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75화 (275/315)

275화

또 다른 도전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큐레이팅과 전시 디자인은 다른 영역이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전시디자인과 건축디자인도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커다란 카테고리 안에서는 건축이라는 대전제 안에 전시 디자인이 들어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물론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점에서 두 분야가 비슷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디자인의 포커싱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건축이 아름답고 편리한 공간을 설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전시 디자인은 ‘해당 전시’를 얼마나 방문객들에게 아름답게 전달할 수 있느냐에 포커싱이 맞춰져 있었으니까.

그나마 우진은 일반적인 건축가들보다 전시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가 좀 더 있는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우진은 건축 이전에 인테리어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었고, 인테리어는 건축이라는 카테고리보다 좀 더 전시 디자인에 가까운 소분류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지금 눈앞에 있는 민선의 이야기들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모든 디자인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죠?”

민선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스토리가 있어야 영감이 생기고, 디자인에 생명력이 생기는 법이죠.”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백치미 넘치던 민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가 건축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전시 디자인이라는 분야는 건축보다도 그 ‘스토리’가 더 구체적인 영향을 미쳐요.”

“이를 테면요?”

“전시 디자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해당 전시에 담겨 있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 거든요.”

“보이지 않는 이야기라…….”

“물론 디자이너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라던가 미학이 담기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그 이전에 전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스토리를 방문객들에게 오롯이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죠.”

“맞는 말씀이네요.”

“전시라는 건 저마다 목적을 가지고 있거든요. 상업적 전시이던, 어떤 예술작품의 전시이던…….”

우진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민선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다.

만약 노트와 펜을 가지고 있었다면, 체면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메모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우진이 말했다.

“상업적 전시는 해당 상품들의 매력을 방문객에게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할 테고……. 예술작품의 전시에서는 그 작가와 작품에 담긴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거겠네요?”

민선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바로 그거죠. 이를테면 작가가 예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담아 놓은 자신의 스토리를, 시각적인 언어로 방문객들에게 번역해주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진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 ‘번역’이라는 걸 하기 위해선, 민선 씨가 먼저 그 작가님의 스토리에 대해 이해해야 하잖아요?”

“그렇죠?”

“민선 씨에게는 누가 번역해주나요?”

우진의 재밌는 질문에, 민선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호호, 당연히 전시의 주체가 되는 작가님이 해 주시죠. 전시에 담긴 스토리라던가, 의도라던가……. 그래서 가장 어려운 전시가, 이미 작고하신 작가님들의 전시예요. 제게 일차적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이 없는 거니까요.”

“그럴 땐 어떻게 해요?”

“저를 그 작가님께 대입해 보죠. 제가 만약 그 작가님이었다면? 그랬더라면 이 전시에 어떤 스토리를 담고 싶었을까?”

민선과 석호. 그리고 우진의 대화는, 꽤나 전시 디자인의 본질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얼핏 들으면 이번에 우진이 설계할 컨벤션센터와는 큰 연관이 없어 보일 정도.

하지만 애초에 우진은 디자인 설계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고, 전시와 전시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석호를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이러한 대화들은, 분명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우진이, 이번에는 석호를 향해 물어봤다.

“형님은 그럼, 여기 민선 씨랑 같이 일을 하셨던 거예요?”

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지? 미국에 있을 때 한 2년 정도……? 그땐 완전히 햇병아리였는데. 하하.”

민선이 째려보자 석호는 움찔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얘가 처음 우리 미술관에 왔을 때, 난 대충 5년 차 정도였어. 한창 나도 그렇고 우리 미술관도 그렇고 성장하던 시기였지.”

“진짜 그 시기가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불쑥 끼어든 민선의 말에, 흥미로운 표정이 된 우진이 물어보았다.

“왜요? 일이 많았나요?”

민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장난 아니었죠. 야근 없는 날이 없었고, 주말 출근은 기본이었을 거예요. 그때 정말 많이 배우긴 했지만……. 다시 그렇게 하라면 어휴, 못할 거예요.”

두 사람은 당시에 있던 일들을 하나둘 이야기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우진은 재밌는 부분들을 캐치할 수 있었다.

‘큐레이터와 전시디자이너는 이런 식으로 일하는구나…….’

단순히 큐레이터는 전시기획. 전시디자이너는 공간에 대한 디자인.

이런 식으로 업무가 분담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공간에 대한 제안을 큐레이터가 하기도 하고.

반대로 작품구성이나 전시 컨셉에 대한 제안을 디자이너가 하기도 하고.

지금까지도 현역인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보니, 우진은 현장감을 아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시 디자인이라는 분야도 깊게 파고들면 엄청 흥미롭네.’

예술작품들이 주로 전시되는 미술관과 달리, 상업작품이 주로 전시되는 평범한 전시장의 경우.

전시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지 않는 전시장도 꽤 많았다.

일반적으로 전시장을 대관한 업체나 개인이, 전시디자이너의 역할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우진이 참가했던 코엑스 리빙페어도 마찬가지였다.

공간구성이나 디자인 기획 컨셉 등을 우진과 <벨로스톤즈>의 민주영 대표가 맡아서 했었으니까.

그때 윤민선 같은 실력 있는 전시디자이너가 함께했다면, 좀 더 멋진 전시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진의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우진은, 오늘 묻고 싶었던,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슬슬 꺼내었다.

“그렇다면 민선 씨.”

“네?”

“민선 씨는 여러 전시장에서 일해보셨을 것 아니에요?”

우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민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막 그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녀 본 건 아니지만……. 한 여서일곱 군데 정도를 경험해 본 것 같아요.”

“오호.”

“단발성으로 참여했던 엑스포나 디자인 페어까지 생각한다면, 열 곳도 훨씬 넘겠네요. 그런데 이건 왜요?”

우진이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전시디자이너로서, 가장 좋았던 전시장에 대해 듣고 싶어서요.”

“가장 좋았던……. 전시장이라…….”

“전시공간마다 특색들이 다 다르잖아요?”

“그렇죠.”

“그중 디자이너로서 가장 선호했던 곳이 있나 해서요.”

“이번 디자인 설계에 참고하시려고요?”

“물론이죠.”

우진의 이야기에, 민선과 석호가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

물론 우진이 설계하려는 컨벤션센터는 그들이 주로 일했던 미술관보다 훨씬 더 규모도 크고 용도도 다양한 건축물이었지만.

그래도 분명 두 사람의 경험이, 조금이나 도움은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딸깍- 달그락-

대화를 나누느라 어느새 다 식어버린 음식을 한 숟갈씩 입에 담으며, 곰곰이 생각하는 두 사람.

그리고 잠시 후, 민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작품전시가 편리한 공간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그야 당연하죠.”

“제가 가장 좋았던 전시장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애너하임 컨벤션센터였어요.”

그녀의 답을 들은 우진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음?’

처음 전시디자이너의 일을 시작한 곳이 미술관이다 보니 미술관 중 한 곳을 지목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 우진이 참가하는 프로젝트와 같은 컨벤션센터를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우진은 가만히 경청했고, 민선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애너하임 컨벤션센터는, 미국 전시장치고는 작은 편이에요.”

“그래도 한국 전시장보단 크겠죠?”

“아마 코엑스보단 크고, 킨텍스보단 작을걸요?”

“아하.”

“사실 제가 이렇게 큰 전시장에서 일해본 적이 많지는 않아서, 비교군이 좀 좁긴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인 민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공간의 다양성이었던 것 같아요.”

“공간의 다양성이라…….”

“전시디자이너로서 정말 다양한 공간디자인을 시도해볼 수 있는 전시장이었거든요.”

우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요?”

“평면적으로 탁 트여서 넓은 공간도 있고, 수직적으로 여러 개 층이 높게 뚫려있는 중정 같은 공간도 있고…….”

“오호.”

“게다가 공간 간의 연계성도 상당히 괜찮았어요.”

“연계성은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서로 다른 공간들이면서도, 완전히 단절돼 있지는 않았거든요.”

“아하.”

“디자이너에게 선택지가 참 다양했던 전시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민선과 석호의 말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서인지, 점심 식사만 두 시간을 넘게 했을 정도.

물론 전시에 대한 이야기들만 했던 건 아니다.

민선도 우진에게 궁금했던 것들이 많았고, 해서 우진도 자신의 이야기들을 들려줬으니까.

그래서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음식점을 나왔을 때, 세 사람은 모두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잠깐 올라오셔서, 차라도 한잔 더하고 가시죠?”

“대표님 오후에 회의 있다면서요?”

“하하,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두 분 시간만 괜찮으시면 회사 구경도 시켜드릴 겸…….”

“좋아요! 저희야 당연히 좋죠.”

“야, 내 의견은 안 물어?”

“왜 이래? 어차피 오늘 저녁 약속, 나 보기로 한 거였으면서.”

“…….”

“오빠 먼저 왕십리가 있던가. 난 오늘 WJ 타워 구경하고 가야겠으니까.”

“와, 윤민선 대박…….”

우진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끌고, WJ 타워 투어도 잠깐 시켜주었다.

일반인들은 올라올 수 없는, 고층부까지 한 바퀴 돌아 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투자라고 할 수 있었다.

우진은 민선에게 약간의 흑심(?)이 생겼으니까.

‘IEA 소속 프리랜서면 어디 묶여있는 회사는 없는 거고……. 어쩌면 스카웃이 가능할지도…….’

WJ 스튜디오는 현재 전방위적인 공간디자인을 거의 다 취급한다.

때문에 종종 작은 전시 디자인 외주를 받을 때도 있었는데, 만약 민선을 스카웃할 수 있다면 전시 디자인 쪽도 적극적으로 키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이번 프로젝트 자문 구하면서, 차차 생각해 봐야지.’

WJ 스튜디오를 한 바퀴 구경한 뒤 대표실에서 커피까지 한잔한 두 사람은, 기분 좋게 WJ 타워를 나섰다.

“다음에 또 놀러오세요, 두 분.”

“정말? 그래도 돼요?”

“미리 연락만 주신다면, 얼마든지요.”

두 사람 덕에 많은 배움을 얻은 우진 또한, 즐겁기는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오늘 즐거웠다, 우진아. 도움이 좀 됐는지는 모르겠네.”

“하하, 당연히 도움 많이 됐죠, 형님. 덕분에 오늘 회의도 잘 풀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흐흐. 감사합니다.”

그리고 석호는, 건물을 나서기 전 우진에게 한 마디를 더했다.

“그나저나 우진이 너.”

“네?”

“조만간 내 미술관 지어주기로 한 건, 잊지 않았지?”

우진에게 자신의 미술관 디자인 설계를 맡기기로 했던 약속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 것이다.

“물론이죠. 그런데……. 조만간이라고요?”

“조만간은 무슨. 이 오빠 미술관 지으려면 아직 한세월이에요. 걱정 마세요 대표님.”

“야, 한 세월이라니. 이제 진짜 금방이야!”

“내가 그 말을 벌써 삼 년째 들어요, 삼 년째.”

두 사람과 헤어진 우진은, 곧바로 회의에 들어왔다.

“자, 다들 준비 되셨죠?”

“네, 대표님.”

“그럼 시작할까요?”

그리고 둘에게서 얻은 영감들 덕분에, 회의는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좋아. 이번 주 안으로 래퍼런스 체크 끝내고……. 다음 주에 현장답사만 다녀오면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시작해도 되겠어.’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새로운 활력과 에너지를 가져다준다.

그래서인지 우진은 오늘따라, 더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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