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우진의 이야기
윤치형은 쉽게 말했지만, 사실 입학식 축사라는 게 그렇게 가벼운 행사는 아니다.
그것은 신입생들이 처음 학교에 와서 느낄 첫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될 행사였으며.
대외적으로도 학과의 위상과 직결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입학식의 축사가 어째서 학과의 위상과 관련이 있다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보통 입학식의 축사에서는 해당 학교 출신의 선배가 후배들을 위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선배가 얼마나 저명(著明)한 사람인지에 따라 학교의 위상이 더욱 돋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오늘 K대 디자인학부의 입학식 축사를 우진이 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다면.
서우진이라는 건축가이자 기업가의 모교가 K대라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
그런 의미에서 꽤 즉흥적이기는 했어도, 윤치형 교수의 결정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우진이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것은 아주 괜찮은 선택이었으니까.
“반갑습니다, 후배 님들. K대 공간디자인학과 10학번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덕분에 우진은 계획에도 없던 연설을 하게 되어, 꽤 머리를 싸매야 했지만 말이다.
“서우진! 서우진!”
“야, 선배님 존함을 어! 그렇게 막 부르면 되겠어? 어!”
“우진 선배 잘생겼어요!”
“잘생겼다!”
“와아아!”
우진이 단상 위에 올라오자, 장내의 열기는 더욱 후끈 달아올랐다.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찰칵거리며 우진의 사진을 찍고 있었고, 일부는 아예 영상을 찍기도 하였다.
그에 사회자가 제지하려 했지만, 우진이 웃으며 만류하였다.
“괜찮습니다.”
“아, 넵. 선배님!”
이어서 잠시 심호흡을 한 우진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네.’
K대의 역사상 아직 졸업조차 하지 않은 학부생이 입학식 축사의 연사로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오늘 이 자리가 특별하다는 뜻.
그래서 우진은 보고 읽을 종이 한 장 들고 오지 못했을지언정,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고민을 하였다.
처음 디자이너의 꿈을 가지고 이 학교에 온 신입생 후배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우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기로 결정했다.
“먼저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후배 님들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 많이 노력하셨고,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디자인학교 중 한 곳에 입학하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선 모두, 축하받을 자격을 가진 분들입니다.”
우진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시끌벅적했던 장내는 점점 조용해졌다.
우진의 등장에 흥분했던 신입생들이 하나둘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첫 마디에 불과했지만.
진정성 있는 우진의 목소리가, 신입생들의 가슴을 울리기 시작한 듯하였다.
“또한, 부족한 제가 오늘 이런 영광스런 자리에 설 수 있게 허락해 주신 윤치형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진은 차분히 다시 말을 이어갔고, 이제 장내는 완전히 조용해졌다.
신입생들은 물론, 스탭으로 나와 있던 학부생들까지도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우진을 보고 있었다.
사실 학생들의 입장에서 입학식 축사라는 것은 굉장히 따분하고 틀에 박힌 행사로 인식되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사실이 어쨌든(?) 우진은 신입생들과 연배가 얼마 차이나지 않는 젊은 디자이너이자 가까운 선배였고.
그런 그라면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마른침을 삼킨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서기 전, 저는 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우진의 입에서 또박또박 명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과연 신입생 후배 님들의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입학식 연사로서 자격이 있을까?”
“이제 디자이너의 길 위에 처음 선 후배 님들에게, 내가 과연 어떤 이야기들을 해줄 수 있을까?”
방금 전까지 우진이 고민했던, 그 진심이 담겨있는 한 마디, 한 마디.
“이것은 결코 제가 이뤄낸 일들에 대한 겸손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우진은 신입생들의 면면에서 꿈의 첫 발자국을 내디뎠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보았기에, 더욱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저는, 말 그대로 무척이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운이 좋았다.
우진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을,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행운아였으니까.
물론 그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것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해볼 생각이었다.
남들은 하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선배로서의 어떤 조언보다는, 지난 삼 년간의 제 이야기들을 짧게 나눠보려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께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흥미로운 이야기일 테니까요.”
그리고 우진이 하려는 이야기의 시작점은, 3년 전의 바로 이 자리에서 부터였다.
* * *
우진의 이야기는 그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도 꽤 길어졌다.
축사에 따로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의 삼십 분이 넘게 이야기가 이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입학식장에 앉아있는 그 누구도 따분해하거나 졸지 않았다.
그것은 축사라기보다 한 사람의 일대기였고.
적어도 K대 디자인학부 입학식에 앉아있는 새내기들에게는 그 누구보다 선망하던 사람이 살아왔던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여러분. 학교 후문 쪽에 돈까스 집 아시죠? 그 뒷 건물 2층이, WJ 스튜디오의 첫 사무실이었습니다.”
처음 신입생 때 회사를 차려 건축모형 외주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와……. 1학년 때 세운 회사였어?”
“하긴. 그랬으니까 벌써 이렇게 큰 회사가 될 수 있었겠지.”
“진짜 레전드네.”
우진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모르는 신입생들의 입장에서는, 본인들과 같은 나이에 창업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으니까.
1학년의 신분으로 SPDC 대상을 수상했던 이야기가 나올 때는 다들 부러워하였다.
우진의 창업이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았다면, SPDC의 수상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꿈꾸는 것들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SPDC는 제게 정말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줬습니다. 제 머릿속에만 항상 존재하던 건축을, 처음 현실 세계로 끄집어낼 수 있었던 기회였으니까요. 그것은 건축디자이너를 꿈꾸던 제게, 그 어떤 경험보다도 값지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천웅건설 박경완 상무와의 인연과 스토리는 다들 흥미진진해 하였으며,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출연진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모두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제가 처음 임수하 배우님을 어디서 만났는지 아세요? 마포 클리오 모델하우스에서였습니다. 당시 모형 외주와 홍보관 인테리어를 맡았던 전 관계자로 있었고, 배우님은 손님으로 오셨었죠. 그때 임수하 배우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제가 <우리 집에 왜 왔니>에 출연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제가 운이 좋았다는 말, 이제 실감 좀 나시지요?”
“하하하하.”
스페인의 건축 거장 브루노와 왕십리 패러필드에서 협업했던 이야기는 신입생들에게 너무도 신기했고, 특히 영국 AA스쿨에서 있었던 국제 컨퍼런스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모두가 숨죽이고 우진의 말에 귀 기울였다.
“영국에 가서 제가 가장 많이 느꼈던 건, 해외의 유명 디자이너라 해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도 단지 디자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일 뿐이었고, 그들이 추구하는 건축도 우리가 추구하는 건축과 다를 바 없었던 거죠.”
물론 성수지구 설계에 참여했던 이야기도 나왔으며, 최근 가장 크게 이슈됐던 <천년의 그대>와 관련된 스토리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 안에서 부정적인 이야기들은 꺼내지 않았다.
SPDC에서 김기태와 있었던 일이라던가, 최근 건축가협회와 있었던 일 등 말이다.
학부의 입학식이라는 자리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자리였고, 이런 곳에서 굳이 부정적인 얘기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말씀드리면서 생각해보니, 이 모든 일이 3년 안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저도 믿기지 않네요. 하하.”
우진은 처음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해나가는 과정 속에 아무런 메시지도 담겨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진의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입학식장 안에 있던 학생들 중, 우진을 단지 ‘운이 좋았던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순히 운만 좋은 사람이라기에, 우진은 너무 많은 일들을 해왔고 지금도 해가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말씀드렸지만,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쉼 없이 이야기한 탓인지, 우진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조금 잠겨 있었다.
“하지만 제가 가진 것이 단순히 ‘운’ 하나 뿐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신입생들의 귀에 또렷하게 틀어박혔지만 말이다.
“저는 항상 꿈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나 도전했습니다. 그렇게 거창한 꿈이 아닙니다. 제 꿈은 그저 건축을 하고 싶다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우진은 지난 삼 년간 느껴왔던 것을,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완벽한 미래설계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꿈이라는 나침반을 잃지 않았고, 그 방향으로 항상 걸으려 노력했다고 해야 할까요.”
하여 마지막으로 우진이 신입생들을 향해 꺼낸 이야기는, 전생의 우진이 사십 대에 했던 후회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도전하지 않고 정해진 길만 가려 한다면, 단지 정해진 일만 일어날 뿐이죠.”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원하는 것들을 선택하지 못했던, 전생의 자신에 대한 성찰.
처음 단상에 설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우진은 어느새 열성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여러분이 열망하는 길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척되지 않은 길이라 하여 망설이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걸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진은 신입생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만 그 길이 어떤 길이던, 여러분이 진정 원하고 갈망하던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진의 축사에 마침표가 찍혔다.
“여러분 모두가 이 교정에서, 각자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입학을 축하드리고, 환영합니다.”
우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고요하던 장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다시 터져 나왔다.
고막을 때리는 그 박수 소리를 들으며, 우진도 어쩐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