은 것은, 바로 지난주의 일이었다.

차를 주문하고 받기까지 거의 일 년이 걸린 것이다.

해서 우진은 이번 달 만큼은 석현의 업 텐션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지난 일 년 동안, 매일 출근하면 자신이 주문한 차의 자태(?)를 사진으로 감상하는 게 일과였던 석현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련하시겠어.”

“그러니까 너도 빨리 한 대 사자. 네 차도 이제 바꿀 때 됐잖아?”

“아직 고장 한 번 안 나고 잘 굴러다니는데, 멀쩡한 차를 왜 바꾸냐?”

“젠장.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우진은 아직 몇 년 전에 샀던 국산 중형 세단을 아주 잘 타고 다닌다.

물론 석현이 뽑은 포르쉐를 보니 조금 혹하긴 했지만,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워낙 많다 보니 그 이상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첫차로 포르쉐를 뽑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창밖을 응시하며 핀잔을 주는 우진을 향해, 석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였다.

“뭐 어때, 사고만 안 내면 되지.”

여유로운 척하지만, 손바닥에 땀이 나도록 핸들을 꽉 쥔 채 시속 60키로를 넘지 않는 석현을 보며, 우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휴, 이렇게 가다가 현장까지 하루 종일 가겠어.”

“오버하지 마. 조금 더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뿐이니까.”

“그래. 안전제일이지.”

출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올림픽대로는 밀렸다.

성수지구가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가면서, 강변북로 지하화 공사로 도로 일부가 통제됐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강변을 따라 서울을 횡으로 관통하는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는, 필연적으로 교통량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도로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10시에 성수 사옥에서 출발한 석현과 우진은, 12시가 다 되어서야 마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동구인 성수가 서울의 동쪽인 반면, 마곡은 서울의 서쪽 끝에 있었으니, 밀린 것치고는 빠르게 도착했다고 할 수 있었다.

네비게이션을 통해 마곡에 진입한 것을 확인한 석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와, 마곡? 여기는 서울 맞아? 완전 촌이네?”

석현의 말에 우진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곡이라는 석현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진은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우진의 기억에 있던 마곡과 지금 눈앞의 마곡은, 완전히 딴 판이었으니까.

‘2013년에 마곡이 이 정도였나?’

2015년만 됐더라도 마곡은, 번쩍거리는 새 아파트들이 들어선 신도시였을 것이다.

전생에 우진은 그맘때쯤 마곡의 현장에서 일했던 적도 있었고, 하여 그때의 기억을 생생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2013년인 지금은 논밭이거나 낙후된 빌라촌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이제 공사를 위해 땅을 다지는 중이었으니.

우진으로서는 놀라는 게 당연한 것이다.

아무리 현장에서 굴렀던 우진이라 해도 모든 도시개발이 정확히 몇 년 도에 이뤄졌는지까지 기억하지는 못했다.

‘마곡 엠벨리가 본격적으로 완공되기 시작한 게, 2014년 이후였나 보네.’

시내에 들어서자 석현은 더욱 천천히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고, 그 차 안에서 우진은 마곡의 전경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이때만 해도 마곡은 서울 변방 취급을 받으며, 미분양 걱정을 하던 때였다.

우진은 격세지감을 역으로 느끼는 아이러니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곡 신도시 완성되고 직후에 컨벤션센터 들어오면……. 진짜 볼 만 하겠어.’

마곡은 일반 뉴타운처럼 주거단지만 들어오는 지역이 아니다.

마곡 산업지구라고 하여, 대기업들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업무시설들이 조만간 대량으로 입주할 테니까.

단순히 베드타운이 아닌, 완성형의 뉴타운이랄까.

그 일부가 될 컨벤션센터를 디자인한다는 생각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우진은, 더욱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결국 공모를 따내지 못한다면, 한낱 미몽에 불과한 상상일 뿐이니 말이다.

우진이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 잠깐 길을 잃어 헤매던 석현은 현장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석현의 포르쉐도 아직까지는 무사했다.

“나 멀미할 것 같아.”

“뭐시라.”

“진정한 포르쉐 오너가 되려면 운전 연습 좀 더 해야겠어, 석구.”

반쯤 진담이 섞인 우진의 농담에, 석현이 버럭 반응하였다.

“네 멀미는 내 운전실력 탓이 아냐, 우진.”

“그럼?”

“나약한 네 정신력이 문제일 뿐이지.”

“…….”

“딱딱한 서스펜션과 승차감은, 주행 감성을 위한 스포츠카의 숙명.”

“급정거와 급발진도 스포츠카의 주행 감성이야?”

“시끄러워.”

“무튼 왔으니까 답사나 하자고. 돌아갈 땐 길만 잘못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크흑.”

두 사람이 차를 대고 내린 곳은, 널찍하게 다져져 있는 광활한 개발 부지였다.

아직 개발계획이 전부 확정되지도 않았는지, 펜스도 제대로 쳐 있지 않은 황야.

위이이이잉-

머리 위로 날아가는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를 뒤로 한 채, 우진은 스마트폰을 들어 저장해 둔 지도를 펼쳤다.

‘공항이 바로 옆이라 그런지, 소리가 꽤 시끄럽네.’

이 넓은 부지 안에서도 컨벤션 센터가 지어질 곳은 일부.

하지만 컨벤션 센터의 부지가 워낙 넓었기 때문에,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기다 우진.”

“오, 길치인 줄 알았는데……. 제대로 찾았네?”

“아니라고!”

그런데 처음 위치를 찾아낸 석현은, 조금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이런 식이면, 여기까지 괜히 온 것 아냐?”

석현의 물음에, 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왜?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었다면, 굳이 안 와봤어도 됐을 것 같아서.”

“아하?”

“현장답사라는 게, 디자인이나 설계에 도움이 되려고 온 거잖아?”

“맞지.”

“그런데 이런 수준이면, 그냥 항공뷰로 보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

석현의 말에 우진은 피식 웃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은 출발하기 전부터 대략적인 전경을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게다가 석현의 말과 달리, 충분히 얻을 게 있는 현장답사이기도 했다.

“석구.”

“응?”

“현장답사라는 건, 현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행위잖아?”

“그렇지?”

“나는 지도나 사진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기 위해서 여기에 나온 거야.”

“이를테면……?”

잠시 생각한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그 모든 과정들도 현장답사의 일환인 거고…….”

“아하?”

위이이이잉-!

“가끔 이렇게 한 번씩 들리는 비행기 소음도 사진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환경들이지.”

“그러네.”

“뭐, 답사 없이도 어떻게든 디자인이 나오기야 하겠지. 그리고 그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일 수도 있어.”

석현은 대답 대신 우진의 말을 기다렸고, 우진이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아야, 그 환경과 공간에 더욱 어우러지는 건축을 할 수 있으니까.”

“멋진 말이네.”

석현이 진심을 담아 대답했고, 우진은 씨익 웃으며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이 광활한 부지에 멋진 건축물들이 들어선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우진은 부지 외곽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석현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래도 주변까지 싹 다 공사판인 건 나도 좀 아쉽네. 주변 건축들이 어떤 디자인인지 알아야 더 어울리는 디자인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우진은 미리 준비해 온 지도를 보며 최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인근 건물들의 외관디자인까지는 지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어떤 용도의 건물들이 컨벤션센터 인근에 세워지는지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으니까.

지금 우진이 디자인하려는 컨벤션센터처럼 특화설계가 들어가는 건축이 아니라면 용도에 따라 어느 정도 외관을 상상할 수 있었으니.

최대한 머릿속에서 그 건축물들을 이미지화시키며 현장에 대입해 보는 것이다.

‘그래도 인근 부지들 중 절반 정도는 삽 뜬 걸 보니……. 컨벤션센터보다 공사가 길어질 부지는 많지 않겠네.’

들고 온 노트를 펼쳐 든 우진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열심히 그리고 메모하였다.

미리 디자인 컨셉 회의를 하며 준비했던 래퍼런스 이미지들을 공간에 대입해 보기도 하고, 주말 동안 그려놨던 아이디어 스케치를 검토해 보기도 했다.

다리가 아픈 것도 잊은 채,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펜을 놀리는 우진.

그리고 이러한 작업 과정 끝에, 우진의 머릿속에 조금씩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래. 비교적 트여있는 공간 쪽으로 문주(門柱)를 열어두고, 교통량에 대비해서 주차장 진출입로는 블록 외곽으로 빼면…….’

공간구획에 몰입한 나머지, 어느새 노트 위에 평면을 그리고 있는 우진.

그런데 바로 그때.

스르륵-

까맣고 얇은 줄만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던 우진의 노트에서, 은은한 황금빛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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