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사냥꾼과 사냥감
어쩌면 냉정하고 슬픈 얘기일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법 재판이라는 것은, 돈의 힘에 꽤나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법 비리를 얘기함이 아니다.
재판장이 로비를 받거나 관계자들이 뒷돈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법의 심판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변호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변호사들을 고용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꽤 많은 돈이 필요할 뿐이었다.
특히나 이권이 많이 걸려있는 재판일수록, 그것을 지켜 내거나 빼앗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한 법.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상대가 대응하기 힘들도록 수많은 법률전문가를 고용하여 고소장을 한 트럭으로 때려버리기도 하니.
이런 공격을 받았을 때 충분한 자본이 없다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호사 한두 사람으로는 고소장 검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우진은 건축가협회보다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국민 여론까지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버린 지금.
연 매출 천억 단위가 넘는 회사의 대표가 된 우진이, ‘고작’ 건축가협회 정도에 자금력으로 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합의해 주실 생각은…….”
자문 변호사의 물음에, 우진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없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우진의 질문에…….
“끝까지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변호사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시지요. 이 정도면 최소 몇 년 정도는 실형 때릴 수 있을 겁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우진도 마주 웃었다.
“말년에 고생 좀 하시겠군요. 하하.”
미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우진은, 협회가 정신조차 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친 듯이 밀어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슈화된 현 상황을 더욱 부각시켰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전부 활용하였다.
특히나 인터넷에 다시 떠돌며 수백만이 넘는 뷰를 달성하고 있는 영상은, 다름 아닌 서울시에서 열렸던 ‘성수지구 통합설계 공모’ 발표 영상이었다.
압도적인 우진의 발표 영상과 대비되는, 말까지 더듬는 이호설계사무소의 발표 영상.
우진은 ‘이호설계사무소’가 협회 측에서 밀어준 회사라는 증언까지도 참여했던 대표들로부터 미리 확보해 두었고.
이것까지 기사화되어 동시다발적으로 웹상에 올라가기 시작하니, 불리하던 여론은 단숨에 우진의 편이 되어버린 것이다.
판세가 뒤집히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나절 정도.
우진의 부도덕함을 비꼬던 댓글들은, 어느새 건축가협회의 부정함을 성토하는 내용으로 싹 다 바뀌어 있었다.
└ 와……. 이 때 욕먹었던 찐따 같던 발표자가 건축가협회 소속이었다는 거지?
└ 소름 돋네. 이런 실력으로 지금까지 공공건축 해먹은 게 몇 군데나 될까?
└ 하……. 이런 쓰레기들이 판을 치니, 공공건축 디자인 수준이 다들 그 모양이지.
└ 이호설계사무소 여기는, 건축설계 면허는 있는 곳 맞음? 우리 학교 학부생도 이거보단 잘 하겠다.
물론 이호설계사무소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부분도 있다.
실제로 이 당시 발표했던 수준보다는, 훨씬 더 괜찮은 실력을 가진 곳이 이호설계사무소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억울함까지 우진이 신경 써줄 이유는 없었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당시 공모에 참여했더라면.
우진 또한 피해자의 입장이 되었을 테니까.
└ 그나저나 이거 영상 처음 봤는데, 서우진 진짜 대박이네.
└ 맞음. 솔직히 이정도로 실력 있는 건축가가 지금 한국에 있음?
└ 나도 이번에 영상 처음 봤는데, 진짜 대단하네.
└ 젊은 놈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니까, 협회 꼰대들이 못마땅했나봄.
└ 정확하네요. 딱 그짝인 듯.
└ ㅋㅋㅋ서우진 욕하던 애들 다 어디 갔냐. 젊은 놈이 돈 독 올라서 글러먹었다더니.
└ 다들 민망하겠지.
└ 그래서 이거 결말은 어떻게 날까?
여론이 한 번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그것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건축가협회가 여론몰이를 할 때야 우진이 비리를 저질렀다는 확증을 갖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번에 우진의 역공은, 본인의 결백과 함께 건축가협회의 완전한 비리증거까지 함께 첨부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협회장 주열이 가진 막강한 권력과 인맥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부패한 권력이라 하더라도 민심의 눈치는 볼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 건축가협회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 성난 대중은 등을 돌릴 것이다.
‘아무리 권력이 막강하다고 한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지.’
하여 우진이 역공을 시작한 뒤, 정확히 3일이 지난 시점.
아침 일찍 출근한 우진의 대표실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딸깍-
이어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던 우진이, 담백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무슨 일이시죠?”
[아, 대표님. 그게…….]
“네?”
[건축가협회 쪽에서 전화가 와서 말입니다.]
“누구한테요. 저한테요?”
[넵. 건축가협회 협회장 권주열이라고 하는데…….]
당황한 우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고 한들, 설마 자신에게 전화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하려는 건가.’
어차피 우진은 권주열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가 어떤 소리를 하더라도, 이번 소송에서 합의는 없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졌다.
[제 선에서 자를까요?]
“연결해 주세요.”
[굳이 그렇게 안 하셔도…….]
“궁금해서 그래요.”
[넵?]
“무슨 헛소리를 싸지를지.”
[아, 알겠습니다.]
우진의 말이 끝나자 다시 송신음이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예, 전화 바꿨습니다. 서우진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 협회장 권주열인데.]
협회장의 첫 마디를 들은 우진은, 더욱 어이가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뭔데 아직까지 이렇게 뻣뻣하지?’
까마득한 후배에게 굽신거리는 것이야 힘들지언정.
아쉬운 상황이 되었으면 적어도 예의는 차릴 줄 알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화가 난다기보다 말 그대로 어이가 없을 뿐.
피식 웃은 우진이, 능청스런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협회에서 제겐 무슨 일로…….”
너무도 태연한 우진의 목소리에 반대로 당황했는지, 잠시 동안 수화기에선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를 꾹 눌러 담은 권주열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설마 진짜로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지만…….]
“…….”
[협회에 원하는 게 뭔지 궁금해서 전화를 했네.]
“원하는 거요?”
[소송 계속해서, 서로 남는 것도 없잖나?]
“남는 거라…….”
[자네가 이겼어. 그러니까 이제 소모전은 끝내자고.]
너무도 뻔뻔한 주열의 목소리에, 우진은 살짝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진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
“거래라는 건, 말입니다. 서로 뭔가 아쉬운 게 있어야 성립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무슨…….]
“협회에서 제게 줄 수 있는 게 있습니까?”
[뭐라?]
당황한 권주열의 반문에,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협회가 저보다 실력이 있습니까, 비전이 있습니까. 아니면 돈이라도 많습니까.”
[이……. 이 새끼가……!]
주열의 입에서는 육두문자가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업계 선배라는 사실이, 저는 너무 부끄럽습니다.”
[너 미쳤어?]
“아직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시겠다면, 콩밥 먹으면서 잘 생각해 보시지요.”
우진의 담담한 이야기에, 주열은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하여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의미 없는 발악뿐이었다.
[너, 서우진이. 정말 끝까지 가보자는 거야?]
“제가 어딜 끝까지 갑니까?”
[앞으로 한국에서 건축 안 할 거야? 연예인 행세 좀 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어?]
“앞으로 한국에서 건축 못 하는 건,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
“더 하고 싶은 얘기 없으니, 전화는 이만 끊겠습니다.”
뚝-
우진이 전화를 끊은 뒤에도 다시 전화가 걸려왔지만, 우진은 비서실에 지시하여 협회 번호를 완전히 차단시켜 버렸다.
‘자신이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이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지.’
그리고 자리에 앉아, 아직까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천천히 홀짝이기 시작하였다.
“후후.”
회귀 이후 우진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달라진 줄 알았다.
전생에서는 그렇게 부조리하고 캄캄하던 세상이었건만.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후에는 꿈과 희망이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은 바뀐 게 없어.’
세상이 바뀐 게 아니라, 세상을 보는 우진의 시야가 달라졌음을.
부조리하던 세상이 꿈과 이상으로 가득 찼던 게 아니라, 그 꿈과 이상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생긴 것이었을 뿐임을.
끼익-
여유로운 표정으로 창밖을 내려다보던 우진은, 문득 의자를 돌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우진의 시선이 닿은 곳은, 책상 구석에 놓여 있던 달력이었다.
“음……. 오늘이 드디어 방영날인가?”
날짜와 요일을 확인한 우진은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수요일인 오늘은, 우진이 카메오로 출연했던 회차가 드디어 방영되는 날.
해당 회차의 방영 이전에 여론을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뭐……. 아다리가 잘 맞아떨어져서, 홍보 효과는 극대화되겠네.’
의자에 잠시 기댄 우진은, 조금 더 고민을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내일 우진이 <천년의 그대>에 깜짝 출연하면서, 이번 사건과 우진의 발자취가 한 번 더 언론에 재조명될 터.
이런 더 없이 훌륭한 기회를 어떻게 하면 더욱 극대화시킬 수 있을지, 그게 고민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 떠올랐는지, 우진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하였다.
띠띠- 띠띠띠-
이어서 전화를 받은 것은, 비서실의 실장이었다.
“실장님, 통화 가능하시죠?”
[예, 대표님. 어쩐 일이신지…….]
“아, 다른 건 아니고 제가 개인 명의로 매입해 둔 필지가 좀 있지 않습니까?”
[필지라면……. 아, 이천 말씀하시는 거죠?]
“예. 세트장 인근에 사뒀던 땅 말입니다.”
[넵.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이 다시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그 필지 중에서 이번에 택지개발에 포함되면서……. 용도 변경된 땅이 일부 있지 않습니까?”
[예. 있죠.]
“아마 이번에 택지분양 확정되면 토지보상금 나올 텐데……. 그 돈 전부 지역사회에 기부하려 합니다.”
[예? 기부라고요?]
우진의 말을 들은 비서실장은, 순간 당황하여 놀란 목소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진이 사둔 땅은 더 많았고 토지보상금을 받게 될 토지는 그중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액수로 환산하면 십억 단위가 넘을 그 금액을, 선뜻 지역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말이 믿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비서실장의 반응에, 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기부는 하지만,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도 알게 할 생각입니다.”
[그 말씀은…….]
“전 국민 중에 제 선행을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마케팅 팀에서 신경 좀 써주시죠.”
[아……!]
아무리 우진이라고 해도, 십억이 넘는 돈이 아깝지 않을 리가 없다.
천억 단위가 넘는 매출은 회사의 매출이지, 우진 개인의 자산과는 별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은 더 큰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가 당장 기부하는 것은 십억일지언정, 그것으로 우진이 얻을 수 있는 무형의 가치는 그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나 이렇게까지 우진의 행적이 이슈화된 상황이라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다.
[마케팅팀과 회의해서, 전략 수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마세요. 보도자료는 늦어도 내일 나가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자, 우진은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됐어. 이 정도면 난, 할 만큼 했지.’
업무를 빠르게 마무리한 우진은, 오랜만에 정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었을 때, 우진은 TV 앞에 앉아있었다.
골든 프린트