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또 다른 도전
그날, 우진의 입학식 축사는, 당연히 SNS에 떠돌기 시작했다.
그가 단상에 서 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으로 촬영한 신입생만 열 명은 되었으니.
그것이 SNS에 올라오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가장 처음 올라온 영상은 순식간에 몇만 뷰 이상의 조회수를 찍었다.
우진의 축사가 대단했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최근 우진과 관련된 이슈가 인터넷에 너무나 뜨거운 상황이었고.
이런 때에 우진의 비공식적인 활동과 관련된 영상이 올라온 것이었으니, 네티즌들 입장에서는 관심이 생기는 게 당연한 이치였을 뿐이다.
당연히 댓글도 수백 개 이상 달렸다.
그중 절반 이상은 순수히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었고, 그 나머지의 절반 정도는 우진을 찬양하는 팬들.
나머지 중 일부는, 우진의 이러한 연설을 못마땅해하는 악플들이었다.
젊은 꼰대라는 둥, 지가 뭐라도 된 줄 안다는 둥.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물론 건축가협회와의 여론전에서 이보다 훨씬 더 심한 악플도 많이 경험해 본 우진에게, 그런 악플들이 딱히 데미지를 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꼰대 맞지 뭐. 내 나이가 몇 갠데.’
아침부터 대표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업무를 준비하던 우진은, 눈에 띄는 기사 몇 개를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사실 어제 축사를 할 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집에 돌아온 뒤부터는 조금 민망함을 느꼈던 우진이었다.
이제 겨우 인정받기 시작한 디자이너일 뿐인 자신이, 마치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이야기를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후배들에 대한 우진의 마음은 진심이었고, 그의 연설 또한 결코 보여주기식이 아닌 진정성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진은, 자신의 진심이 신입생들에게 잘 전달되기만 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딸깍-
출근하자마자 회사 메일에 쌓인 업무들을 쭉 확인한 우진은, 곧 다시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출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유 부릴 시간은 없었다.
공휴일과 주말, 입학식으로 인해 사실상 3월의 첫 출근이었던 오늘.
길게 쉰 만큼 할 일은 쌓여있었으니까.
우진은 책상 위의 수화기를 들어 비서실 번호를 눌렀다.
“회의 준비 다 됐죠?”
[네, 대표님.]
오늘 오전에 잡혀 있는 회의는, 원래 <청담 아르코>의 브랜딩 기획 회의였다.
이제 다진건설과의 설계조율은 다 끝났으며, 분양준비를 할 단계였으니 말이다.
만약 <아르코>가 이미 인지도 있는 기성 브랜드라면 홍보 전략만 짜면 될 터였지만.
이제 첫 출범 하는 브랜드인 만큼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오늘 잡힌 회의가 벌써 세 번째 브랜딩 회의였던 것.
하지만 어제 우진이 윤치형 교수를 만나고 온 덕에, 회의에 이슈 거리가 하나 더 생겨났다.
그것은 당연히, 마곡의 새 컨벤션센터인 M-tec의 설계 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넵, 알겠습니다!]
WJ 타워에는 회의실이 몇 군데 있었지만, 이렇게 중요한 실장급 회의를 할 때 사용하는 장소는 항상 바로 아래층의 회의실이었다.
선형 계단을 따라 회의실로 내려가던 우진은,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올해도 만만찮게 바쁘겠군.’
상반기에 출범 예정인 WJ 스튜디오의 첫 브랜드 <아르코>부터 시작해서, 이미 진행 중인 이천시 공공건축들과 마곡 컨벤션센터까지.
바쁘다는 생각을 시작한 지 벌써 사 년 차였지만, 우진은 여전히 바쁘게 달리고 있었다.
* * *
윤치형 교수는 우진에게 ‘기회’를 준다고 했다.
그 기회란 조만간 공시에 뜰 마곡 뉴 컨벤션센터인, <마곡엠텍>의 건축설계‧디자인 공모.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공시까지 뜨는 공모에 참가하는 것을, 왜 윤치형이 ‘기회’씩이나 준다고 표현했던 것일까?
그리고 마치 치형의 기회를 우진에게 양보해주는 것처럼 말했는데, 어차피 공모라면 누구나 다 참여해도 되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모를 양보해준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그런 개념이 아니었다.
그런 부분이었다면, 애초에 치형이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 공모는 말 그대로, 아무나 참가할 수 있는 공모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민영사업인 거군요, 대표님.”
“얼마 전에 사업권 7할 이상이 해외 사모펀드로 넘어갔으니까요.”
“그럼 국내 시행대행사에서 외주를 받았다고 보는 게 맞겠고…….”
“대표님 말씀 듣고 기사 좀 찾아봤는데, 사업권이 2회 정도 유찰된 적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비교적 싸게 팔린 것 같아요.”
국가에서 주관하는 공공사업이야 모든 공모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일단 공모 참가 자격부터도, 딱히 제한을 두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민영사업의 설계 공모는, 사업 주체가 전권을 쥐고 있다.
애초에 공모를 열든 내부 디자인 팀이 설계를 하든. 아니면 기존 거래처에 설계를 맡기든.
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게 당연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전시 건축디자인 쪽으로 이름 있는 건축가인 윤치형 교수에게도 제안이 왔던 것이고, 사실상 이 제안을 받지 못한 설계사무소의 설계는 공모에 투고한다 해도 검토조차 받지 못한다.
다만 우진의 경우 제안을 받은 윤치형이 시행사 쪽에 역으로 추천해 준 케이스였으니, 그가 자신의 기회를 넘겨준 게 맞다 볼 수 있었다.
“사업 규모가 엄청나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러프하게 책정된 공사비만 해도 왕십리 패러필드 세 배는 되니까요.”
“서울 내에 이 정도 규모의 컨벤션센터가 생긴다니…….”
그렇다면 이렇게 사업 주체가 전권을 가진 불투명한 공모전의 경우, 공공사업보다 훨씬 더 비리와 부정이 판치지는 않을까?
언뜻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
이런 민영기업의 경우 설계의 퀄리티가 곧 사업성으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특히나 해외 사모펀드같은 사금융이 끼어있는 경우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굴러가다 보니.
오로지 설계실력과 디자인 퀄리티가 모든 것을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그 사업적 손해를 메꿀 만큼의 로비를 받는다는 게 성립하기 힘든 조건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규모가 큰 사업일수록 그런 일은 일어나기 쉽지 않았다.
“완성되면 멋지겠네요.”
“저희가 따 내야죠. 이런 기회 흔치 않은 거, 다들 잘 아시잖습니까?”
“하하, 물론입니다, 대표님. 쉽진 않겠지만……. 최대한 노력해봐야지요.”
그리고 WJ 스튜디오의 실무진들은 그런 이치들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회의가 시작되자 더욱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청담 아르코>의 브랜딩 회의가 얼추 마무리된 뒤.
본격적으로 마곡 컨벤션센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 실무진들은 다들 눈을 반짝이며 저마다 의견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설계팀 인력을 더 충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대표님.”
“사람 구하는 게 쉽지 않은데…….”
“경력이 필요해서 그렇죠?”
“아무래도 이번 프로젝트에 바로 투입하려면, 최소 3년 차 이상은 되는 경력직이 필요하니까요.”
이미 WJ 스튜디오는 많은 작업들을 해왔고, 그중에는 어지간한 설계사무소가 건드려보지도 못했을 대형 프로젝트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 마곡 컨벤션센터 프로젝트는,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성수지구 설계 프로젝트와 비교하더라도 꿀리지 않는 볼륨이었다.
게다가 공공이 아닌 민영이 주체가 되는 사업이기에, 남는 것은 오히려 더 컸다.
방금까지 두 시간이 넘게 브랜딩 회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무진들이 눈을 빛내며 열정적으로 회의를 할 수 있는 이유였다.
가만히 이야기들을 듣던 우진이 입을 열었다.
“사업이 매력적이고 묵직한 만큼……. 그리고 사업 주체가 해외에 있는 만큼.”
우진이 잠시 뜸을 들이자 모두가 그에게로 시선을 모았고,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공모에는 분명, 해외 유명 설계사무소들도 많이 들어올 겁니다.”
실무진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진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껏 저희 회사에서 참가했던 그 어떤 공모보다도 경쟁이 치열할 거란 말이지요.”
WJ 스튜디오라고 해서 지금까지 모든 설계 경쟁에 승리한 것은 아니다.
회사가 커 오는 과정에서 우진이 아닌 다른 실무자가 주체가 되어 공모에 참여했던 적도 많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업체에 설계권을 뺏긴 적도 당연히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까지 전력투구로 진행한 프로젝트의 사업권을 뺏긴 적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이번 프로젝트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진은 생각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설계팀장 하나가, 웃으며 우진을 향해 물었다.
“각오 단단히 하라는 말씀이시죠?”
옆에 있던 기획실장도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진행할 생각 없으셨으면, 애초에 회의에 가지고 나오지도 않으셨을 분이니…….”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진태도 한 마디 덧붙였다.
“빡시게 한 번 해 봐야죠.”
이번에는 재무실장이 얘기했다.
“그래도 사업 주체가 해외에 있다면, 미당선 설계에 대해서 얼마라도 디자인 페이가 나올 겁니다. 물론 확인은 해 봐야 하겠지만요.”
“그럼 더 고민 없이 전력투구할 수 있겠군요. 인건비라도 건질 수 있다면…….”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던 우진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윤치형에게 이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을 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직원들도, 순수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띈 우진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실무진들에게도 처음 하는 이야기였다.
“만약 설계 채택된다면, 이곳 엠텍에서 열릴 첫 번째 전시는 2017 서울 모터쇼가 될 겁니다.”
“오……!”
“좋네요. 모터쇼라니.”
가만히 회의 내용을 메모하고 있던 석현도, 모터쇼라는 말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모터쇼? 정말입니까 대표님?”
반사적으로 반말을 하려 했던 석현은 회의 자리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존대를 하였고.
석현이 평소에 자동차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우진도 피식 웃었고 말이다.
“정말입니다, 이사님. 어때, 열정이 좀 더 생기시는지요?”
구체적인 계획에 대한 논의는 더 세부적으로 해야겠지만,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한 가지는 확정되었다.
그 어떤 실무인원의 반대 없이, 만장일치로 이번 프로젝트 진행이 픽스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디자인실장님.”
“네, 대표님.”
“일단 점심 식사하시고, 오늘 오후에 바로 디자인팀 회의 잡아도 될까요?”
“전체 회의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 작업 중인 일이 있는지라…….”
“다 오실 필요는 없어요. 팀장급 이상만 모여서 컨셉 회의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문제없습니다.”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자, 우진은 구체적인 플랜을 정했다.
각 파트별로 해줘야 할 일들이 정해져 있었으니, 각각 러프하게라도 일정을 산정한 것이다.
하여 모든 일정이 정해지자, 우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우리, 오전 회의는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그런데 그때, 디자인실장이 우진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럼 대표님, 오후 디자인 컨셉 회의는 2시쯤으로 잡으면 될까요?”
“아, 아뇨. 제가 점심에 약속이 좀 있어서…….”
우진이 시계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네 시 반 정도가 좋겠네요.”
“넵. 알겠습니다.”
“일곱 시 전엔 회의 끝내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하하.”
우진은 오늘 점심, 꽤 중요한 약속이 하나 잡혀 있었다.
그리고 이 약속에서 만날 사람은 이번 컨벤션 센터의 디자인 컨셉에 꽤 큰 영감을 줄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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