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또 다른 도전
우진의 점심 약속장소는 무척이나 가까운 곳이었다.
WJ 타워 내에 입점해 있는 고급 중식 레스토랑이, 오늘 점심약속이 잡혀있는 식당이었으니 말이다.
가격이 좀 비싸긴 했지만, 맛도 좋고 분위기도 괜찮은 데다 WJ 타워 내 식당들 중에 가장 조용한 프리미엄 레스토랑.
그렇기에 우진은 중요한 손님을 만날 때면 종종 이 식당을 애용했다.
“대표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예약은 되어 있죠?”
“물론이에요. 이쪽으로…….”
우진의 얼굴을 알고 있는 레스토랑의 사장이 친절히 예약된 방으로 안내해 주었고, 우진은 먼저 그 안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였다.
“A코스로 3개 주세요.”
“세 분이신거죠?”
“네. 아마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오늘 우진의 약속은, 정말 타이밍 맞게 잡힌 약속이었다.
만나기로 한 인물이 우진만큼이나 바쁜 사람이었는데, 마침 가장 좋은 타이밍에 시간이 맞았으니 말이다.
그 바쁜 사람이란, 다름 아닌 석중의 친구 석호.
우진은 석호를 석중에게 소개받은 이후 계속 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우진은, 잠시 어젯밤 통화를 떠올렸다.
[형님, 통화 괜찮으세요?]
[오, 샐럽 우진이가 전화도 다 걸어주고, 이거 황송하네.]
[하하, 샐럽은요 무슨. 요즘 많이 바쁘시죠?]
[나야 뭐, 바쁜 척하는 한량이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지난번에 저희 사옥 한번 놀러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혹시 언제 시간 가능하세요? 저도 형님 뵙고 여쭙고 싶은 부분이 좀 생겨서요.]
귀국한 이후 석호는 아직 기반을 만드는 중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인정받는 큐레이터였다.
큐레이터란 결국 전시에 관련된 모든 부분에 관여를 하는 포지션.
때문에 석호야말로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진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진은 건축을 잘 알지만 전시 디자인 경험은 많이 없었고.
해서 이번 마곡 전시장을 설계함에 있어서, 석호에게 조언을 좀 받고 싶었던 것이다.
디자인 자체에 대한 조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전시디자인과 큐레이팅은 또 다른 영역이었으니까.
다만 실질적으로 전시가 어떻게 기획되고 진행되는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는다면, 공간구조의 설계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될 터.
우진은 이런 얘기들을 석호에게 하였고, 석호는 기분 좋게 대답하였다.
[그런 부분이라면 정말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는데?]
[오……!]
[그럼 혹시 내일은 어때?]
[내, 내일요?]
[마침 내일 낮 시간이 비어서 말이야. 너만 시간 괜찮다면.]
약속이 조금 급한 감이 있었지만, 우진은 긴 고민 없이 그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생각해보면 우진의 입장에서도 본격적인 설계 회의가 들어가기 전, 석호의 조언을 먼저 들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럼 내일 점심 식사 어떠세요, 형님?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좋아. 내가 그럼 내일 점심에, 너희 사옥으로 갈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통화를 끊기 전, 석호는 우진에게 생각지 못했던 제안을 하나 하였다.
[아, 참. 우진아.]
[네?]
[사람 한 명 데려가도 될까?]
[사람…… 이요?]
뜬금없이 우진에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있다며, 함께 가도 되냐고 한 것이다.
[내일 저녁 약속으로 보기로 했던 친군데, 너한테도 도움이 좀 될 것 같아서.]
우진은 좀 당황했지만, 그렇다 해서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인맥이라면, 알아둬서 나쁠 게 없었으니까.
특히나 석호같이 자기 일하기 바쁜 사람이 터무니없는 사람을 우진에게 소개시켜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뭐, 좋습니다.]
[하하, 그래. 그럼 내일 보자고.]
[예 형님!]
그래서 석호를 기다리는 중.
우진은 석호가 데려온다던 그 사람이 문득 궁금해졌다.
‘나한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라……. 누굴까?’
약속장소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크게 궁금하지 않았는데, 막상 기다리기 시작하니 궁금증이 증폭되기 시작한 것.
그런데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또각- 또각-
룸 바깥에서부터, 누군가의 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 * *
텅-
택시의 문을 닫고 내린 석호는, 길가에 높게 솟은 건물을 보며 감탄하였다.
“키야……. 건물 간지 나네.”
그러자 그보다 먼저 내려 서 있던 여자가,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뭐야, 오빠. 여긴 왜 온 건데?”
길게 묶어 올린 포니테일에, 동그란 뿔테안경을 쓴 단아한 외모의 여성.
그녀를 힐끔 본 석호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였다.
“왜 왔긴. 약속 있어서 왔다니까?”
“약속장소가 WJ 타워였어?”
“어, 여기 유명한 중식집 있다던데?”
“WJ 타워야 맛집 많기로 유명하지.”
“그래?”
“나 성수동 자주 오잖아. 몰랐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오늘 석호가 우진과의 약속에 데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학교 후배였다.
석호가 유학파였으니, 그의 후배도 당연히 미국 유학생 출신.
그녀는 석호와 꽤 친한 사이였다.
선후배 관계를 떠나서 석호가 큐레이터로 일할 때에도, 꽤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동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한테 맛있는 밥 먹여주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건 아닐 테고…….”
“잘 아네.”
“대체 뭔데? 만날 사람이 있다는 건 누구야? 남자라도 소개시켜 주려고?”
“오, 제법 날카로운데?”
“정말? 남자? 나 화장도 제대로 안 하고 나왔는데?”
“한 다섯 살 연하도 괜찮다면…….”
“아니, 안 괜찮아. 휴우, 이 오빠한테 기대한 내가 바보지.”
“윤민선, 오늘 왜 이렇게 까칠해?”
“오빠가 까칠하게 만들잖아.”
석호의 후배인 민선은, 석호와 같은 전공을 했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인물이었다.
미술사와 미술품 컬렉팅. 그리고 전시기획에 관심 있던 석호와 달리, 민선의 관심사는 공간 디자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민선이 전공한 분야는 다름 아닌 전시 디자인.
그녀는 석호와 달리 한국에 입국한 지 꽤 오래됐고.
이미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전시디자이너였다.
“아무튼, 너 오늘 나한테 고맙다고 절해야 할지도 몰라.”
“아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려고…….”
“그만 떠들고 따라오기나 하시지? 약속시간 다 되간다.”
“알겠어. 밥이라도 맛있었으면 좋겠네.”
석호는 일부러 민선에게 우진을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장난이었다.
평소에도 그는 민선에게 장난치기를 좋아했는데, 오늘은 그녀를 크게 놀려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으니까.
석호가 알기로 민선은, 평소 우진의 팬이었다.
또각- 또각-
그래서 약속장소에 도착해 룸의 문을 열었을 때.
석호는 무척이나 기대하며 두 사람의 대면을 지켜보았다.
드르륵-
그리고 다음 순간.
“……!”
“어, 형님! 오셨어요?”
우진을 발견한 민선은,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서, 서우진……?”
* * *
우진을 발견하자마자 헛바람을 집어삼킨 민선은, 당황한 표정으로 횡설수설하였다.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놀라서 말실수를…….”
“하, 하하.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서우진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우진이 건네는 명함을 받아 든 뒤에는, 더욱 안절부절 못했고 말이다.
“저는 윤민선이라고 해요. 아차차, 제 명함이 어디 있을 텐데……. 잠시만요.”
민선은 너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사실 놀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와 마주한 우진 또한, 그녀만큼은 아닐지언정 꽤나 놀랐으니 말이다.
‘윤민선이라……. 혹시 내가 아는 그 윤민선인가?’
민선은 2013년인 이 시점에도, 전시 디자인 쪽에서 꽤 유명한 디자이너였다.
30대 젊은 디자이너들 중에서, 유일하게 국제 전시 디자인 컨퍼런스에 초대받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전생에 딱히 전시 디자인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던 우진도, 그녀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정도.
그래서 그녀의 명함을 받아 든 우진은, 속으로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게 도움이 될 사람이라더니……. 역시 빈말이 아니었네.’
얼굴과 이름만 듣고 긴가민가했던 그녀의 정체가, 명함을 확인하고는 확실해졌으니까.
[디자이너 - 윤민선]
[IEA 소속 프리랜서]
IEA는 International Exhibition design Association. 즉, 국제 전시 디자인협회의 약자였고, 이곳에 소속된 한국인 전시디자이너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우진은 환히 웃었다.
그녀의 조언을 받을 수 있다면, 디자인 설계까지도 아주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오늘 서우진 대표님을 만나 뵙는 자리인 줄은 몰랐어요. 진짜 영광입니다.”
“유명한 디자이너님을 뵙게 되어 저도 영광입니다. 석호 형님 덕에 또 이렇게 뵙게 되네요.”
우진의 말에, 옆에서 두 사람의 대면을 지켜보던 석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우진을 향해 물었다.
“너, 얘 알아?”
그에 우진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선은 우진이 작년 코엑스 리빙페어에 참가할 때도, 전시 디자인 자문을 받을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고민했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네. 전시 디자인 쪽에서 유명하시잖아요. 당연히 알고 있죠.”
그 대답에 민선은 더욱 호들갑을 떨었고.
“헉, 저를 아신다고요?”
“그렇습니다.”
“대, 대박!”
석호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얘가 그렇게까지 유명한 애는 아닌데…….”
“시끄러 오빠. 오빠는 좀 빠져 있어.”
“야, 너. 오빠 덕에 오늘 우진이도 만났는데!”
“오빠가 미리 안 알려줘서 화장도 안 하고 왔잖아!”
“연하는 별로라며?”
“제발, 오빠. 그 입 좀 다물어 주면 안 돼?”
그리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며, 우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석호도 그렇게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민선은 정말 특이하고 재밌는 인물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진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 일단 앉으시지요. 식사는 주문해 놨습니다.”
“그, 그래요. 제가 너무 주책이었죠?”
“내가 너무 시끄러운 앨 데려왔지? 미안하다.”
“아, 진짜. 이 오빠가……!”
첫 대면부터가 시끌벅적해서인지, 세 사람의 대화는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사실 어떻게 만났더라도 그들의 대화가 어색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평소 우진의 팬이었던 민선이, 자리에 앉자마자 폭풍 같은 수다를 쏟아내었으니 말이다.
“진짜 진짜,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저를요?”
“네. 사실 제가 우진 씨 팬이거든요.”
“가, 감사합니다.”
“왕십리 패러필드에 그 파빌리온은 진짜 충격이었어요. 제가 미국에서도 그런 디자인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하, 하하.”
“사실 처음에는 우진 씨가 방송인인 것도 몰랐어요.”
“제가 그렇다고 방송인은 아닌데…….”
“어머, 방송인이 아니라뇨. 거의 연예인이신데.”
“…….”
“무튼, 저는 그 파빌리온 처음 본 뒤로 우진 씨 팬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여기 WJ 타워도 우진 씨 작품이라면서요?”
“그런…… 셈이죠?”
“요즘은 무슨 프로젝트 준비하세요? 아, 맞다. 이천에 세트장도 한번 가 봐야 하는데…….”
민선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말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비호감이 느껴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말이 많은 덕에 우진도 스스럼없이 하고 싶던 이야기들을 쉽게 꺼낼 수 있었다.
“아, 사실 제가 이번에 설계 공모를 하나 새로 들어가는데…….”
“오! 어떤 공모예요?”
“마곡 M-Tec이라고, 이번에 마곡지구에 새로 컨벤션센터 하나 착공하거든요.”
“아, 정말요?”
“네. 거기 설계 공모인데……. 이게 꽤 규모가 큰 사업이거든요.”
우진은 민선과 석호를 향해, 프로젝트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 코스 요리는 나오기 시작했고, 대화는 점점 더 깊게 이어졌다.
“그러니까……. 건축설계라는 게 결국, 그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용자들의 시선에서 가장 좋은 공간이어야 하잖아요?”
“그렇죠?”
민선과 석호는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우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우진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그래서 오늘 석호 형님을 뵙고 싶었던 겁니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의견들을, 최대한 많이 들어보고 싶었거든요.”
우진이 눈을 빛내고 있는 민선을 슬쩍 응시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게다가 이렇게 전시디자이너인 민선 씨까지 뵙게 되었으니……. 저는 오늘 정말 운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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